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의 여행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빛소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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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에서 만난 두 남녀. 시작부터 이 남자, 참 애틋하기도 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과하지 않은 절제된 애절함. 하이델베르크로 향하는 만원 급행열차 안에서도 그들만의 공간에 있는 두 사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 헤어져야만 했던 그들은 10년 만에 재회했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던 불가피한 사정으로 그들은 서로를 잊었다고 여겼다. 아니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장막이 거두어진 순간, 남자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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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난 부인으로 인해 투숙객들 사이에서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달아난 부인의 행실을 두고 천박하고 비도덕적이라며 비난할 때, 유일하게 그녀의 입장이 되어 얘기하는 화자는 마지못해 결혼 생활에 이끌리기 보다는 열정적으로 본능에 충실한 여자가 더 정직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거센 논쟁이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지기 직전, 노년에 이른 영국인 C부인이 나서서 이 문제를 중재한다. 화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얼마 후, 그녀는 화자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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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중편소설을 담은 이 책은 과거 한 때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남자와 짧지만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을 가슴에 묻어 둔 여인의 이야기다.  


[과거로의 여행]은 유부녀를 사랑하게 된 한 청년이 긴 세월 동안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재회하고, 그 간절한 마음이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는 확신으로 밀회를 떠나지만 불결한 호텔방에서 순간적으로 과거는 그저 과거에 불과할 뿐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루드비히는 왜 그토록 그녀에게 집착할까? 유년시절부터 가난으로 인한 결핍과 굴욕감을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성인이 되어서도 벗어버리지 그에게 그녀의 따뜻하고 섬세한 배려와 진솔한 다정함은, 어쩌면 살면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편견없이 받아들였던 호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드비히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자기편을 들어줄 절대적 사랑에 대한 갈망이 느껴진다. 박제된 지난 과거가 현재에도 변함없을 거라고 여겼던 한 남자의 어리석음이여.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부족함 없이 유복한 삶을 살다가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빈둥지증후군으로 인한 심한 상실감과 우울증을 겪고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은 카지노에서 돈을 탕진한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되고, 소설은 그녀의 내밀한 심리를 따라간다. 여인은 그 청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건 아닐까? 상실감과 존재감의 혼란에 시달리며 삶을 포기한 채 권태와 외로움에 빠진 현실을 헤쳐나오지 못해 허우적대는 자신이, 욕망과 탐욕으로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져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젊은이의 모습과 닿아있다고 느껴 그를 구원해주고자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자신의 역할을 찾아 스스로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나,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설령 도박중독자 청년을 구원해 돌려보낸다고한들, 그가 떠난 빈 자리는 또 어떻게 채우겠는가. 그녀에게 있어서 이 고백은 흐릿하게 남아있던 마지막 한 줌의 회한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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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악의 없는 외도나 신분 혹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것(그것도 첫눈에)을 두고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작가는 이에 대해 사법기관은 보편적인 윤리와 관습에 따라 판결을 내리겠지만, 개인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얘기한다. 소설 속 화자의 주장처럼 정숙한 아내였던 앙리에트와 청년과 눈이 맞아 달아난 앙리에트 사이에는 인간 자체로서의 차이는 없다. 그들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 달라졌을 뿐. 사실 도덕성에 대한 잣대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도덕과 윤리는 시대에 따라 번하고, 또한 그에 있어 절대성을 강요할 순 없지 않나.  


아무튼, 아직 겪지 않은 미래의 내 마음을 장담하지 않는다면 쉽게 남을 비난하지 못할 터다.
또 아무튼, 문장과 분위기가 상당히 매력적인 소설들이다. 




74.
더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향해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지는 그림자,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그녀와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발아래 드리워진 저 검은 유령처럼 그들은 헛된 노력에 힘을 탕진하며, 달아나고 멈추는 유희를 계속한 것은 아니었을까?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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