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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겨울 기차역 대합실. 기차는 여섯 시간 째 연착 중이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 흥정 중인 매춘부와 군인, 스며드는 찬바람을 막아보기 위해 목깃과 스카프를 올리며 서로의 몸에 기대고 있는 사람들. 화자는 무관심과 체념으로 뒤엉켜 있는 이들을 지켜보다 앉을 의자를 찾기 위해 대합실을 가로질로 복도 끝에 있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가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울고 있는 한 남자를 본다.
모스크바행 기차가 도착했다. 화자가 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기차는 이미 만원이다. 어쩌면 이 도시에서 하루를 더 보내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맨 끝의 삼등칸 차량에서 그 남자가 팔을 흔들어대며 그를 부른다. 덕분에 화자는 그날 열차에 탑승했다. 그 노인,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알렉세이 베르그.
소비에트 연방, 고발이 난무하는 공포정치 시대. 수용소행을 피하기 위해 도망쳤던 스물두 살의 알렉세이는 의도치 않게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을 살게 된다. 열차 안에서 노인이 들려준 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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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가 이모네 집에서 은신했을 당시, 술에 취해 울타리 밑에서 골아떨어진 남자를 발견하고 격렬한 질투심을 느낀다. 남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고, 일시적인 죽음 속에 완전히 방치된 채 스스로에 대해 온전히 망각할 수 있는 자유. 알렉세이는 도망자 신세가 된 자신의 처지를 끊임없이 자각해야 하는 현실에 좌절해을 터다. 또한 알렉세이 베르그로 살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같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야말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생명력이 없는 죽은 삶을 살아야함에 느꼈을 무력감이 어땠을지 알 것 같다.
모순과 부조리의 세상. 죽음을 피해 뛰어든 세상이 오히려 죽음에 더 가까운 선택이 되어버렸다. 미래를 기약할 수도, 타인과 과거를 추억할 수도 없는 알렉세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끝이 예정된 누군가와 체온을 나누는 것 뿐이다. 그것이 사랑은 아닐지언정 평화와 휴식을 나눌 수 있다면야.
열일곱 살 스텔라는 알렉세이에게 그의 삶과 전쟁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한다. 그런데 알렉세이는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알렉세이 베르그에 대해 얘기해야 할까, 세르게이 말체프에 대해 얘기해야 할까. 연주회를 이틀 남기고 도망쳤던 젊은이는 어느새 피웅덩이에서 뒹구는 사람이 됐다. 과거에서 추방당했고, 이제 또 다시 현재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놓인 스스로를 무어라 표현해야하나.
마침내 피아노 앞에서 다시 알렉세이 베르그로 돌아온 남자. 그 대가는 지난한 10년의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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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감기몸살로 인해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지독한 근육통에 시달렸었다. 알렉세이가 살면서 느꼈을 통증이 이런 게 아니였을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만 스스로를 놓아버려 내가 나로 살 수 없는 인생. 그리하여 내내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달고 살진 않았을지.
시적이고 서정적인 문체 때문에 이 소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소리없이 처절한 느낌이다. 수용소로부터 달아나고자 했으나 그에게 있어 세상은 울타리 없는 수용소였기에, 그럼에도 절망을 무덤덤하게 얘기해서, 마지막의 무표정한 알렉세이의 무표정 때문에, 더 그렇다.
그의 가슴에 지나갔을 찬바람이 나에게도 전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