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의 나라 - 문화의 경계에 놓인 한 아이에 관한 기록
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반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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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부부는 1975년 라오스가 공산 세력에 완전히 장악되면서 살던 땅을 떠나게 된 15만 몽족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태국의 난민 캠프를 시작으로 하와이, 미국 포틀랜드를 거쳐 캘리포니아 머세드에 정착했다. 이들의 열네 번째 아이 리아는 1982년 7월 19일에 머세드에서 태어났다.  








 
이 책은 생후 3개월에 뇌전증이 발병해 문화의 경계에서 치료의 방향을 잃고 고통받았던 리아 리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 난민, 의료, 복지 등 사회 시스템 전반과 강대국이 관여한 전쟁의 폐해를 다루고 있다.  


일단 작가가 몽족에 대한 생활방식, 문화와 관습, 무속신앙, 역사, 그리고 미국 정착기 등을 설명해 낯설은 몽족에 대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사실 난민 문제 해결에 있어서 그들의 전통과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를 간과하지 않은 저자의 배려가 좋았다(책을 끝까지 읽으면 배려 이상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몽족이 난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국제 정세의 배경 설명까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넓은 시야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책의 전반부에서 몽족을 표현하는 문장 중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조국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노예가 되어 본 적도 없다', '몽족은 문자와 종교라는 구심력도 없고 생김새도 상당히 다양하다는 점에서 더욱 대단하다'. 뒤의 문장은 호주의 인류학자 게디스가 자신의 저작에서 쓴 내용인데, 몽족이 이민족들에게 둘러싸야 방대한 지역으로 흩어졌음에도 오랫동안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쓴 글이다. 


참고로, 1980년대 당시 미국 군립병원은 20년 내내 고질적인 재정적인 문제에 시달렸다. 환자 중에 민간보험을 든 사람은 20퍼센트에 불과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연방정부의 공공 의료보험 보조를 받았으며 일부는 그조차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1970년대 말부터 동남아 난민들이 머세드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하면서 전체 인구 6만여 명 중 몽족 인구가 1만 2천 명이 넘는다. 머세드 시민 다섯 중 하나가 몽족이란 뜻이다. 몽족 환자들은 다른 극빈층 환자들보다 훨씬 비용이 많이 든다. 워낙 수가 많으며 대체로 많은 관심과 시간을 요하고, 병원에서 환자아 의사소통을 위해 양쪽 언어를 다 구사하는 직원을 채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ㅡ 


생후 3개월에 첫 발작을 일으켜 머세드 군립병원  MCMC 응급실에 간 것을 시작으로 리아는 지속적으로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 열일곱 번을 입원하고, 백 번도 넘게 이 병원의 응급실 문턱을 드나들었지만 매번 의료진과 리 부부는 서로 다른 의견과 언어 장벽으로 인해 충돌한다. 리아가 병원을 드나들었던 상황들을 살펴보면 뇌전증 발작 뿐만 아니라 호흡 정지, 폐렴 등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를 벌이는 과정이 잦은데, 이때마다 병원을 불신하면서도 딸을 그들의 손에 맡겨야하는 리 부부의 불안과 두려움이 어땠을지 짐작이 된다(거기다 딸의 몸에 주렁주렁 달린 기구들은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그러나 의료진 입장에서는 응급실로 달려온 리아를 안정시켜 놓으면 고맙다는 말은 커녕 원망 섞인 눈초리와 비협조적인 태도에 낙담하게 된다. 더구나 수 백 시간 치료를 지속하면서도 리 부부는 단 한 번도 치료비를 지불한 적이 없으면서 이에 대한 고마움도 표시한 적이 없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태에서 불신과 부정적인 감정이 쌓여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고 만다. 그런데 언어장벽과 몽족의 전통적인 관습이 맞물려 치료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사례는 리아의 경우 뿐만이 아니다. 



작가는 몽족의 사례처럼 단순히 언어장벽으로 인한 소통의 부재에서만 문제점을 찾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의료관, 그리고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시각의 차이를 언급한다. 과학적인 의료 체계 하에서 효율성과 편리함, 신속함을 우선으로 두는 시스템은 그들만의 신앙과 관습을 기다려줄 여력이 없다. 여기에서 오는 사소한 오해와 충돌은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리아의 주치의 닐이 리 부부를 신고한 이유는 어떤 나쁜 의도와 오해 없이 오로지 자신이 처방한 약이 리아에게 제대로 복용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다만 리아가 부모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리아가 낫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 그들이라는 사실을 염두하지 않았을 뿐이다. 


닐이 리 부부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계기는 그의 아들이 백혈병에 걸렸을 때다. 리 부부가 리아를 방치한 게 아닌 그들의 방식대로 아이를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긴 시간 동안 리아를 지켜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는 리 부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닐 역시 의사로서 그가 리아에게 최선의 방법을 찾고자 했음을 비로소 늦게나마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 소통이 진즉에 이루어졌다면 리아의 치료 방향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지. 


그렇다면 의료진이 몽족의 관습을 고려해 리아에게 다른 아이가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처치를 받지 못하게 되더라도 리아의 가족이 따르기 좋은 방식으로 치료를 단순화해야 했을까? 리아 문제는 리 부부의 말처럼 과도한 투약이었다. 물론 선천적 뇌전증을 앓는 리아가 리오스에서 계속 살았다면 리 부부의 예상과는 다르게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작가의 말처럼 미국 의학은 리아를 살렸지만 한편으로 위태롭게 만들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고, 관점에 따라 차별적인 행동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선택에 있어서 우선해야할 전제는 무엇일까? 



작가는 리아의 삶이 망가진 건 패혈성 쇼크나 부모의 불이행 때문이 아니라 타문화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이는 비단 의료 현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언어 장벽, 의사소통 부재, 그로인한 보이지 않는 박탈된 자유, 경제적 의존, 종교와 인종주의에 의한 차별과 편견 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난민 문제들이다. 그런데 난민 안에서도 몽족처럼 소수자에 해당하는 민족들은 그 안에서조차 더욱 외면당한다.  

전쟁, 기후 변화 등 굳이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민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난민 수용의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대안을 찾는 게 훨씬 현실적인 해결 방법이 아닐까. '동화'가 아닌 '조화'를 바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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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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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무책임하고 미성숙하고 변덕스러운 더러운 년. 그러나 그들이 진짜 단어를 찾을 수 있을까? 자신들의 인생에서 갖지 못했기에 단어 목록에 없는 유일한 언어. 자유라는 단어를. 
 







 
상앗빛 누런 이빨, 미모사 같은 노란 눈, 풍성한 검은 털에 노란 별빛의 반점이 있는 진짜 늑대와 첫사랑에 빠진 뤼시. 늑대는 그녀가 두 살 때 서커스단에 들어와 여덟 살 때 죽었다. 그들은 뤼시의 잠옷으로 감싼 늑대를 아를 근처의 황무지에 묻어주었다. 소녀는 늑대와 교감하며 가졌던 순수했던 영혼을 간직한 채 생명력과 활력이 넘치는 부모, 때로는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어릿광대, 곡예사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한다. 뤼시의 가출 아닌 가출은 늑대가 죽은 후 시작됐다. 


여덟 살부터 열 살까지, 여섯 번의 가출을 실행한 뤼시를, 서커스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어머니는 딸을 이해하는 웃음으로 그녀를 찾아 데려온다. 그렇게 탕아는 늘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뤼시의 어머니가 매번 딸을 찾아 데려오면서 호탕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건, 딸의 가출이 처한 현재에 대한 불만과 반항이 아닌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 아주 흡사한 영혼을 가진 딸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녀 뤼시는 사람들이 자신을 더는 사랑하지 않을까 봐 두렵다면서도, 그에 대해서라면 안심이 된다고 말한다. 왜인지 모르지만 마음이 놓인다고. 마치 늘 사랑받았고, 자기 자신에게 안도했던 어머니처럼. 언제든 자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이런 면에서 뤼시가 스스로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직감을 통한 자신의 선택을 '수호천사'라고 지칭하며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삶이 자신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낙천적인 부분이야말로 아무도 해칠 수 없는, 그녀가 가진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ㅡ 


어머니와는 다른 아버지의 완벽주의 성향을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라고 말하는데, 생각해보면 '완벽'이라는 게 존재할리 없으니 모든 것을 더 더 잘해내야한다는 강박은 결국 본인과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만 할 뿐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어쩌면 이같은 아버지의 완벽주의 탓에 뤼시가 더욱 자유로운 삶을 갈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부부 중 모두 정상인 경우가 없다는 얘기를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읽다가 빵 터지고 말았다. 둘다 비정상이거나 둘 중의 하나만 정상이라는 건데, 뤼시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기 부모님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로망 부모님의 경우에는 둘 다 해당될 터다. 루쉬와 로망 중에서는 누가? 이쯤되면 대부분의 부부가 서로가 정상이라고 우길테지만, 본인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리라.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뤼시의 어머니가 열일곱 살 딸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의 반응이었다. 딸의 가출을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긍정했던 어머니는, 결혼은 서로에게 창살과 열쇠가 없는 감방이 될 수 있으니 신중하라고 조언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른 나이에 치르는 결혼을 두고 자기 마음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알고 있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딸을 칭찬하면서 자신들이 잘 키웠다고 얘기한다. 과연 일방적인 통보만 한 열일곱 살 딸의 결혼에 이런 조언과 덕담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가 얼마나 될까.  



뤼시는 생애 초기에 방랑자 생활을 통해 끝없는 볼거리를 제공받았고 그로인해 세상을 다각도에서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됐다. 그럼으로써 세상은 부와 빈으로 구분되어진 것이 아닌 오로지 부자 중심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적 규범이 '정상성'을 기준으로 인간의 자유를 얼마나 억압하는지 이른 나이에 알게 됐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공중그네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잔인한 행위로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폭력적인 어릿광대의 공연처럼 세상은 누군가의 고통을 지지대 삼아 존속한다. 욕구를 억누르고 세상의 기준에 맞춰서 살라고, 매일매일이 오늘이건만 당장의 기쁨보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라고, 사랑보다는 사회적 성공을 더 우선하라고, 그렇다면 만족할만한 내일은 언제쯤 오는건지.  


7년의 결혼생활 중에 스무 번 시도한 뤼시의 탈선은 네 번 이루어졌다. 그것은 결혼생활의 권태에서 오는 즉흥적인 이탈이라기보다 뤼시의 떠도는 영혼이 쉼을 찾는 방법이었을 터다. 뤼시는 이혼을 결심한 로망에게 다시 찾아가지 않은 자신의 마음이 무정이 아닌 가벼운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생애 첫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말하는 알방에게 가벼워진 마음을 발견하고 그에게서도 떠난다. 소설의 마지막, 뤼시의 행보는 역시나 독사의 예상을 뛰어 넘는다. 



마리즈 농샬롱 아주머니의 할머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누구한테서도 즐거움을 빼앗기지 말라고. 뤼시는 자신의 직감과 욕구, 그리고 영혼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데에 서슴치 않았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삶의 본질에 대해 물으며, 자신이 품은 질문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 응시한다.  


여러 면에서 성공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현재에 뤼시의 삶은 즉흥적이고 허황되다고 말하는 이도 있겠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하루하루 쏟아붓는 노력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안정을 보장받는 가정,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일자리, 기다리고 있는 사랑. 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오롯이 자신이 선택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뤼시의 삶이 대중의 눈에 어떻게 보여지든 간에 나는 그녀가 부럽다.   


작가는 소설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라고 했는데, 가슴 속에 그토록 헌신적인 사랑을 품고 사는 이가 이런 글을 썼다는 사실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어쩌면 그 사랑조차 자신을 위해서라고 말할 것은 사람이다.  



사족
인간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 거리두기의 기술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 거리두기에 사랑도 예외는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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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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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기차역 대합실. 기차는 여섯 시간 째 연착 중이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 흥정 중인 매춘부와 군인, 스며드는 찬바람을 막아보기 위해 목깃과 스카프를 올리며 서로의 몸에 기대고 있는 사람들. 화자는 무관심과 체념으로 뒤엉켜 있는 이들을 지켜보다 앉을 의자를 찾기 위해 대합실을 가로질로 복도 끝에 있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가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울고 있는 한 남자를 본다.  


모스크바행 기차가 도착했다. 화자가 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기차는 이미 만원이다. 어쩌면 이 도시에서 하루를 더 보내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맨 끝의 삼등칸 차량에서 그 남자가 팔을 흔들어대며 그를 부른다. 덕분에 화자는 그날 열차에 탑승했다. 그 노인,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알렉세이 베르그. 
 
소비에트 연방, 고발이 난무하는 공포정치 시대. 수용소행을 피하기 위해 도망쳤던 스물두 살의 알렉세이는 의도치 않게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을 살게 된다. 열차 안에서 노인이 들려준 그의 이야기.


ㅡ 


알렉세이가 이모네 집에서 은신했을 당시, 술에 취해 울타리 밑에서 골아떨어진 남자를 발견하고 격렬한 질투심을 느낀다. 남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고, 일시적인 죽음 속에 완전히 방치된 채 스스로에 대해 온전히 망각할 수 있는 자유. 알렉세이는 도망자 신세가 된 자신의 처지를 끊임없이 자각해야 하는 현실에 좌절해을 터다. 또한 알렉세이 베르그로 살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같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야말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생명력이 없는 죽은 삶을 살아야함에 느꼈을 무력감이 어땠을지 알 것 같다. 


모순과 부조리의 세상. 죽음을 피해 뛰어든 세상이 오히려 죽음에 더 가까운 선택이 되어버렸다. 미래를 기약할 수도, 타인과 과거를 추억할 수도 없는 알렉세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끝이 예정된 누군가와 체온을 나누는 것 뿐이다. 그것이 사랑은 아닐지언정 평화와 휴식을 나눌 수 있다면야.  


열일곱 살 스텔라는 알렉세이에게 그의 삶과 전쟁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한다. 그런데 알렉세이는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알렉세이 베르그에 대해 얘기해야 할까, 세르게이 말체프에 대해 얘기해야 할까. 연주회를 이틀 남기고 도망쳤던 젊은이는 어느새 피웅덩이에서 뒹구는 사람이 됐다. 과거에서 추방당했고, 이제 또 다시 현재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놓인 스스로를 무어라 표현해야하나.  


마침내 피아노 앞에서 다시 알렉세이 베르그로 돌아온 남자. 그 대가는 지난한 10년의 세월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감기몸살로 인해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지독한 근육통에 시달렸었다. 알렉세이가 살면서 느꼈을 통증이 이런 게 아니였을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만 스스로를 놓아버려 내가 나로 살 수 없는 인생. 그리하여 내내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달고 살진 않았을지.  


시적이고 서정적인 문체 때문에 이 소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소리없이 처절한 느낌이다. 수용소로부터 달아나고자 했으나 그에게 있어 세상은 울타리 없는 수용소였기에, 그럼에도 절망을 무덤덤하게 얘기해서, 마지막의 무표정한 알렉세이의 무표정 때문에, 더 그렇다.  


그의 가슴에 지나갔을 찬바람이 나에게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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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오너러블 스쿨보이 1~2 - 전2권 카를라 3부작 2
존 르 카레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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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인내심 끝에 조지 스마일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끝내고 든 생각이었다.
오직 카를라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주변의 재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추적을 이어간 결말은 사실 허탈하다.  


소비에트가 홍콩 암흑가를 통한 돈세탁한 사실은 밝혀냈지만, 정작 스마일리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고, 오히려 아끼는 제리를 잃었으며 '사촌'에게만 득이 된 셈이다. 카를라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한 채 아내 앤에 대한 회한만 깊어졌다.  


읽다보면 스마일리의 고독한 싸움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필립 말로가 훨씬 낭만적이고, 이에 비하면 스마일리는 냉정하지만 비정함 뒤에 숨겨진 타인에 대한 애틋한 정서는 닮은 구석이 있다. 읽기를 마친 후 여운이 남는 것도 그렇고.  


아무튼 이 작전은 서구 입장에서는 절반의 성공이겠지만, 스마일리에게 있어서는 실패에 가까운 작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마일리가 작전에서 예상치 못했던 복병은, 사랑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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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미술관 -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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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성, 인종, 장애, 성소수자 등 차별과 혐오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들이 미술계에서 어떻게 소비되어 왔으며, 도외시 되었는지 얘기한다. 







소수자 차별, 대리모, 성 착취, 월경 혐오, 가부장제, 모성 이데올로기, 여성 노동, 가사노동 폄하, 아동 착취 및 비하, 노인 혐오, 기득권층의 허위, 소수민족 박해, 도시 개발과 빈민자, 시민 통제와 감시, 광기에 가까운 투기, 동물권, 환경 오염,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포장되는 문화 후원 등을 예술 작품과 더불어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변이된 형태로, 본질적으로는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우리 사회의 시선과 시스템을 짚어내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시작으로 대중이 익히 알고 있는 마네의 <올랭피아>, 무리요의 <포도와 멜론을 먹는 소년들>, 아르천의 <푸줏간>, 마네의 <아르장퇴유>, 드가의 <기다림>, 잭슨 폴록의 작품 외에도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작품들 안에서 당시 시대를 읽어볼 수 있다. 이 책이 재미있는 점은 그림 속에서 스쳐지나갈 인물들의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책에 실린 내용들 중 일부는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나 현재를 사는 대부분의 우리가 고민해야 할 명제들이기에 흘려 읽히지 않았다. 특히 지금은 사라진 '어글리 법'에서 언급된 안토니에타, 파스트라나의 사연은 다시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죽음 이후 철저히 배제된 이유를 생각해보면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유리 천장과 유리 절벽으로 대변되는, 소수자의 입장에 서 있는 여성의 위치를 새삼 느낀다. 그리고 자궁 혐오가 호르몬이라는 과학 용어로 포장되어 지금도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몰아감과 동시에 여성의 신체 자체가 차별의 근거로 쓰이고 있는 현실도 지적한다.    


노동에 있어 19세기 이전까지는 다방면에서 여성과 남성은 함께 일하는 동료였으나, 산업화 및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여성에게는 '노동력 재생산'의 역할이 맡겨졌다. 이러한 방식은 무보수 노동을 여성에게 전가함으로써 자본가의 추가 이윤을 창출하게 된다. 자본주의가 '전업주부'를 권하는 이유는 체제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여성의 가사와 돌봄의 무상 노동이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여성 노동이 더 이상 '잉여'가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인류가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 않을 폄하된 '그림자 노동'은 어떻게 해결할 셈인가. 가사 노동에 대한 사례 중 19세기 해나 컬윅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녀의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명한(?) 판단에 박수를 쳤다. 그깟 변호사 아내의 지위(!)가 뭐라고.


성소수자로서 미켈란젤로의 커버링과 릴리 엘베의 커밍아웃을 통해서 본 '정상성'의 기준, '동물권'이라는 용어 자체가 인간이 지구의 주인임을 드러내는 오만함,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만들어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기후 위기, 겉으로는 선진 도시 구축이라는 모양새를 띠고 있으나 기득권층의 잇속대로 짜여져 투기를 조장하는 것은 물론이요 도시 빈민층을 양산해내며 심지어 시민을 통제하는 용도까지 감안한 도시 개발, 예술을 선의의 가면으로 이용하는 자본가들의 속내와 이로인해 한때는 정치적 권력에 의해, 현재는 돈의 권력에 휘둘리는 예술계 등 만연한 사회의 문제들을 하나둘씩 돌이켜 볼 수 있다. 서너쪽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기후 위기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작가의 의견에 공감하며 이에 동의한다. 


​책의 목적 자체가 사회 비평서가 아닌만큼 사회 문제에 대한 대안이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함없이 순환되는 우리 시대를 미술 작품 안에서 혹은 작가와 작품의 뒤에 숨은 사연을 통해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에세이다. 다만 숙고해야할 것은 이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대중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던 작품들을, 과연 우리는 '공정'과 '동등'이라는 시선으로 보았는지의 여부다. 우리는 혹시 몇 도쯤 기울어진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정상'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봐야할 터다.




사족
가방에 넣어 다니가 부담없는 책 사이즈가 마음에 든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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