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반쪽
브릿 베넷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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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 외곽의 작은 마을 맬러드. 백인으로 받아들여질 일은 없으나 니그로로 대우받기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타운이다. 1848년 앨폰스 드퀴어가 물라토와의 결혼을 시작으로 그들은 세대를 이어갈수록 피부색이 옅어졌다. 맬러드 마을 사람들의 목표는 각 세대가 직전 세대보다 더 하얀 피부가 되는 것이다. 맬러드에서는 아무도 피부가 검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고, 타운을 떠나는 사람도 없었다.


데지레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도 아무것도 달라질 것 같지 않은 맬러드 밖의 삶에 대해 늘 환상을 품고 있었고, 그와달리 스텔라는 아주 현실적이었다. 학업에 열중했고, 맬러드고등학교의 교사가 되고 싶었으며 엄마를 두고 맬러드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으로 인해 아델은 열여섯 살 쌍둥이 자매에게 학업 중단을 통보하고 그들의 일자리를 구해놨다. 대학을 갈 계획이었던 스텔라에게는 청천벽력이었고, 언젠가 스텔라를 대학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질 것이 두려웠던 데지레는 오히려 안도했으나 부유한 백인의 집에서의 청소일은 쌍둥이가 맬러드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데지레는 맬러드가 아닌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검은 남자와 결혼했고, 스텔라는 데지레를 남겨두고 소리없이 떠난 후 패싱했다. 그리고 사라졌던 쌍둥이 중 데지레가 14년 만에 블루블랙빛 피부를 가진 딸 주드를 데리고 맬러드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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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68년부터 약 20여 년간의 시간을 오가며 서술한다. 쌍둥이는 어린시절 아버지 리언이 백인에게 폭행을 당하고 총에 맞는 모습을 목격했다. 특별한 잘못도 없이 화풀이 대상이 된 리언은 두 번째 린치를 당할 때 머리에 총 두 방을 맞고 사망했다. 쌍둥이는 인종이 가져오는 사회적 모순과 폭력적 차별을 바로 눈앞에서, 그것도 아버지를 통해 깨닫는다. 아무리 얼굴이 백인과 가까워져도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유색인이라는 것을.  


데지레는 워싱턴에서 까맣지 않은 피부 때문에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했고, 그녀의 딸 주드는 맬러드에서 유난히 까만 피부 때문에 학교폭력을 당했다. 맬러드에서의 짙은 피부색 흑인, 백인 사회에서의 유색인, 백인과 흑인 사회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패싱. 소속된 집단에서 벗어나면 어디에서도 오롯이 자기 자신일 수 없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텔라는 자신을 늘 가둔다. 유색인들이, 백인들이, 그녀가 패싱임을 알아볼까봐.  


나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맬러드에, 딸까지 데리고 제 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데지레보다 유색인 세계에도, 백인의 세계에도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없어 평생을 거짓 가면을 쓰고 살얼음판을 걷듯 살아야했던 스텔라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백인 부유층이 사는 마을에 흑인 유명 배우가 이웃집으로 이사를 온다는 소식에,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봐 두려운지, 아니면 그들을 저지하려는 백인들의 행동이 두려운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을만큼 혼란을 겪는 스텔라의 두려움과 외로움이 안타까웠다.  


어린 시절 백인들에게 모욕과 차별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스텔라가 패싱 이후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위치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을 무의식중에 그대로 따라할 정도로 그녀는 어느새 백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린치를 견디지 못한 이웃 흑인 일가족이 떠나자 데지레를 잃었을 때(비록 본인이 몰래 떠났지만)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백인처럼 행동하고, 백인처럼 사고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그녀는 여전히 외줄을 타고 있는 곡예사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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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빠에게 가정폭력을 당하고 집을 나와 찾아간 곳은 외할머니가 계신 맬러드. 마을 사람들 모두 백인에 가까운 하얀 피부를 갖고 있어 흑인 중에서도 유독 까만 피부를 가진 주드는 별종 중의 별종이다. 아무도 그녀가 데지레의 딸이라는 것을 믿지 못할만큼 그녀는 까맣다. 그렇기에 주드는 맬러드에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다.  


케네디는 자신이 니그로 혈통임을 믿을 수 없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아름다운 엄마가 흑인일리 없다. 종종 롤러코스트를 타듯 감정기복이 심하고 자신의 과거를 꼭꼭 숨겨둔 아름다운 엄마의 신비로운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주드는 경제적 궁핍에도 불구하고 연인과 신뢰와 사랑을 다지며 의과대학에 다니면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나아가고 있다. 케네디는 그녀의 소식을 들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지하층 아파트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남자와 동거하고 대학 학위도 없고 매일 밤 빈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커피를 서빙하고 있는 자신을. 케네디는 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케네디의 일탈과 방황이, 스스로를 감추어야했고 유년 시절과 결혼 이전의 삶에 대해서 함구하는 엄마 탓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주드를 만나 엄마의 정체를 알게 되고, 결혼 이후 엄마의 삶이 거짓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딸인 자신보다 조카라고 할 수 있는 흑인 여성이 자기 엄마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은 케네디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더구나 엄마의 거짓된 삶은 곧 자기의 삶 역시 거짓이라고 여겼을테니 정체성 혼란까지 일었을 터다. 케네디는 늘 새로운 삶을 만들어냈고, 흔들렸다. 따지고 보면 스텔라의 거짓된 삶이 케네디에게는 해롭지 않았다(물론 이런 부분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만). 하얀 피부, 아름다운 금발, 부유한 아버지. 스텔라가 흑인의 삶을 살았다면 케네디가 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황조차 사치로 취급되는 것 역시 엄마인 스텔라의 거짓된 삶 덕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케네디가 더 혼란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서 눈여겨 볼 만은 관계는 흑인 주드와 성전환자 리스, 그리고 데지레와 얼리의 사랑이다. 흑인, 여성, 성소수자, 전과자 등 사회적 약자인 그들의 사랑은 오랜 세월을 지속하며 진실과 신뢰, 그리고 이해와 배려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반면 스텔라는 처음 블레이크와의 만남부터 거짓으로 시작해 늘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고, 진실을 알게 된 딸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 타인에게 악의를 갖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었음에도 스텔라가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거짓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PTSD로 인해 하루도 편하게 잠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자신 역시 아버지처럼 언제라도 벡인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데지레와 스텔라. 두 사람 모두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강요받지만, 아무도 이것을 강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발적 선택, 우리에게 과연 '자발적'인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사족
넬라 라슨의 <패싱>, 마리즈 콩데의 <이반과 이바나...>도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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