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의 미친 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박오복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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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부 - 6부 리뷰 



샬럿 브론테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괴물이라는 이분법에 대해 에밀리보다 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제인 에어>는 <천로역정>에 나오는 도덕적 교훈주의를 패러디하고, <셜리>는 여성의 '굶주림'의 기원에 대해, <빌레트>는 여성의 자아 거부의 비유와 엄격한 도덕적 설교라는 구조 안에 대안적 여성 미학을 담아 내고 있다. 


<제인 에어>는 그녀의 내적 현실과 그녀를 둘러싼 여성의 현실을 확실히 반영하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 평론가들은 <제인 에어>의 여자 주인공이 사회적 운명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데에 혼란스러워했고, 제인의 분노에 경악했다. 작가가 <제인 에어> 에서 짚어낸 내용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버사(로체스터의 아내)가 나타내는 모든 것(감금, 긂주림, 분노, 반항)은 제인이 가진 분노의 경험(억압)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제인과 버사 사이에 놓인 유사성은 여성의 범주를 넘어서고자 애쓰는 여성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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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는 <셜리>를 통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계급제도를 역사적으로 다루면서 역사적인 변화와는 아무 관련 없이 보이는 여자 주인공들의 외로운 투쟁과 역사적 변화 사이의 거리를 탐색하는 데 주력한다. 뿐만 아니라 영국 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에서 배제되고 착취당한 이들에 대해 역설적인 장면으로 서술한다. 브론테는 노동자 착취를 여성 실업과 연결하면서 여성과 노동자를 소유물로 취급하며 그들을 경시하는 세태를 짚는다.


작가의 지적 중 인상적인 것은 소설 <셜리>에서 셜리, <제인 에어>에서 버사의 출현이 캐럴라인과 제인에게 탈출의 수단이 되어주었다는 점이다. 사실 소설 <셜리>를 읽지 않아 캐럴라인에 대해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제인의 경우에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사가 아니었으면 제인은 영락없이 중혼의 피해자가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지점이, 억압이 아니라 자유롭게 제약받지 않은 자아 출현의 신호탄이라고 얘기한다. 


<빌레트>는 가부장적 문화의 미학적 관습이 왜, 어떻게 성차별적인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제도처럼 여자들을 감금시키는지 탐색한다. 이 소설 역시 브론테의 여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여자 주인공이 겪는 감금, 탈출, 배제 과정을 그린다. 브론테는 이 소설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을 희생시킨 독재적인 허구를 피하고, 여성에게 있어서 사랑의 끝은 삶의 끝이 아니며 동시에 남성의 낭만주의(모험하는 남성을 기다리는 순종적인 여성)의 기를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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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의 여성 작가들은 순종(천사)과 자기주장(괴물)이라는 양가적 상황 가운데 남성 지배 문화에서 문제적인 여성 역할을 강조하면서 여성의 하위문화에 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조지 엘리엣,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에밀리 디킨스 등 이들 사이에 감지되는 유대를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여성의 하위문화다.  


조지 엘리엇은 습관적으로 자신을 불신했다고 한다. 이는 그녀가 부모로부터 경제적 유산과 부모 사랑의 주요 상속자가 아닌 차선이라는 느낌 때문에 괴로워했다는데, 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작가는 <벗겨진 베일>에서 엘리엇이 비상과 추락에 대한 성적으로 젠더화된 두려움, 치명적인 것으로 묘사한 문학적 소외 때문에 사탄의 실패한 열망을 동일시한다고 얘기하는데, 엘리엇 이전부터 가졌던 자기비하와 전혀 무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에 따르면 엘리엇이 자신을 여성으로서의 여성과 여성 혐오자 등 양가적 반응을 보임과 동시에 이러한 자기 분열을 <벗겨진 베일>에 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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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은 <성직 생활의 장면들>과 <벗겨진 베일>을 통해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초월적 남성과 내재적 여성 사이의 투쟁이고, 여성의 유일한 힘은 물리석 세계와 맺고 있는 계약에서 나오는 악마적 힘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에게 분노하지 않고, 증오를 자신에게 되돌려 스스로를 벌하는 체념적인 모습은 자기혐오를 보여주는 동시에 남성적 서계에서 여자가 처한 조건에 대한 엘리엇의 태도를 보여준다. 


브론테는 여자가 지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저주하고, 자기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보여주며, 여성의 감금과 구속을 그려내면서 남자들이 소유한 권위 있는 자유를 부러워했다. 그에 반해 엘리엇은 지적인 결핍이 초래할 암울한 결과는 인정하지만 이 결핍 덕분에 여자에게는 감정적인 삶이 더 풍부해진다고 암시했고, 남성적 경쟁이 아닌 서로 돕는 동지애에 기초한 고유한 여성 문화의 미덕과 여성의 창의성을 칭송했으며, 남성들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권위 때문에 사실상 남자들이 육체적 심리적 진정성을 경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엘리엇은 여성의 특징을 타인에 대한 헌신, 공동체 의식, 자연에 대한 감사, 돌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꼽는다. (중략) 엘리엇은 일이 주는 명확함이 없는 여자들에게는 안정된 자아나 단일한 중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연극적 은유를 사용한다. 엘리엇의 여성 인물 중 분장을 두려워하는 인물들이 위험한 속박의 유혹에 치명적으로 이끌리는 이유는 공허에서 생겨난 존재론적인 불안 때문이다. 엘리엇의 여자 주인공들의 삶을 구조짓는 것은 타자성과 부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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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여성의 불안이나 적대감을 피하거나 쫓아낸다면, 시는 직접적인 화자로 등장하는 여성으로 하여금 실제 삶의 불안이나 적대감을 재연하게 만듦으로써 여성 작가들이 시보다는 소설에 더 가까워지게끔 한다. (중략) 자기희생과 순종이 미덕인 19세기 여성은 '체념'이라는 관에 스스로 들어가 못질을 했다. 


16장에서 문학의 고딕 장르가 여성에게 중요했다는 논평이 눈에 띈다. 19세기의 분열된 자아들이 빈번하게 빠질 수 밖에 없었던 혼란스러운 심리적 상태에 대한 은유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디킨슨은 참된 시적 강렬함을 지닌 삶은 소설적 허구보다 훨씬 더 극적이라고 확신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당시 여성들의 고뇌가 고딕적 공포보다 훨씬 더 심각했음을, 그리고 그에 대한 정도도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컸음을 알 수 있었다. 잠깐 벗어나 엘리자베스 개스켈과 더불어 우리나라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이 다른 여성들의 자아에 빙의 되는 장면은 이 책에서 언급한 자아분열과 같은 맥락으로써 이에 대해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인 듯 하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여성의 전유물로 취급하는 바느질에 대해 얘기한다.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아리아드네, 페넬로페, 램지 부인(등대로), 댈레웨이 부인, 디킨슨 등 모든 여자들에게 바느질(뜨개질)은 그들 삶의 고통을 숨기기 위해, 그리고 방어적인 바느질이 필요하지 않을 세계에 대한 전망을 감추는 동시에 드러낸다. 



이 책에서 언급한 문학 작품들을 접하지 않았어도 읽는 데에 큰 무리는 없지만, 당연히 읽은 경험이 있다면 더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 샬럿 브론테의 <셜리>,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를 읽지 않아서 이 작품들에 대해 세부적인 얘기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았었다. 세 작품을 읽은 후 해당 부분만 다시 발췌독을 해볼 요량이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19세기 작품에는 감금, 스토커, 가스라이팅 등 현재 여성 범죄에서 보여지는 양상들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성은 여전히 현실적으로, 상징적으로 '자기만의 방'을 구현하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순종을 강요 당하고 있다. 순종과 복종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이 자아를 각성하고 반기를 드는 순간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된다.


벽돌책임에도 읽는 동안 지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두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19세기 여성들의 작품을 얼마나 읽고 또 읽었을까. 분량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도대체 이 책을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 존경어린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완독 후 만세를 외칠만큼 흠없이 완벽한 읽기였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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