사라진 반쪽
브릿 베넷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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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 외곽의 작은 마을 맬러드. 백인으로 받아들여질 일은 없으나 니그로로 대우받기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타운이다. 1848년 앨폰스 드퀴어가 물라토와의 결혼을 시작으로 그들은 세대를 이어갈수록 피부색이 옅어졌다. 맬러드 마을 사람들의 목표는 각 세대가 직전 세대보다 더 하얀 피부가 되는 것이다. 맬러드에서는 아무도 피부가 검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고, 타운을 떠나는 사람도 없었다.


데지레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도 아무것도 달라질 것 같지 않은 맬러드 밖의 삶에 대해 늘 환상을 품고 있었고, 그와달리 스텔라는 아주 현실적이었다. 학업에 열중했고, 맬러드고등학교의 교사가 되고 싶었으며 엄마를 두고 맬러드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으로 인해 아델은 열여섯 살 쌍둥이 자매에게 학업 중단을 통보하고 그들의 일자리를 구해놨다. 대학을 갈 계획이었던 스텔라에게는 청천벽력이었고, 언젠가 스텔라를 대학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질 것이 두려웠던 데지레는 오히려 안도했으나 부유한 백인의 집에서의 청소일은 쌍둥이가 맬러드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데지레는 맬러드가 아닌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검은 남자와 결혼했고, 스텔라는 데지레를 남겨두고 소리없이 떠난 후 패싱했다. 그리고 사라졌던 쌍둥이 중 데지레가 14년 만에 블루블랙빛 피부를 가진 딸 주드를 데리고 맬러드에 돌아왔다. 


ㅡ 


소설은 1968년부터 약 20여 년간의 시간을 오가며 서술한다. 쌍둥이는 어린시절 아버지 리언이 백인에게 폭행을 당하고 총에 맞는 모습을 목격했다. 특별한 잘못도 없이 화풀이 대상이 된 리언은 두 번째 린치를 당할 때 머리에 총 두 방을 맞고 사망했다. 쌍둥이는 인종이 가져오는 사회적 모순과 폭력적 차별을 바로 눈앞에서, 그것도 아버지를 통해 깨닫는다. 아무리 얼굴이 백인과 가까워져도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유색인이라는 것을.  


데지레는 워싱턴에서 까맣지 않은 피부 때문에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했고, 그녀의 딸 주드는 맬러드에서 유난히 까만 피부 때문에 학교폭력을 당했다. 맬러드에서의 짙은 피부색 흑인, 백인 사회에서의 유색인, 백인과 흑인 사회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패싱. 소속된 집단에서 벗어나면 어디에서도 오롯이 자기 자신일 수 없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텔라는 자신을 늘 가둔다. 유색인들이, 백인들이, 그녀가 패싱임을 알아볼까봐.  


나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맬러드에, 딸까지 데리고 제 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데지레보다 유색인 세계에도, 백인의 세계에도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없어 평생을 거짓 가면을 쓰고 살얼음판을 걷듯 살아야했던 스텔라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백인 부유층이 사는 마을에 흑인 유명 배우가 이웃집으로 이사를 온다는 소식에,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봐 두려운지, 아니면 그들을 저지하려는 백인들의 행동이 두려운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을만큼 혼란을 겪는 스텔라의 두려움과 외로움이 안타까웠다.  


어린 시절 백인들에게 모욕과 차별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스텔라가 패싱 이후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위치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을 무의식중에 그대로 따라할 정도로 그녀는 어느새 백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린치를 견디지 못한 이웃 흑인 일가족이 떠나자 데지레를 잃었을 때(비록 본인이 몰래 떠났지만)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백인처럼 행동하고, 백인처럼 사고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그녀는 여전히 외줄을 타고 있는 곡예사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ㅡ 


엄마가 아빠에게 가정폭력을 당하고 집을 나와 찾아간 곳은 외할머니가 계신 맬러드. 마을 사람들 모두 백인에 가까운 하얀 피부를 갖고 있어 흑인 중에서도 유독 까만 피부를 가진 주드는 별종 중의 별종이다. 아무도 그녀가 데지레의 딸이라는 것을 믿지 못할만큼 그녀는 까맣다. 그렇기에 주드는 맬러드에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다.  


케네디는 자신이 니그로 혈통임을 믿을 수 없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아름다운 엄마가 흑인일리 없다. 종종 롤러코스트를 타듯 감정기복이 심하고 자신의 과거를 꼭꼭 숨겨둔 아름다운 엄마의 신비로운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주드는 경제적 궁핍에도 불구하고 연인과 신뢰와 사랑을 다지며 의과대학에 다니면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나아가고 있다. 케네디는 그녀의 소식을 들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지하층 아파트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남자와 동거하고 대학 학위도 없고 매일 밤 빈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커피를 서빙하고 있는 자신을. 케네디는 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케네디의 일탈과 방황이, 스스로를 감추어야했고 유년 시절과 결혼 이전의 삶에 대해서 함구하는 엄마 탓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주드를 만나 엄마의 정체를 알게 되고, 결혼 이후 엄마의 삶이 거짓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딸인 자신보다 조카라고 할 수 있는 흑인 여성이 자기 엄마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은 케네디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더구나 엄마의 거짓된 삶은 곧 자기의 삶 역시 거짓이라고 여겼을테니 정체성 혼란까지 일었을 터다. 케네디는 늘 새로운 삶을 만들어냈고, 흔들렸다. 따지고 보면 스텔라의 거짓된 삶이 케네디에게는 해롭지 않았다(물론 이런 부분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만). 하얀 피부, 아름다운 금발, 부유한 아버지. 스텔라가 흑인의 삶을 살았다면 케네디가 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황조차 사치로 취급되는 것 역시 엄마인 스텔라의 거짓된 삶 덕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케네디가 더 혼란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서 눈여겨 볼 만은 관계는 흑인 주드와 성전환자 리스, 그리고 데지레와 얼리의 사랑이다. 흑인, 여성, 성소수자, 전과자 등 사회적 약자인 그들의 사랑은 오랜 세월을 지속하며 진실과 신뢰, 그리고 이해와 배려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반면 스텔라는 처음 블레이크와의 만남부터 거짓으로 시작해 늘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고, 진실을 알게 된 딸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 타인에게 악의를 갖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었음에도 스텔라가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거짓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PTSD로 인해 하루도 편하게 잠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자신 역시 아버지처럼 언제라도 벡인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데지레와 스텔라. 두 사람 모두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강요받지만, 아무도 이것을 강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발적 선택, 우리에게 과연 '자발적'인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사족
넬라 라슨의 <패싱>, 마리즈 콩데의 <이반과 이바나...>도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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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9
엘리자베스 인치볼드 지음, 이혜수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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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4부로 구성된 소설은 도리포스(엘름우드 경)을 중심으로 1,2부는 그의 아내 밀너와 3,4부는 그들의 딸 머틸다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후견인인 카톨릭 사제 도리포스와 한 집에서 살게 된 밀너 양은 시간이 흐르면서 도리포스를 사랑하게 된다. 당시 여성으로서 사제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흔치 않은 일인데, 그녀가 도리포스를 사랑하는 방식이나 남성을 대하는 태도가 당돌하다고 할 만하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도리포스가 사교모임과 외출을 제한하자 왜 그래야하는지 이유를 따져 묻고, 그가 배우자로 권하는 남자를 단칼에 거절한다. 후견인이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한 동생에 대한 분노로 생계 지원만 할 뿐 정서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고아가 된 그의 세살박이 조카를 사전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데려오는가 하면, 후견인의 스승인 샌퍼드 신부 면전에서 부러 어깃장을 놓고 그와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또한 밀너는 도리포스의 조언과 가르침에 순종하기보다는 한평생 수도원과 서재에 틀어박혀 사는 사람이 사랑과 사교계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당시로서 보기 드문 주체성과 자아의식이 강한 여성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현명하지 못하고 경솔한 태도가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자신에 대한 도리포스의 사랑을 확인하겠다고 그를 시험하는데, 정도가 지나쳤다. 후견인과 예비 남편의 말에 복종할 수도 있지만, 연인에게는 복종하지 않겠다며 막무가내로 더 엇나가 도리포스를 자극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이 철부지 어리석음이 결혼까지 가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된 셈이니 그녀가 의기양양할만하다. 이 경솔함이 결혼 이후까지 이어진 것이 문제지만. 멀리서 보면 고지식한 샌퍼드 신부가 그녀를 싫어하는 게 당연하지 싶다.   


ㅡ 


세상 일은 알 수 없다더니, 쓸쓸히 죽어가는 밀너의 곁을 지키는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샌퍼드 신부였고, 그녀의 딸 머틸다를 끝까지 보살피겠다는 맹세를 한 이도 역시 그다. 죽음을 눈앞에 둔 밀너를 위로한 것은 도리포스의 사랑이 아니라 샌퍼드의 연민이다.  


밀너는 편지를 통해 도리포스에게 머틸다를 받아주기를, 당분간만이라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살 수 있게 해주기를 간청했다. 남편이자 자식의 친아버지에게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결국 딸이 자기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 밀너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내의 후견인이었다가, 딸의 후견인이 되는 도리포스의 심경은 또 어떨까. 아내에게 향한 분노와 딸을 분리시키지 못하는 도리포스의 완고함은 참 비정하다.  


도리포스는 죽은 아내의 부탁을 받아들여 자기의 시야에 걸리지 말라는 조건으로 머틸다를 엘름우드 하우스에 들이면서, 아내와 딸의 이름을 금지어로 선포했다. 도대체 아내에 대한 애증이 얼마나 깊으면 이럴 수 있을까.  


머틸다는 지나칠 정도로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한다. 자유롭게 생활하다가 도리포스가 런던에서 돌아오면 머틸다는 은둔자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바람처럼 소리없이 다녔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한 집에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열일곱 살, 그녀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처음 만난 때와 비슷한 그 나이. 만약 이와 같은 상황이 밀너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런 상상만으로도 독자는 두 모녀가 얼마나 다른지 짐작이 가능하다.  


독자는 도리포스의 완고함과 어리석음도 짚고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그는 혼란스러운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기를 기피했고, 분노와 애증을 해결하지 못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스스로를 학대했다. 그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위기에 처하거나 죽음을 통과하고 나서야 자신의 감정과 대면한다. 한때 신을 향한 오롯한 소신과 완고함이 인간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는 독으로 작용했다.  



작가는 열린 결말로 소설을 마무리 한다. 머틸다가 과연 러시브룩의 청혼을 받아들였을까? 머틸다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그들 모두는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 


작가는 밀너 씨가 후견인을 두어 모든 재산을 딸에게 상속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올바른 교육을 부여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도리포스가 먼 친척에게 재산을 상속함으로써 머틸다는 가난과 정서적 학대라는 역경을 딛고 올바른 교육을 통해 순종적인 여성으로 성장했다고 말한다. 상반되는 성향을 지닌 두 모녀를 대조한 이 소설에서 이와같은 작가의 의도는 의미심장하다. 


이런저런 시대적 배경과 과정을 차치하고, 머틸다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과연 '교육'에 있겠는가. 어머니는 유언 한 줄, 유산 한 푼 없이 죽고, 아버지에게는 내쳐졌으며, 자신을 내친 아버지는 친척 오빠를 후계자로서 곁에 두고 살뜰히 보살핀다. 재산가 부모를 두고도 생계의 위협마저 받았던 머틸드는 엄밀한 의미에서 부모 양쪽에게 모두 버려졌다는 피해의식과 완전한 보호자가 없다는 불안감으로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어느 누가 복종하지 않겠는가. 


어느 의미에 있어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18세기 남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폭군이다. 러시브룩조차도. 쓰다보니 작가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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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2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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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의 수석 집정관 임기로 시작하는 2권의 꽃은 카틸리나의 반란으로 인해 화두가 된 '원로원 최종 결의'다. 키케르가 수석 집정관의 직위를 이용해 카틸리나 반란에 공모 혐의가 있는 다섯 명의 로마인을 재판도 없이 사형에 처한 것이 논란의 발단이었다.  










카이사르는 키케르가 '공화국 수호를 위한 원로원 결의'에 대한 로마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재판과 법식도 없이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반란 혐의자들을 최고속 사형에 처한 것에 분노한다. 이는 재판 없이는 유죄를 선고받지 않을 로마 시민의 절대적인 불가침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원로원 최종 결의가 최초로 생겨난 것은 단시일간의 민간 소요 사건이어었던 가이우스 그라쿠스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였고, 이후 술라의 이탈리아 상륙과 레피두스의 반란까지 그 횟수가 적었으며, 무엇보다 최종 결의가 선포된 것은 실질적인 군사적 도발이 있어 위급한 상황이었을 때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카틸리나의 반란 사건은 군사적 도발이 전혀 없었고, 로마인을 상대로 무기를 든 자도 없었으며, 정작 사형된 이들은 공공의 적으로 선포된 상태도 아니었다. 더구나 증거로 제출된 편지는 반란의 구체적 행위에 대한 사실을 확인해준 것이 아니라 반란 공모자들의 의도가 담긴 편지에 불과했다. 결국 사실 여부에 대한 확인 없이 혐의만으로 로마인이 로마인을 사형시킨 것이다. 


카이사르가 설계한 가이우스 라비우스 재판의 목적은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의 처벌이 아니다. 키케로에게 로마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그도 원로원도 아님을 경고하고, 로마 시민을 함부로 처형함으로써 존경과 신뢰를 잃었음을 각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카틸리나의 반란은 실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키케로가 들쑤셔 사건을 만들어냈고, 주동자인 카틸리나가 아닌 서신에 쓰여있던 공모자들을 사형함으로써 실재하지 않은 반란을 끝냈다. 마치 자작극처럼. 이는 로마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새겨졌을까.


키케르는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의 재판을 카이사르가 설계했음을 간파했지만, 그 의중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는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이런 짓을 벌이는 거며, 보니파 켈레르는 적대적인 관계가 더 어울릴 법한 카이사르에 왜 협조하는 것일까? 키케르는 자기가 사형을 집행함에 있어 저지른 오류에 대한 경고라는 것은 파악했지만, 그 이면의 목적과 여파가 어느 정도 일지는 예상치 못했다.  


새해가 시작함과 동시에 카이사르는 트리부스회를 소집해 카툴루스의 횡령을 민회에서 최고신관의 자격으로 이슈화한다. 그 다음 트리부스회에서 정치깡패들이 동원되고 카토와 비불리스는 이 폭력 사태를 카이사르의 짓으로 몰아간다. 물론 카이사르와 네포스를 노린 비불리스 패의 자작극이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포룸 로마눔에 운집한 1만 5천여 명의 분노한 군중은 표면적으로 카이사르를 지지했고, 그 이면은 '원로원 최종 결의'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폭력 혐의로 정직됐던 카이사르는 법무관에 복귀했고, 결과적으로 적들 덕분에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었다.  


ㅡ 


키케로가 귀족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석 집정관임에도 그의 말에 전혀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 원로원 의원은 키케로가 의심하는 에트루리아의 반란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로마의 정통성을 자랑하는 귀족(카틸리나)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라기보다 가당치 않다고 여기는 것이겠지만). 이처럼 '로마제국'은 대외적으로는 개방성을 표방하지만, 그 중심인 로마 원로원은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폐쇄적인 조직이었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러한 양면성은 로마제국 곳곳에서 보여진다. 


현 법무관들에 대한 속주 배정 추첨에서 카이사르는 원하는대로 먼 히스파니아를 뽑았다. 집정관급 임페리움이 부여되며 당해 집정관들 외에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신임 총독에게는 로마의 속주를 안전하게 지키고자 국고위원회에서 교부금이 지급되었다. 먼 히스파니아에 지급되는 교부금은 500만 세스테르티우스로 총독에게 한꺼번에 지급하며,그 돈은 즉시 총독의 개인 재산이 되었다. 운도, 신도 여전히 카이사르의 편인 듯 했다.  


카이사르가 최고신관직에 있는 동안 잠잠했던 채권자들이 그가 속주 총독으로 나갈 때가 되자 다시 압박하기 시작했다(카이사르의 어마어마한 빚은 여전한 상태였다). 평상시 서로에게 정치적 호감을 갖고 있던 피소 덕분에 카이사르는 신임 총독 교부금을 채권자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킬 수 있었다(물론 크라수스의 빚보증도 빼놓을 수 없었지만). 사람의 인연은 알 수 없다더니 이 일이 카이사르가 피소의 딸과 결혼하는 계기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카이사르는 채권자들을 피해 아주 조용히 속주로 향했다. 


카이사르는 속주로 떠나기 전 폼페이우스와 잠깐 대면한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로마에서 보니파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알리면서 개선식, 동방 정복지의 로마 시민권, 퇴역병들의 토지 등을 거부할 것이라고 얘기해 둔다. 카이사르는 알고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진정 욕망하는 것과 내면 한켠에 자리한 자격지심이 무엇인지를, 그가 갖고 있는 양가적 감정이 무엇인지를,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먼 히스파니아 속주에는 2개 군단이 주둔해 있었다. 둘다 세르토리우스와의 전쟁이 종결된 후 로마에 돌아오지 않은 노련병들로 구성된 군단이었다. 대부분 삼십대에 들어선 그들은 전투를 목말라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속주에 도착하자마자 보조군 1군단을 모집할 생각이었고, 그들과 함께 로마가 아직 삼분의 이나 정복하지 못한 이베리아 반도의 미개척지로 나아갈 것이다.


로마는 겉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서는 반역자 카틸리나의 부채 탕감 공약을 침묵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많을만큼 경제적 고통을 겪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반역자의 공약이 희망이 되는 로마의 평화는 언제라도 부숴질 수 있는 유리와 같다. 


욕망의 대상이 무엇이든 욕망과 집착은 현명하고 합리적인 인간조차 그 눈을 가린다. 정치에 있어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카이사르와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의 관계를 통해 세상사는 사람이 하는 일이고, 무엇보다 사람을 얻는 것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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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니체가 내 삶을 흔들었다 - 니체와 함께하는 철학 산책
장석주 지음 / 문학세계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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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딪치는 것이 두려워 위악의 가면을 쓰고 삶을 회피했던 스무 살 청년은 니체의 철학을 통해 맞서 싸우는 법을, 순응을 거부하는 법을, 삶을 긍정하고 기쁨을 얻는 법을 배웠다. 이제 노년의 문앞에 선 시인은 니체 철학이 우리 내면의 삶과 의지를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니체를 읽어야 한다고 얘기하며 글을 시작한다.  


책의 1부는 니체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와 니체 철학에 대해 개괄적으로 정리했다. 따라서 책은 당연히 니체 철학을 줄기로 삼고 있고, 특히 시인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 책의 중요한 핵심이기에 가장 많이 인용됐다. 







 
스스로를 다이너마이트라고 선언하는 철학자 니체는 늙고 병들고 낙후되고 쇠잔해진 유럽 문명과 회복될 수 없는 형이상학을 파괴하고 새로운 창조와 생성을 도모하는 것에 앞장선다. 그러기 위해 니체가 한 첫 번째 일은 광인이 되어 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일이었다. '신이 죽었다'는 선언은, 인간이 신을 죽인 사건이다. 이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닌 신이 살해되었음을 의미한다. 신이 되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이 신을 죽인 것이다. 이는 신의 권능과 존재, 진리의 가치에 대한 부정과 닿아 있다.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이 원환을 돌며 끝없이 반복한다.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 궤도 위에 있다. 니체는 생명이 앞선 존재들의 죽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곧 니체의 영원 회귀 철학으로 이어진다. 어리석은 군중이 미몽에서 깨어나려면 번갯불이 필요하고, 번갯불이란 곧 자유정신이다. 자기 초극의 의지,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해서는 자유정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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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천민은 제 욕망에 사로잡혀 순수한 자유 의지를 잃은 채 비루한 욕망에 굴복하고 제 잇속에 따라 움직이는 야비한 자들이다. 노동으로 제 생계를 해결하고, 사회와 결속하며 제 실존의 뿌리를 사회에 내리는 건 중요하다. 노동의 숭고함은 생계 수단을 넘어 삶의 의미를 생산하는 일이다. 따라서 노동은 생명을 살리고 공동체의 생존을 도모해야 할 일이다. 대다수의 우리를 살인적 노동에 내몰리게 하는 자들이 바로 천민이다.  


몸은 정신이나 자아를 담는 그릇이 아니고, 정신의 육화이자 자아의 연장이다. 몸-신체는 힘과 의지의 장소, 도구적 이성이 발현하는 시작점이다. 숱한 질병을 달고 살았던 니체는 '질병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그는 질병을 통해 삶을 바라보고 사유했으며, 그 과정을 통해 질병은 삶의 의지를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사유'로 인도하는 선물을 안겨준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낡아진 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라'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 찰나의 행복, 사랑, 평화, 이를 삶의 꽃으로 피워내는 것이야말로 운명애이며 그게 곧 삶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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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은 대단한 행복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유행이나 어리석음을 피하고, 행복 강박증에 눌리지 않는 것, 그래서 무엇을 더하기보다는 덜어내려 애쓰며 주변인들과의 친밀함과 내재적 가치를 좇는 삶이겠다.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시인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온전한 자기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지 물으며, 자기의 의지로 제 삶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힘든 투쟁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시인이 도시에서 태어난 자에게 고향은 영영 허락되지 않은 사치라고 말하는 데 무척 공감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대답한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서울에 뿌리를 두고 있건만, 나는 선뜻 고향이라는 단어가 와닿지 않는다. 고향 회귀가 장소 이동이 아닌 시간 여행인 까닭에 어렵다는 말 또한 공감이 갔다. 


스스로 자유 의지도, 생의 약동도 가질 수 없다면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 니체는, 인간은 더 가치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지만 결과적으로 동물이 되는 길을 가고 있다고 말했다. 시인은 이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를 소환한다. 잠자의 변신은 육체에 국한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신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실존을 확인할 수 없음을 떠올려본다면 그는 이미 동물과 다름하지 않다. '변신'에 있어서 몸과 정신의 위치를 바꾸어 놓아도 마찬가지다. 


선량함을 가장한 굴종의 노예에서 자유를 찾기 위해 순응을 던져버리고 부정(저항) 정신을 바탕으로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 그 유명한 니체의 낙타ㅡ사자ㅡ어린아이의 이야기를 들어 시인은 성찰의 능력을 함양해 피동적 삶이 아닌 자기다운 삶을 발명하기를 강조한다(이 부분은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말 '복서'도 같은 맥락에 있다). 


ㅡ 


인생을 떳떳하게 하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기 극복과 의지다. 뱀이 허물을 벗듯 누린 것들을 스스로 내려 놓을 수 있는 용기가 그것이다. 어제의 낡은 나를 버리지 못하면 새로운 나는 태어날 수 없고, 새로운 나는 무수한 잉여 속에서 나온다. 건강, 철학, 예술 등이 삶의 잉여다. 그 잉여는 남아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에 대한 인식, 존재를 움직이는 힘, 열린 의지를 통한 도약이다. 시인이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철학의 가난이다. 미약하나마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발견과 자유 의지에의 고양을 원하는 독자에게 일독을 권하고 있다.  


책을 다 읽은 나의 결론은,
가능한 한 불행에서 벗어나고,
가능한 한 굴종에서 빠져나오고,
가능한 한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을 하고,
가능한 한 크게 웃고,
가능한 한 즐거워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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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 뜨인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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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부터 1940년대까지 헤르만 헤세가 쓴 에세이 모음집이다. 
책과 장서, 독서, 글쓰기, 언어, 문학, 예술 등 다방면으로 책과 독서를 사랑하는 진정한 독서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말과 글과 책이 없이는 역사도 없고 인간이라는 개념도 존재할 수 없는만큼 읽기와 쓰기는 보편화되어 있지만, 그 가치를 진정으로 깨닫는 이는 소수에 불과함을 말한다. 또한 날이 갈수록 책이 많아지는 현실에서 진정한 독자라면 책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진정한 책을 붙들고 향유할 수 있어야함을 당부한다.  









 
세상의 그 어떤 누구보다 작가에게 더 많은 일거리를 안겨다주는 이들은 다름 아닌 동료들이라고 말하면서, 보내오는 글에 대한 검토와 평가 그리고 호의적인 서평이나 추천사 등에 대해 언급한다. 이 부분에서 현재 신간이 나올 때마다 'OOO 추천사'라는 수많은 문구가 떠올랐는데 그들도 헤세와 비슷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더라는. 


헤세가 젊은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야말로 뼈 때리는 충고다. 헤세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더 명확히 알아가고 체험의 힘을 고양하고 양심의 날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한은, 문학장착을 계속하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이 충고는 굳이 작가가 아니더라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싶다.  


ㅡ  


헤세가 말하는 비평가들에 대한 서술이 인상적이다. 진지한 자세나 객관적인 관심, 하다못해 정신의 문제에 대한 열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들(헤세는 2류라고 칭한다)의 비평은 애정도 책임감도 없다고 일갈한다. 진정한 비평가란 자기가 구사하는 언어와 친숙하여 오용하는 법이 없이 살아있는 글을 쓴다. 비평가에게 열정이 있다면  자기의 주관성과 개인적인 기질을 억누르지 않고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따라서 비평가는 독자적인 개인으로 서야 하는데, 무능한 비평가들의 결함은 정작 본인도 제대로 못봐 제대로 묘사할 줄 모르고, 자신의 개인적인 직관을 믿지 못해 객관성을 빙자하면서 균형과 중립이라는 가면을 쓴다고 지적한다. 헤세가 무엇보다 경멸하는 것은 문학비평에 있어 정신분석 혹은 심리학을 들이밀어(그에 대한 전문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섣부른 분석을 통해 시사비평을 학문성으로 위장하며 편한 길로 가려 하는 점이다. 인문학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인문학 본래의 방법과 체계를 가지고 추진해야한다고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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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야말로 '독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헤세는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와 사고방식을 접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구하고 그를 친구로 삼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무분별하게 읽어내기보다는 마음에 와닿는 책들, 깨달음과 기쁨을 안겨주는 작품들을 가려 읽으며 찬찬히 모으라고 얘기한다. 이는 친구를 사귀는 이치와 똑같고, 장서에 있어 권수와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하면서. 독서를 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은, 읽는 글에 대한 경의, 이해하고자 하는 인내, 수용하고 경청하는 겸손함이다.  


최대한 많이 읽고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좋은 작품들을 통해 타인들이 생각하고 추구했던 깊고 넓은 세계를 감지하고 인류의 총체와 공명하는 관계를 맺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독서의, 진정한 의미다. 또한 많이 읽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평생 몇 권의 책만 끼고 살아도 진정한 독자로 사는 이들이 있다. 헤세는 수준 높은 독서훈련은 신문이나 유행문학들이 아닌 오직 양서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걸작들의 가치를 검증하기 전에 먼저 우리 스스로가 자격을 갖추어야한다고 얘기한다. 


재독이야말로 책의 진수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두 번을 읽은 책이라면 책값이 만만치 않더라도 반드시 구입하라고 조언한다. 최우수 도서(혹은 작가) 100선 같은 건 세상에 없으며 절대적으로 정확한 비평이란 것도 없다. 다만 독자가 꼭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편견이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헤세는 독자의 세 가지 유형에 대해 얘기하는데, 첫번째는 순진한 독자, 책이 이끄는대로 따라가는 독자다. 두번째는 작가를 추적하는 독자이고, 세번째 유형의 독자는 무엇을 읽든 완전히 자유로운 태도로 대하는데, 이미 온 세계가 내면에 들어와 있어 굳이 독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다. 헤세는 이 유형이 독서의 단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단계를 밟아 세 번째 유형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 이 유형을 유기적으로 오가며 반복하는 게 옳다고 얘기한다. 더불어 소장도서의 정리와 분류 체계를 만들어 유지하고 손보는 것까지 세세하게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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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가 특이 소설의 작가로서 꼽는 이는 애드거 앨런 포다. 그외에는 대체로 인색하게 평가하는데, 스위프트의 작품은 <걸리버 여행기> 외에는 받아들일 만한 작품이 없고 그마저도 본질적이라기보다 영리하게 선택된 가면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쥘 베른(나, 쥘 베른 좋아하는데)과 허버트 조지 웰스는 그저 오락문학 작가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난 그래도 웰스의 '우주전쟁'은 읽어보련다).    


헤세는 창작과 사고가 같은 맥락이며 문학의 과제가 세계관을 기술하는 것이라는 의견은 심각한 오류라고 지적한다. 아무리 위대하다해도 예술창작을 부정하고 멸절시키는 추상적인 사고는 위험하다. 물론 작가가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가질 수 있지만 추상적 인식이 그 핵심이 되는 순간 예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길은 형상으로 나아가며, 신비주의 사유자의 길은 무형으로 귀결되기에 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이루려고 한다면 모순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헤세는 이 이야기 끝에 젊은이들을 향해 조언한다. 개인의 최고 자유는 인류의 한 부분인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여 얽매이지 않는 정신으로 인류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그런 자각이 없는 개인의 자유는 하찮고 사소할 따름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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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는 예술작품에서 진실성과 신의, 정확성과 치밀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대 사회의 빠른 흐름이 대충주의를 용인할 명분이 되지는 않는다. 큰일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사소한 일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당연시하는 태도는 쇠퇴의 시작이다. 그러니 사소한 일, 당장에 맡은 일에 성심을 다하라.   


헤세가 들려주는 얘기를 읽다보니 얼마 전에 읽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가 떠올랐다. 헤세는 나보코프처럼 문학을 예술에 아주 밀접하게 놓고 서술한다. 어쩌면 그는 문학 뿐만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삶 역시 한편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헤세는 이 책에서 재독을 강조한다. 뜻하지 않게 재독을 했는데, 독서 뿐만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깊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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