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벽지 - 샬럿 퍼킨스 길먼 단편선 에디션F 4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임현정 옮김 / 궁리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제작 <누런 벽지>를 포함한 단편 스무 작품이 수록됐다. 작가 본인이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사회개혁가였던만큼 수록작에는 우리가 부딪쳐왔던 고정관념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다. 작가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그 방식이 역설적이든 비유적이든 상당히 직접적으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휴식을 강요하고 신경과민이라고 강제하는 남편에 의해 정신적으로 파멸하는 여성, 여성의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한발 더 나아가 사교장에서 춤추고, 산책 몇 번 했다고 대뜸 청혼을 받아들여한다고 우기는 남성 등을 시작으로 당시 만연했던 여성 차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천사를 여성에 비유해 천사가 지성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열망하면서 한 종족으로서의 천사가 멸종했음을 말하는가하면, 실질적 가사노동과 양육을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가정의 경제 설계까지 여성이 거의 혼자 전담하면서도 가장의 역할과 경제적 권한은 남성이 독차지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자신의 인생을 찾기 위해 가출한 여성은 무조건 남자와 떠났을 거라는 근거없는 추측과 편견, 가사 노동과 육아로만 하루 일과가 이루어진 여성의 독백을 반어적인 감성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모성애가 본능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곤 하는데, <엄마의 자격>에서는 이를 두고 상당히 모순적이다 못해 어처구니 없는 설전이 벌어진다. 에스더는 마을 세 곳의 천오백 명에 가까운 인명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네 사람들한테 모성애가 없다는, 여성적이지 못하다는, 심지어 제 아이를 지키지 못해 아이가 마을 사람들의 짐이 되었다는, 그래서 그녀는 엄마 자격이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 숭고한 죽음이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상대의 욕구를 인정하며 자유롭게 사는, 무엇보다 가족애를 넘어선 이타심을 가진 에스더 가족은 전혀 상식에 맞지 않는 별난 가족일 뿐이다.  



똑같이 일을 해도 가사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여성의 몫이다. 남편 혹은 연인을 사랑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 이유로 가사 출산 양육이라는 부담을 거의 혼자 감수해야하는 것이 타당한가? 청혼하는 여인의 예술성을 지지하기 위해 결혼 후 요리를 담당하겠다는 남성. 가사 노동을 분담하겠다는 이 남성의 친절함은 당연한 것임에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도 되는지를 자문하는 말다의 혼잣말에 더 씁쓸해진다.   


엘더 씨(엘더 부인의 계획)나 솔로몬 씨(솔로몬 가라사대)처럼 배우자의 말을 곧바로 납득하고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자신의 역량과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여성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누런 벽지>의 '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를 일이고. 이 책에서 <전혀 다른 문제로 바뀔 때>는 영리한 작품이다. 남성들을 앞에 두고 남녀의 입장을 바꿔서 서술하는데, 이 말을 들은 남성들의 우격다짐이 볼만하다. 이와는 다르게 작가는 <다섯 소녀>를 통해 여성들이 지향해야하는 지점을 짚는다. 


스무 편의 소설들을 전반적으로 봤을 때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여성의 경제력이다. 그는 여성에게도 그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돈과 경제활동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동업 관계>에서는 벌어다주는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사업을 하겠다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경제활동은 단순히 돈을 번다는 의미를 넘어 일 자체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또한 부부 서로가 원하는 일을 했을 때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는 비단 돈 뿐만이 아님을 강조한다. 소설에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 스스로조차 인지하지 못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여성들이 많다. 이는 당시 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능력이 사장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인 자립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성의 주체적인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전히 일 하는 여성보다는 전업주부가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고, 가사 노동에 금전적인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며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가사 노동과 육아는 개인이든 사회든 반드시 누군가가 해야 할, 방치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가족구성원이 공평성을 따지며 마지못해 나눠서 해야하는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 활동과 집안 일(가사, 양육, 교육을 포함한)의 균형을 잡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그 균형을 찾아가는 데에 있어서 우리의 고민에 얼마간의 도움을 준다. 다만 소설들이 출간된 시기를 고려할 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고, 확장시켜 사고하는 것은 독자 개인의 몫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 놓인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균형의 노력은 어느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과 국가가 함께 움직여야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ㅡ 


비록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불편했던 점은 등장하는 하녀들마다 모두 흑인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하녀가 노예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 작품들이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 임을 감안할 때 부자연스러운 바는 아니지만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의식차를 좁히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파블스 씨의 마음>은 현대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상황이자 우리가 생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남편은 자기의 욕구를 누르고 가족 부양에 온 힘을 쏟는다. 그런데 정작 아내는 현재 생활에 있어서 남편의 헌신에 대한 감사는 없다. 남편은 아내에게 구태한 여성성을 강요하며 혼자서 죽도록 일하고 중년이 넘어서는 인생무상을 토로한다. 아내는 가정 내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점점 잃어가면서 동시에 여러 면에서 지나치게 남편에게 의탁하는 자신을 자조한다. 결과적으로 길게 봤을 때 상대에 대한 헌신에 대해 감사하지도 않고, 두 사람 모두 만족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가정 생활이 달라져야한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을까.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소설이 맨 마지막에 실려 있어 좋았는데, 마치 앞의 소설들을 정리하는 느낌?이 들었다.  


새삼 멋지게 늙고 싶어졌다. 



사족.
노년에 접어든 여성은 자식에게 의탁하거나 남겨진 유산으로 살아갈 거라는 고정관념을 통쾌하게 깨트려준 모리슨 씨에게 박수를!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기를 마치고, 일단 이토록 길게 드리워진 여운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숱한 감정들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그들은 그 마음들을 어떻게 담고 살았던 건지... . 


소설은 묘지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과 비올레트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커다란 두 개의 사건에 대해 필리프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관점에서 진행한다.  







 
아르덴 지방에서 부모를 모르는 채로 태어난 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문턱에 머물다 온 아이의 이름은 조산사가 급조해 지은 비올레트 트레네. 필리프와 결혼해 얻은 성, 투생. 위탁가정에서 자란 비올레트가 늘 꼿꼿하게 곧은 자세를 유지하는 이유는 부모의 부재 때문이다. 그것이 오히려그녀에게 척추의 지지대 역할을 했다.  


건널목지기였던 투생 부부는 1997년에 건널목이 자동화되면서 직장을 잃었다. 비올레트는 묘지지기가 되기 위해 남편을 설득했다. 비올레트가 숨막힐듯한 건널목지기의 업무를 하는 동안 필리프가 한 일이라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여자와 어울리는 것 뿐이었다. 묘지지기가 된다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 1997년 8월 15일, 투생 부부는 부랑시옹엉살롱 묘지에 도착했다. 비올레트는 비로소 편안해 졌다. 마치 자기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시작한 묘지지기의 일을 20년째 하고 있는 비올레트. 어느날, 어머니가 죽은 뒤 가브리엘 프뤼당이라는 사람의 묘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겨서 그의 묘지를 보러 왔다는 쥘리앵 쇨. 죽은 남편이 묻힌 묘지가 있는데도 버젓이 다른 남자의 묘지 옆에 묻시고 싶다는 어머니의 사연을 들고 온 남자는 추도문 작성을 위해 비올레트에게 도움을 청한다.  


소설은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시작으로 이렌과 가브리엘의 긴 세월동안 이어진 러브 스토리와 비올레트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그동안 감춰졌던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ㅡ 


간혹 리뷰를 쓸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독자가 읽어야만 감흥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에 섣부른 리뷰는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하는데, 이 소설이 그렇다. 도대체 나의 이 얕은 글솜씨로 소설 전체에서 전해지는, 이 짙게 눌러내리는 감정들과 촘촘한 고리들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난감하기만 하다. 


읽는 동안 비올레트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마음에 동화되면서 여러 번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나는 그곳에서 레오닌의 이름을 읽는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미워했던 필리프. 그가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소설 중반까지도 절대 악인처럼 느껴졌던 그 역시 어머니의 과보호로 인해 상처받은, 그래서 내면의 아이는 성장하지 못한 채 몸뚱이만 커버린 사람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중년이 넘어서야 자신이 진정 놓친 게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은 그를 보면서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왜 어리석게도 번번이 기회를 놓아버렸을까.   


이렌과 가브리엘의 사랑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영화가 생각났다. 소설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와 영화 <데미지>. ( 이 소설에서는 영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가 등장한다.) 인생을 물리적으로 함께 영위하지 않았으나 삶이 다할 때까지 서로를 놓지 않았던 두 사람(메디슨카운티의 다리)과 격정적 사랑 이후에 모든 것을 잃고 수 년이 지난 후 우연히 스치듯 지나쳐버린 만남을 통해 회한을 느끼는 남자(데미지). 나처럼 겁이 많은 사람은 상처받는 게 두려워 두 방식의 사랑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데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부부 관계를 지속하는 게 서로에게 괜찮은 건지, 모든 것을 잃어도 좋을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열정을 부러워해야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이 소설의 유쾌한 장점은 이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백작 부인이 있다는 것인데, 그녀는 아주 지극히 현실적이고 솔직하다).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 보이는 쥘리앵과 비올레트의 인연은 이렌에게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늘 얘기하듯 인생에 있어 옳고 그름이 언제나 명확하지는 않고, 인연 또한 장담할 수 없다. 어느날 길에서 우연이 시선이 마주쳤거나, 어깨를 스친 이들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누가 알겠는가. 알고보니 SNS에서 수없이 '좋아요'를 누른 사람일지도)? 


소설 종반에 드러나는 마지막 두 개의 반전. 그들의 아픔에 함께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나도 모르게 손이 저절로 입을 막게 된다). 비올레트는 묘지에서 타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치유받았다. 삶은 지속되기에,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사람을 살게하는 것은 사랑, 그리고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쥘리앵과 나탕, 비올레트처럼.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지노 베이비 - 제2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7.
할머니가 언제부터 할머니였는지 몰라도 할머니는 늘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 조금도 젊지도 늙지도 않은 모습 그대로 거기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석탄이 더 이상 돈이 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하향산업이 된 탄광산업. 탄광이 멈추자 광부들은 지음을 빠져나갔고, 지음은 죽은 도시가 됐다. 공공사업 레저타운 특별법, 즉 지음에 카지노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면서부터 외지인들이 땅을 사려고 지음으로 몰려들었다. 지음의 토박이들은 너도나도 집과 땅을 팔았고, 지음 땅이 외지인들 손아귀에 들어간 뒤에야 법이 만들어졌으며, 그때부터 땅값은 수십 배나 뛰어 원주민들은 가슴을 쳤다. 탄광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기정 사실에도 지음에서는 카지노 특구를 두고 보상금을 노린 찬반 시위가 벌어졌다. 랜드 건설이 확정된 뒤로 광업소는 문을 닫았고, 광부들은 여기저기 공사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광업소가 있던 지장산 중턱에는 카지노와 골프장과 스키장, 호텔과 리조트가 들어섰고, 광부 사택과 포장마차 거리는 슬립시티와 전당포 거리로 바뀌었다. 


이제 탄광촌 지음은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지장산에 위치해 랜드와 카지노가 세워져 있는 웨스트부다스, 지음교회 때문에 이름 붙여진 지장천 인근의 이스트지저스, 그리고 둘 사이에 도박꾼들이 머무는 모텔촌을 이루며 이도저도 아닌 슬립시티가 있다. 








 
소설은 도박산업에 몸을 담아 연명하거나 카지노를 드나들며 좀비처럼 피폐해져가는 인간군상을 열 살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다. 


카지노에서 눈이 맞아 랜드 호텔 방에 살림을 차리고 도박에 정신이 팔려 임신한 줄도 모른 채 출산까지 이어진, 그래서 카지노에서 태어나 카지노에서 살았고 또 다른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아이, 선인인지 악인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염 목사, 현재 누군가는 전당포 사장이고 누군가는 핏 보스며 또 다른 누군가들은 카지노 사업에 기생하며 살고 있지만 과거 광부였거나 혹은 광부의 자식들이었던 사람들, 전국에서 신체 포기각서까지 들고와 도박 좀비가 된 사람들, 이 모든 이들의 탐욕을 악랄하게 이용하며 지음을 지옥 구덩이로 만든 외지인들, 그리고 이 아비규환 속에서 자신의 삶과 가족, 이웃을 지키며 굳건히 살아온 할머니까지. 돈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털려버린 이들이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한 채 유령처럼 부유하는 도시 지음은 다른 의미에서 죽음의 도시가 되어간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탕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삶과 사람을 지키내는 것에 대한 어려움, 그러기에 그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를, 소설은 이야기한다. 화자가 서류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 아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한데, 이 아이가 비로소 존재를 드러내는 세상은 한 세대를 마무리하는 죽음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언뜻 비관적으로 시작되는 듯 보이지만 소설은 내내 담담함을 유지하고, 소설에서 구심적 역할을 했던 이의 죽음 또한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으며 오히려 남은 이들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발판이자 희망으로 떠오른다.   



저마다의 인생에서 사연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꾸준히 살아가야하지 않나. 과거 동영진 여사가 그러했고, 앞으로 이어질 동하늘의 미래처럼. 사흘 만에 구조되어 기적처럼 살아난 동하늘이 지음을 향해 달려가듯 소설은 동하늘과 지음을 생명력이 강한 희망으로 놓는다.  


개인적으로 동하늘의 이야기보다 3부의 할머니 이야기가 마음을 흔들었다. 길게 서술하지 않은 할머니의 유년시절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지음으로 흘러든 사연, 격동하는 세상에 저항해야만했던 젊은 시절, 그리고 동영진 여사의 유쾌한 마지막 행보는 잊혀지지 않을 우리 시대의 어른으로 기억될 듯 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개토태왕 담덕 1 - 순풍과 역풍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른아홉 해의 인생을 불꽃처럼 살았던 담덕. 한국인으로서 광개토태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사실 사료는 많지 않다. '광개토대왕 능비'에 나온 내용 외에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으니 결국 멸망한 나라의 왕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광개토태왕'이라는 다섯 글자에 늘 가슴이 뛴다(어쩌면 억압 당했던 근대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371년, 고국원왕 41년. 소설은 고국원왕 재위 마지막해 봄에서 시작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재위 12년 당시 연나라와의 전쟁, 근초고왕의 왕자 시절과 즉위 과정 등을 간략하게 짚으며 동시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당시의 국제 정세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중원의 시대 상황을 복잡하지 않게 설명하고 있다.  


1권은 대왕 사유가 벼르고 벼르던 수곡성 전투를 중심으로 고구려 태자 구부와 왕자 이련, 야심가 하대용과 하대곤, 숨겨진 왕족 해평, 한순간에 왕자비에 오른 하연화, 연화를 연모하는 추수, 대상을 꿈꾸는 두충과 사기 등 다양한 인물들이 저마다의 욕망을 드러내며 시작한다.  



첫 장을 펼치면서, '고국원왕 41년'을 읽고 1권은 고구마 좀 삼키겠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책장은 막힘없이 넘겨졌다.  


대왕 사유는 백제와의 전쟁에 있어 반대론자들의 수가 만만치 않고, 농사철에 모병으로 인한 민심이 흉흉하다는 사실, 무엇보다 태자 구부가 백제와의 전쟁은 국력 소모일 뿐이라며 전쟁불가론을 주장했음에도 2년전 백제 대왕 구에게 당한 수모를 잊지 못해 끝까지 전쟁을 밀고 나가면서도 자기가 일면 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 한편으로 못내 불편하다. 거기다 한 달 이상 계속되는 가뭄으로 민심은 갈수록 흉흉해졌고, 국상을 비롯한 대신들은 가뭄과 곧 닥쳐올 우기를 이유로 전쟁을 반대하면서 정히 하겠다면 원정을 수확기가 지난 다음으로 미루자고 얘기한다. 그러나 대왕 사유는 요지부동이다. 이렇게 벽창호같은 자가 왕을 하고 있으니... . 전쟁이란 국가적 사안이다. 그런데 왕이라는 자가 앞뒤좌우 따지지 않고 오로지 복수혈전만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안타깝다. 예순 살 늙은 왕의 아집은 독일 뿐이다(이런 면에서 쉰 살이 넘은 백제 대왕 구(근초고왕)는 사유와 아주 다르게 그려진다). 


파계승 석정은 사막의 소소초에 빗대어 고구려가 현 상황에서 우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간언한다. 뿌리를 튼튼히 하고 미래를 대비해 내실을 다지라는 것. 나라의 기틀을 재정비하고, 장유유서와 군신유의를 지키며, 인재 배양과 백성의 풍요를 우선해야 한다. 석정은 사유에게 불교를 통해 백성을 통합하고 국가의 기틀을 굳건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석정은 태사 구부를 만나 불교가 고구려에 정식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백 년 전에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과정과 백성들 사이에서는 널리 펴져 있음을 알린다. 또한 불교의 유래와 불교가 국가에 미칠 영향까지 얘기하면서 사유에게 그랬듯 불교를 통한 단합된 강력한 국가를 세우고 대덕의 군주가 되어야함을 설파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 소수림왕의 치세가 벌써부터 보이는 듯 하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권력자들의 결혼은 단순한 결혼이 아니다. 왕자 이련의 혼사는 연나부 대 계루부, 왕권 대 신권, 그야말로 정치 싸움이었다. 거기다 왕위 탈환을 꿈꾸는 숨겨진 왕족 해평과 그를 추대하고자 하는 하대곤까지 이들의 싸움에 전략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앞으로의 전개가 궁금해지는 인물은 두충과 사기다. 각자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대상이 되겠다는 두 사람 또한 적대적 관계이자 고구려 동부욕살 하대곤과 백제 태자 수에게 각각 적籍을 두고 있으므로 이들 역시 정치판에 엮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파계승 석정. 나는 이 사람의 정체와 의도가 진심 궁금하다. 


사유는 단 한 번도 구를 이기지 못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만도 한데, 심지어 적의 코앞에서 죽음에 이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역사상 왕으로서 가장 참담한 죽음이 예견된 평양성 전투를 목전에 두고 1권을 마무리 한다. 역사란 어느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 기분이나 느낌이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사족.
1. 고구려의 전렵, 천제 의식, 형사취수제의 폐해, 동맹제 등도 사이사이 서술하는데, 이러한 관습이나 문화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다.
2. 백제 태자 수는 전술면에서 탁월한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2. 무술, 무예, 무도의 차이를 이제야 알았다는.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거로의 여행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차역에서 만난 두 남녀. 시작부터 이 남자, 참 애틋하기도 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과하지 않은 절제된 애절함. 하이델베르크로 향하는 만원 급행열차 안에서도 그들만의 공간에 있는 두 사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 헤어져야만 했던 그들은 10년 만에 재회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던 불가피한 사정으로 그들은 서로를 잊었다고 여겼다. 아니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장막이 거두어진 순간, 남자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ㅡ 


호텔에서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난 부인으로 인해 투숙객들 사이에서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달아난 부인의 행실을 두고 천박하고 비도덕적이라며 비난할 때, 유일하게 그녀의 입장이 되어 얘기하는 화자는 마지못해 결혼 생활에 이끌리기 보다는 열정적으로 본능에 충실한 여자가 더 정직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거센 논쟁이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지기 직전, 노년에 이른 영국인 C부인이 나서서 이 문제를 중재한다. 화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얼마 후, 그녀는 화자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다. 



■ ■ ■



두 편의 중편소설을 담은 이 책은 과거 한 때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남자와 짧지만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을 가슴에 묻어 둔 여인의 이야기다.  


[과거로의 여행]은 유부녀를 사랑하게 된 한 청년이 긴 세월 동안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재회하고, 그 간절한 마음이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는 확신으로 밀회를 떠나지만 불결한 호텔방에서 순간적으로 과거는 그저 과거에 불과할 뿐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루드비히는 왜 그토록 그녀에게 집착할까? 유년시절부터 가난으로 인한 결핍과 굴욕감을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성인이 되어서도 벗어버리지 그에게 그녀의 따뜻하고 섬세한 배려와 진솔한 다정함은, 어쩌면 살면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편견없이 받아들였던 호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드비히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자기편을 들어줄 절대적 사랑에 대한 갈망이 느껴진다. 박제된 지난 과거가 현재에도 변함없을 거라고 여겼던 한 남자의 어리석음이여.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부족함 없이 유복한 삶을 살다가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빈둥지증후군으로 인한 심한 상실감과 우울증을 겪고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카지노에서 돈을 탕진한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되고, 소설은 그녀의 내밀한 심리를 따라간다. 여인은 그 청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건 아닐까? 상실감과 존재감의 혼란에 시달리며 삶을 포기한 채 권태와 외로움에 빠진 현실을 헤쳐나오지 못해 허우적대는 자신이, 욕망과 탐욕으로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져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젊은이의 모습과 닿아있다고 느껴 그를 구원해주고자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자신의 역할을 찾아 스스로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나,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설령 도박중독자 청년을 구원해 돌려보낸다고한들, 그가 떠난 빈 자리는 또 어떻게 채우겠는가. 그녀에게 있어서 이 고백은 흐릿하게 남아있던 마지막 한 줌의 회한이 아니었을까.  



ㅡ 



어떤 악의 없는 외도나 신분 혹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것(그것도 첫눈에)을 두고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작가는 이에 대해 사법기관은 보편적인 윤리와 관습에 따라 판결을 내리겠지만, 개인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얘기한다. 소설 속 화자의 주장처럼 정숙한 아내였던 앙리에트와 청년과 눈이 맞아 달아난 앙리에트 사이에는 인간 자체로서의 차이는 없다. 그들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 달라졌을 뿐. 사실 도덕성에 대한 잣대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도덕과 윤리는 시대에 따라 번하고, 또한 그에 있어 절대성을 강요할 순 없지 않나.  


아무튼, 아직 겪지 않은 미래의 내 마음을 장담하지 않는다면 쉽게 남을 비난하지 못할 터다.
또 아무튼, 문장과 분위기가 상당히 매력적인 소설들이다. 




74.
더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향해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지는 그림자,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그녀와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발아래 드리워진 저 검은 유령처럼 그들은 헛된 노력에 힘을 탕진하며, 달아나고 멈추는 유희를 계속한 것은 아니었을까?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