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 담덕 3 - 여명의 기운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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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은 377년 고구려와 백제의 평양성 전투를 시작으로 하대관과 해평의 반란까지(384년)를 다룬다.  








 
부소갑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고구려와 백제를 보면서 먼저 떠오른 건, 부소갑에서 인삼 농사를 짓고 있는 백성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부소갑이 노른자위같은 땅이라는 사실은 부소갑의 농민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된 셈이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들일텐데 기실, 누가 왕이 된다한들 그들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전쟁은 이기든 지든 큰 피해를 남긴다. 2차 평양성 전투가 대왕 구부에게는 한풀이 복수극을 성공적으로 마친 셈이지만, 남편과 젊은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고 흉년에 군량미까지 바쳐야했던 백성들의 핍박한 삶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떤 보상과 위로가 가능할까. 승전을 했으나 전쟁보다 더 지독한 가난과 기아가 기다리고 있는 백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도적질 뿐인데.    


을두미는, 신화는 인간의 마음을 그린 지형도와 같은 것이고,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야기하거나 그림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또한 신화란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민족 정신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것일텐데, 우리는 현재, 우리 모두를 이롭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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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년 동진과 전진의 비수전투. 이 전투의 결과로 선비족 출신 모용수가 후연을 세워 비상한다. 모용선비가 후연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로 칭하며 세력을 키운다는 것은 곧 고구려 서북 국경을 노린다는 것을, 그리고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두고 후연과 전쟁을 벌여야할 위기에 처해 있음을 의미했다.  


고구려는 평야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5년 동안 흉년을 겪었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오래도록 곤궁한 생활에 시달려 왔다. 백제 역시 지진이 발생한 데다 대기근이 겹쳐 고구려를 공격할 엄두도 못 내고 있고, 신라는 오래전부터 고구려에 복종하여 대외 관계까지 의지하는 편이었다. 고구려가 신라의 외교까지 연결해 주면서 전진과의 우호 관계가 더욱 돈독해져, 고구려는 서북방 변경에 대해서도 안심하고 있었다. 대기근에서 벗어나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무렵 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순탄하기만한 세월은 없구나라는 생각이 새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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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사이사이 들었던 짧은 생각들은, 


머리를 쓰는 데에 있어 사람마다 활성화되는 부분이 다르다는 것. 화적떼들이 '비려'라고 불리는 지우두의 소금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우신은 만약 염수에서 소금 캐는 권리를 갖게 되고, 그것을 고구려까지 운반하여 팔게 된다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부르는 게 값인 소금 채취권과 교역권을 거머쥔다면 고구려는 더욱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우신은 미래 대비책까지 세워놓는다. 집 나간 딸을 찾겠다고 슬픔을 억누르며 방방곡곡을 헤매는 아비가 그 짧은 순간에 이런 계획까지 세웠다는 게 이런저런 이유로 재밌기도 했다.  


추수가 뗏배의 노를 저으면서 아리랑을 흥얼거리는 부분을 읽다가 문득 아리랑의 기원은 언제부터일까가 궁금해졌다. 막연히 오래된 우리 터전의 구전민요라는 것과 학교에서 배운 지역적 특성에 대한 상식 정도는 알고 있지만 막상 언제부터 시작됐을까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것 같다.   


삼국시대를 다룬 역사서를 읽으면서 가끔 상상하는 것은 '근초고왕과 광개토왕이 동시대에 살았다면?' 이다. 둘 다 영토확장형 군주라 어지간히 싸웠을 것 같은데... . 여기다 진흥왕까지 보태지면...! 어쩌면 이들이 세대를 달리해서 태어난 것은 신의 오묘한 섭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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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덕은 똘똘하게 자라고 있고 그의 인생에서 그림자가 되어줄 것 같은 마동과 두치를 만났으며, 추수는 해적잡는 일목장군이 되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소진은 여전히 무명대사를 찾아다니고, 소진의 아비 우신은 딸의 뒤를 추적하는 중이다. 동부욕살 하대곤의 가당치도 않았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아버지 무의 뜻과는 다르게 증오와 복수심만 차곡차곡 쌓은 해평의 예상치 못한 인생 행로. 대왕 구와 사유가 그랬듯 다시 한 세대가 저물어간다. 


생뚱맞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피고 지는 게 당연한 순리임에도 어느 순간 늙는다는 건 서글픈 거라고 말씀한 어느 분이 생각났더랬다.  


4권에서는 청소년기의 담덕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배 타고 나간 겁없는 두 소년은 어찌 됐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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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
어맨다 고먼 지음, 정은귀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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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말부터 2021년까지, 우리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전무후무한 팬데믹 시대를 지나왔다. 인류는 14세기의 흑사병, 20세기의 스페인 독감, 아시아 독감, 홍콩 독감, 신종플루 등 전지구적 전염병 대유행을 겪어왔지만, 특히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비드19는 역대 찾아볼 수 없는 전염력으로 인해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2022년의 끝을 석 달 앞둔 현재, 많은 나라에서 코비드19 종식을 선언하고 있는 중이다. 


이 시집은 팬데믹 시대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지점에서 우리가 감내해야했던 수많은 상실과 고통을 직시하면서 이에 대해 탐구함과 동시에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에 무엇을 바탕으로 두어야하는 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스물세 살이라는 젊음이 돋보인다고 느껴질만큼 구성이나 형식이 독창적이다. 시인의 시어와 분위기는 무겁지 않으나 사유는 결코 가볍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우리는 코로나라는 질병 자체보다 전염병에 대한 불안으로 더 피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악수와 포옹은 선물 같다는 시인의 말에 공감한다. 코비드19가 한창일때 우리는 아무리 반가워도 가벼운 포옹은 고사하고 손끝조차 스치지 않기 위해 무척 조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일까. 여전히 악수를 위해 내미는 손이 때로는 무례가 되지 않을까 우려가 앞선다.  


한동안 본의 아니게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던 시기. 반강제적 고립은 인간을 마치 상동행동을 하는 감금된 동물처럼 만들었고, 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는 사치가 되었으며, 사랑과 책임과 위로는 사라졌다. 어떤 목적도, 기능도 없이 사고가 멈춰버린 채 불안과 우울의 우물에 갇혀버렸다. 


시인은 코비드19 사태를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 한국인 한恨에 비유하며 우리에게 깊고 짙은 슬픔과 충격을 안겼음을 얘기한다. 동시에 '집단기억'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과연 이 경험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묻는다. 경험을 잊고, 지우고, 검열하고, 왜곡할 것인가, 아니면 비록 고통의 과정을 수반할지언정 서로에게 묻고 듣고 공유하며 그 경험이 반복되지 않도록 진실을 말할 것인가를. 포스트 코로나, 그건 우리의 선택이다.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장과 소리없는 전염병의 전장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전쟁, 전염병 와중에도 여전한 차별과 편견. 이것들은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정당한 분노는 당연한 권리이고, 증오가 바이러스가 되지 않도록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할 목표는 보복이 아닌 회복, 지배가 아닌 존엄, 공포가 아닌 자유여야한다고 시인은 역설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편리함보다 본질과 더불어 살아야함을, 타인을 미워하고 책임을 떠넘기기보다 더 나은 길을 모색해야 한다. 때로는 위기가 우리를 더 우리 자신이게끔 해주고, 아이러니하게도 고통과 슬픔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확인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생긴 일은 우리를 통해 생겼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늘 생을 품어왔고 살아남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를 형성하는 '관계' 안에서 더 나아질 것이다. 희망은 실질적인 실천을 대동해야 한다. 그전에 우리에게는 충분히 비통해할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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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으면서 코비드19 발병 직후부터 지금까지, 각종 매체에서 보도되었던 내용들과 개인적인 일상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누군가 밀폐된 공간에서 코를 훌쩍이거나 기침이라도 하면 의심 가득한 가자미 눈을 뜨고, 마스크 대여섯 장을 사기 위해 100미터 이상 줄을 서는 것을 감수하며, 확진자는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당했던 어처구니 없었던 시절. 한겨울 발병한 전염병. 마스크를 쓰고 여름을 나야할 우려가 무색하게 어느새 두 번의 여름을 거쳤다. 이렇게 살 수는 없어,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2년을 지나왔다.   


팬데믹 시대에 우리가 발견한 건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시인은 전쟁과 팬데믹의 첫걸음은 고립과 단절이라고 얘기한다. 무기와 흉기를 사용하지 않는 선에서 이보다 더 극단적인 폭력이 있을까. 이보다 더 인간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있을까. 더더욱 무서운 것은 어느새 이러한 현상들이 지속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우리 스스로 서로를 적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온건한 전쟁은 없으며, 내던져질 수 없는 평화는 없다는 시인의 말이 격하게 와닿는다.  


시인은 팬데믹 뒤에 숨은 진짜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우리의 이야기를 소리내어 이야기하고, 쓰고,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시집의 제목처럼 우리는 서로를 불러줘야 한다. 그 부름이 모두를 존재하게 할 것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우리가 길을 잃지 않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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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미친 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박오복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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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부 - 6부 리뷰 



샬럿 브론테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괴물이라는 이분법에 대해 에밀리보다 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제인 에어>는 <천로역정>에 나오는 도덕적 교훈주의를 패러디하고, <셜리>는 여성의 '굶주림'의 기원에 대해, <빌레트>는 여성의 자아 거부의 비유와 엄격한 도덕적 설교라는 구조 안에 대안적 여성 미학을 담아 내고 있다. 


<제인 에어>는 그녀의 내적 현실과 그녀를 둘러싼 여성의 현실을 확실히 반영하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 평론가들은 <제인 에어>의 여자 주인공이 사회적 운명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데에 혼란스러워했고, 제인의 분노에 경악했다. 작가가 <제인 에어> 에서 짚어낸 내용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버사(로체스터의 아내)가 나타내는 모든 것(감금, 긂주림, 분노, 반항)은 제인이 가진 분노의 경험(억압)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제인과 버사 사이에 놓인 유사성은 여성의 범주를 넘어서고자 애쓰는 여성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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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는 <셜리>를 통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계급제도를 역사적으로 다루면서 역사적인 변화와는 아무 관련 없이 보이는 여자 주인공들의 외로운 투쟁과 역사적 변화 사이의 거리를 탐색하는 데 주력한다. 뿐만 아니라 영국 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에서 배제되고 착취당한 이들에 대해 역설적인 장면으로 서술한다. 브론테는 노동자 착취를 여성 실업과 연결하면서 여성과 노동자를 소유물로 취급하며 그들을 경시하는 세태를 짚는다.


작가의 지적 중 인상적인 것은 소설 <셜리>에서 셜리, <제인 에어>에서 버사의 출현이 캐럴라인과 제인에게 탈출의 수단이 되어주었다는 점이다. 사실 소설 <셜리>를 읽지 않아 캐럴라인에 대해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제인의 경우에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사가 아니었으면 제인은 영락없이 중혼의 피해자가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지점이, 억압이 아니라 자유롭게 제약받지 않은 자아 출현의 신호탄이라고 얘기한다. 


<빌레트>는 가부장적 문화의 미학적 관습이 왜, 어떻게 성차별적인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제도처럼 여자들을 감금시키는지 탐색한다. 이 소설 역시 브론테의 여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여자 주인공이 겪는 감금, 탈출, 배제 과정을 그린다. 브론테는 이 소설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을 희생시킨 독재적인 허구를 피하고, 여성에게 있어서 사랑의 끝은 삶의 끝이 아니며 동시에 남성의 낭만주의(모험하는 남성을 기다리는 순종적인 여성)의 기를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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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의 여성 작가들은 순종(천사)과 자기주장(괴물)이라는 양가적 상황 가운데 남성 지배 문화에서 문제적인 여성 역할을 강조하면서 여성의 하위문화에 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조지 엘리엣,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에밀리 디킨스 등 이들 사이에 감지되는 유대를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여성의 하위문화다.  


조지 엘리엇은 습관적으로 자신을 불신했다고 한다. 이는 그녀가 부모로부터 경제적 유산과 부모 사랑의 주요 상속자가 아닌 차선이라는 느낌 때문에 괴로워했다는데, 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작가는 <벗겨진 베일>에서 엘리엇이 비상과 추락에 대한 성적으로 젠더화된 두려움, 치명적인 것으로 묘사한 문학적 소외 때문에 사탄의 실패한 열망을 동일시한다고 얘기하는데, 엘리엇 이전부터 가졌던 자기비하와 전혀 무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에 따르면 엘리엇이 자신을 여성으로서의 여성과 여성 혐오자 등 양가적 반응을 보임과 동시에 이러한 자기 분열을 <벗겨진 베일>에 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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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은 <성직 생활의 장면들>과 <벗겨진 베일>을 통해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초월적 남성과 내재적 여성 사이의 투쟁이고, 여성의 유일한 힘은 물리석 세계와 맺고 있는 계약에서 나오는 악마적 힘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에게 분노하지 않고, 증오를 자신에게 되돌려 스스로를 벌하는 체념적인 모습은 자기혐오를 보여주는 동시에 남성적 서계에서 여자가 처한 조건에 대한 엘리엇의 태도를 보여준다. 


브론테는 여자가 지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저주하고, 자기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보여주며, 여성의 감금과 구속을 그려내면서 남자들이 소유한 권위 있는 자유를 부러워했다. 그에 반해 엘리엇은 지적인 결핍이 초래할 암울한 결과는 인정하지만 이 결핍 덕분에 여자에게는 감정적인 삶이 더 풍부해진다고 암시했고, 남성적 경쟁이 아닌 서로 돕는 동지애에 기초한 고유한 여성 문화의 미덕과 여성의 창의성을 칭송했으며, 남성들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권위 때문에 사실상 남자들이 육체적 심리적 진정성을 경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엘리엇은 여성의 특징을 타인에 대한 헌신, 공동체 의식, 자연에 대한 감사, 돌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꼽는다. (중략) 엘리엇은 일이 주는 명확함이 없는 여자들에게는 안정된 자아나 단일한 중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연극적 은유를 사용한다. 엘리엇의 여성 인물 중 분장을 두려워하는 인물들이 위험한 속박의 유혹에 치명적으로 이끌리는 이유는 공허에서 생겨난 존재론적인 불안 때문이다. 엘리엇의 여자 주인공들의 삶을 구조짓는 것은 타자성과 부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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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여성의 불안이나 적대감을 피하거나 쫓아낸다면, 시는 직접적인 화자로 등장하는 여성으로 하여금 실제 삶의 불안이나 적대감을 재연하게 만듦으로써 여성 작가들이 시보다는 소설에 더 가까워지게끔 한다. (중략) 자기희생과 순종이 미덕인 19세기 여성은 '체념'이라는 관에 스스로 들어가 못질을 했다. 


16장에서 문학의 고딕 장르가 여성에게 중요했다는 논평이 눈에 띈다. 19세기의 분열된 자아들이 빈번하게 빠질 수 밖에 없었던 혼란스러운 심리적 상태에 대한 은유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디킨슨은 참된 시적 강렬함을 지닌 삶은 소설적 허구보다 훨씬 더 극적이라고 확신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당시 여성들의 고뇌가 고딕적 공포보다 훨씬 더 심각했음을, 그리고 그에 대한 정도도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컸음을 알 수 있었다. 잠깐 벗어나 엘리자베스 개스켈과 더불어 우리나라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이 다른 여성들의 자아에 빙의 되는 장면은 이 책에서 언급한 자아분열과 같은 맥락으로써 이에 대해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인 듯 하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여성의 전유물로 취급하는 바느질에 대해 얘기한다.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아리아드네, 페넬로페, 램지 부인(등대로), 댈레웨이 부인, 디킨슨 등 모든 여자들에게 바느질(뜨개질)은 그들 삶의 고통을 숨기기 위해, 그리고 방어적인 바느질이 필요하지 않을 세계에 대한 전망을 감추는 동시에 드러낸다. 



이 책에서 언급한 문학 작품들을 접하지 않았어도 읽는 데에 큰 무리는 없지만, 당연히 읽은 경험이 있다면 더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 샬럿 브론테의 <셜리>,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를 읽지 않아서 이 작품들에 대해 세부적인 얘기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았었다. 세 작품을 읽은 후 해당 부분만 다시 발췌독을 해볼 요량이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19세기 작품에는 감금, 스토커, 가스라이팅 등 현재 여성 범죄에서 보여지는 양상들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성은 여전히 현실적으로, 상징적으로 '자기만의 방'을 구현하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순종을 강요 당하고 있다. 순종과 복종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이 자아를 각성하고 반기를 드는 순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된다.


벽돌책임에도 읽는 동안 지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두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19세기 여성들의 작품을 얼마나 읽고 또 읽었을까. 분량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도대체 이 책을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 존경어린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완독 후 만세를 외칠만큼 흠없이 완벽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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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철학자 - 키르케고르 평전
클레어 칼라일 지음, 임규정 옮김 / 사월의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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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단독자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인간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키르케고르의 문제에서 발단한 이 책은 1843년 그의 귀향 여행으로 시작한다. 총 세 부로 나뉘어진 이 책은, 1부에서는 인간이 존재해야 하는 방식, 2부에서는 실존 문제에 대해 기존과는 다른 시각을 보여주면서 저작에 열정을 쏟는 그의 모습을, 3부에서는 죽음과 더불어 종결되는 세상과의 투쟁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키르케고르의 뒤를 따라간다. 이 평전의 특이점이라면 서른 살에서 처음 시작해 그의 중년과 유년 및 청년 시절을 거꾸로 되짚어간 후 마지막에 그의 말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마치 키르케고르를 마치 옆에서 지켜보듯 현재 시점으로 썼다는 점에서 더 현장감있는 글읽기였다.  


마지막 40여쪽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키르케고르의 사상과 저서(유고집을 포함한 원고)들이 어떻게 보존.기념되고 있는지 다루고 있는데, 분량은 적지만 이렇게 정리하는 것도 꽤 괜찮더라는.








절망에 빠진다는 것은 최악의 불행이자 고통이고, 자신의 참 자기를 상실한다는 차원에서 파멸이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에 빠지는 것을 정신적인 질병이라 칭하면서 보편적이라고 말한다. 이 복잡하고 혼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정신으로서 영원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오로지 '자기에게 투명하게' 됨으로써, 절망을 감지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인간이 겪는 여러 종류의 절망을 진단했다면, <나에게로 오라>는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치유책을 제시한다. 어떻게 인간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관한 키르케고르의 물음은 종교적 과제로 수렴되고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키르케고르의 방식은 관습과 의무라는 전통적인 명령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내적 필요성'을 유지하기 위한 고군분투이며, 종교적 구조 안에서 '단독자'로 남아 균형을 잡는 행위이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행해야 하는 바와 행하기를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살고 죽을 수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심오한 이념과 진리를 찾고자 했다. 인간은 대개의 경우 존재자들 간의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고 질서를 부여한다. 그런 특징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암묵적 논리다. 키르케고르의 논지는 그 누구든 자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철학을 추구하는 사람은 실존의 극도로 절박한 문제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봤다. 즉 철학적 논리를 윤리적 삶에 적용하지 않는 학자(헤겔 등)들을 비판한 것이다. 


ㅡ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해결하는 일은 그의 철학과 삶의 핵심에 놓여 있는 문제임과 동시에 영적인 과제로서, 어떻게 신과의 관계 안에서 살 것인가라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는 플라톤의 철학에서는 '세상에 반대하는 논쟁'을, 기독교의 성서에서는 신성한 진리가 세상 안, 즉 인간의 육신 안에 구현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얻었다. 그는 학문적 기획 전체가 현실적 실존으로부터의 도피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지적 이탈을 지식의 상업화와 연결시켰다. 근대 대학들의 교수들은 상인들이 상품을 사고 파는 것처럼 사상을 사고 팔았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포장되어 매매되는 그 학문에는 참된 지혜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저작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통해 지적한다.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키르케고르는 어떻게 전통철학의 방법이 현상과 실재, 믿음과 앎, 필연과 자유 등의 개념들을 구별함으로써 진행되는가를 비틀어 삶 자체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사유를 전개하여 '어떻게 인간으로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끌어냈다. 그의 방법은 개념들을 구별하는 게 아니라, 실존의 영역들과 인간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구별하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 있어 그중 최고의 것은 종교적 영역으로서 신과의 관계라는 축을 중심으로 선회하며 그 지평과 깊이는 무한하다. 


키르케고르는 저작 <반복>에서 지식의 차원이 아닌 사랑에 의한, 마음에 관한 진리를 탐구했다. 산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타인과 만나는 것이며, 변화하는 세상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존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고 깨닫기를 반복한다. 키르케고르는 성경을 통해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님과 그 자신의 마음에 충실할 수 있을까하는 실존의 딜레마를 탐구한다. 


키르케고르는 열린 마음을 '겸손한 용기'라고 부른다. 그는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얘기하는데,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체가 모순적이라는 게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인간 실존은 어쩔 수 없이 공적인 동시에 지극히 사적인 것이다. 우리 내면의 삶이 심오해질수록 이 모순 역시 더욱 깊어진다.  


ㅡ 


키르케고르는  당시 교회가 기독교적 이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세속적인 것에 기울어져 있다고 여겼고, 기독교가 유럽 그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역설한다. 즉 더 이상 진정한 기독교는 없다면서 19세기 기독교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투쟁은 그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피폐하게 했으며, 결국 병까지 얻게 만들었


키르케고르는 전 생애에 걸처 세상에서 어떻게 인간으로 존재할 것인가 하는 실존의 문제에 매달렸다. 그는 누구도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타인의 종말론적 전망에 관한 성찰을 시작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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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키르케고르의 철학 사상에 영향을 미친 인물과 사조 및 시대적 배경까지 서술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독선적인 아버지의 영향과 타고난 성정(외골수이고 호전적이고 논쟁적이고, 예민한)으로 인해 대중들에게 적지 않은 비난을 감수하면서 한편으로는 반항적인 성격이 갈수록 굳어져갔던 키르케고르가 불안감이 컸던 이유를 내 나름으로 납득할 수 있었다.


소설같은 구도와 매끄러운 문체가 평전임에도 읽기에 상당히 부드러웠다. 인간의 고유한 본성, 부재와 현존 등 실존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 끊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열정적으로 파고들며 노력한 키르케고르의 순수한 앎을 향한 철학적 열망과 동시에 저작자로서의 야망, 그리고 학자이기 이전에 인간 키르케고르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미래는 미지의 심연이다. 인간은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며 불안에 싸여 눈에 보이는 유한한 것들을 아무것이나 붙들고 늘어진다. 그것이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 혹은 우리 자신들에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제쳐 놓은 채로.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타고나기를 불안한 존재이고, 이 세상에서는 온전히 편하지 못하며,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에서 저자는 키르케고르의 생애를 통해 삶의 신비한 의미와 놀라움을 느꼈다고 썼다. 나는 삶의 신비함보다 키르케고르의 다양한 모습에 놀라움을 느꼈다고 해야할 것 같다. 레기네에 대한 감정과 태도, 윤리적 철학에 대한 강박, 신앙과 종교를 분리하면서 추적하는 과정, 끊임없는 글쓰기에 대한 순수한 욕망과 저술가로서 갖는 명예에 대한 집착 등 하나의 명제로만 단정하기 어려운 그의 삶을 보면서 스스로를 이토록 닥달했으니 정신적으로 어지간히 고단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 인간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사랑했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의 말을 통해 삶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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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의 미친 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박오복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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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 3부 리뷰 


메리 셜리, 에밀리 디킨스, 조지 엘리엣, 샬럿 퍼킨스 길먼, 실비아 플라스, 제인 오스틴 등 19세기 여성 작가와 작품을 통해 여성이 왜 가부장적이며 폐쇄적인 동굴 안에 갇혀 있어야만 했는지, 세부적으로 분석해 설명한다. 








'펜을 드는 여자'는 건방지고 '주제넘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구제 불능인 존재다. 이 문장에서 읽히듯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는 여성이 문학에 관여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여성은 문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관능의 대상으로 남성의 행위를 받아들이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가부장제가 딛고 서 있는 여성 혐오를 반영한다. 


여성은 자기를 '살해해' 예술에 가두어놓았던 미학적 이상인 천사 뿐만 아니라 대립적인 괴물도 죽여야 한다. 울프가 행한 이러한 방식의 시작은 기존에 뿌리내려진 여성의 이미지의 기원과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시학을 수립하고자 한다면 우선 분석부터 해야하는데, 천사와 괴물 이미지는 남성이 쓴 문학 전반에 퍼져 있을 뿐 아니라 여성문학에도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기술은 천사의 특징, 즉 숙녀에게 가장 적절한 행위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최고의 교사인 세라 엘리스 부인은, '숙녀는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는 존경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같은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올바른 여성이라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품이 되든 성녀가 되든 아름다운 천사-여자의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 즉 자아를 포기함으로써 고귀해지는 것이다. 여성은 부여된 위치에서 벗어나고자하면(그래봐야 고작 도망가는 수준에 불과한) 저주나 복수의 대상이 된다. 문학 작품에서, 가부장제 내에서 갈등의 원인 제공은 남성이 하고 있으나 선악의 대립 구조를 두 여성에게 부여함으로써 서로를 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앤 피치, 에밀리 브론테, 에밀리 디킨스 등 여성들이 남성 작가의 텍스트에서 벗어났을 때 오랜 침묵은 깨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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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작가도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대다수 여성들처럼 가부장제 여성들을 열등하게 취급하는 대체 심리학의 희생자다. 따라서 여성 예술가의 고독, 여성 작가 간의 갈등, 남성 작가들로부터의 소외감과 반감에 대한 두려움, 예술의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 여성 창조의 부적절함에 대한 불안 등 이 모든 '열등화' 현상은 여성 작가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정립하려는 분투의 표식이다.  


18세기~19세기, 자신의 문학적인 노력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여자들은 미친 사람 내지 괴물 취급을 받았다. '성을 벗어났기' 때문에 타락했다는, 즉 여성의 지적 야망은 탈선과 동의어였던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에 따르면, 당시의 여성 문인은 '단지 여자'일 뿐임을 인정하거나 '남자만큼 훌륭하다'고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중의 속박에 갇혀 있었다.  


제인 오스틴 뿐만 아니라 샬럿 퍼킨스 길먼, 실비아 플라스 같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묘사하는 악은 각각의 결이 다른 공포다. 여성이 위험에 대한 감각을 무시해야 하고,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인식과 모순되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았을 때 생기는 공포와 자기혐오다.  


제인 오스틴의 경우 초기작은 남성 작가의 문학적 인습을 노골적으로 패러디함으로써 여성을 지속적으로 세뇌하는 문화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 말고는 타당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전통적인 생각에 대중적인 로맨스 소설이 어떻게 기여했으며, 여성에 대한 이런 억측이 '여성성'에 어떤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는가이다. 오스틴은 모든 여성이 세상을 향해 자기주장을 하고 싶은 욕망과 가정이라는 안전한 곳으로 숨고 싶은 대립되는 욕망으로 분열해 있을지라도 이런 심리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작품마다 암시한다. 여성에게는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의 관계가 매우 문제적이지만, 새로운 자아는 이중의 비전을 견지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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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의 시에는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적 사상, 여성 혐오가 깊게 뿌리내려 있다. 천사=남성, 사탄(괴물)=여성이라는 공식을 기본적 토대로 삼는다. 작가는 <프랑켄슈타인>을 성과 독서에 대한 여성의 환상소설로, 이른바 성서 발생론에 대한 메리 셸리의 인식을 반영한 고딕적인 심리 드라마로서 <실락원>이 내포한 여성 혐오 이야기의 또 다른 판본이라는 작가의 정의가 눈에 띤다.  


<프랑켄슈타인>과 <폭풍의 언덕>의 유사성을 보자면 둘 다 수수께끼 같고 당혹스러우며, 어떤 의미에서 총체적으로 문제적이라는 점이다. 두 대중소설은 많은 독자들에게 표면적 이야기가 복잡한 존재론적인 심오함, 정교한 비유의 구조, 모호하지만 강렬한 도덕적 야망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호성이나 유동성처럼 <폭풍의 언덕>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존재론적 불안정성이다.  


<폭풍의 언덕>에서는 '밀턴'이나 '실락원'이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종교적(천국과 지옥)이고 악마적인 요소가 드러나 있다. 작가는 <폭풍의 언덕>이 밀턴이 묘사한 지옥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반항적이고, 착한 딸이지 못했던 캐서린은 아버지의 죽음이 가부장적 규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아닌 또다른 남성의 권력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그나마 부분적으로 독자적이었던 캐서린(여성)의 세계가 분열된다. 이처럼 여성의 자주권 박탈과 억압은 가해 당사자를 바꾸어 가면서 더 교묘한 형태로 강화 지속된다.  


작가는 캐서린이 숙녀가 되는 것을 추락이라고 표현하면서 동시에 캐서린 본인도 여자처럼 되기가 타락임을 알고 있었다고 썼다. 이는 밀턴의 이브가 타락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 있는 선택도 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얘기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히스클리프가 외형적으로 남성성이지만 그의 괴물적 속성, 사탄적인 추방자의 방식으로 여성적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메리 셸리의 뒤를 이어 브론테처럼 19세기 여성 작가들은 밀턴의 여성 혐오를 전복시키기 위해 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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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흥미로운 독서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읽으면서 도대체 무릎을 몇 번이나 내려쳤는지. 인상적인 부분들이 상당히 많고 재미지게 읽고 있으나 광범위한 내용을 정리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딱 절반을 읽었는데, 5부에 기대하고 있는 조지 엘리엇 편이 기다리고 있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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