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책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앤솔러지
기 드 모파상 외 지음, 최정수 외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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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 단어를 명쾌하게 정의내려 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 오묘한 감정은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단어가 되어 그 무게가 가벼워진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은 우리를 울고 웃게 한다.  


이 책은 윌리엄 트레버,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레이 브래드버리, 그레이엄 그린, 대프니 듀 모리에 등 우리나라 독자에게 인지도가 높은 작가부터 데이먼 러니언, 유도라 웰티 등 조금은 낯선 작가의 작품까지 골고루 실려 있으며, 남녀 간의 사랑 뿐만 아니라 가족애와 우정도 만날 수 있다. 또한 엽기적일 수도, 혹은 일방적이고 이기적일 수도 있는, 그리고 애잔한 짝사랑과 아득한 첫사랑까지 다양한 사랑의 단면들이 등장한다.







 
호탕하고 유쾌한 로맨스 끝에 찾아온 결혼, 그런데 오매불망 바라던 결혼이 잘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관찰자의 반전, 연애에 있어서 정작 악당은 총잡이 밀수꾼이 아니라 낭만적이고 지성인이라 믿었던 신문쟁이라는 아이러니, 좋아하는 남자는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갔는데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할 생각은 없건만 벗어날 수 없는 비혼 여성이 갖는 현실의 무게는 깊은 외로움과 딜레마를 안겨준다.   



사랑과 질투, 허세와 자존심, 결혼과 조건. 참으로 익숙한 조합인데, 이것 또한 과거부터 지금까지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앗아간 대상은 단순한 적이 아니라 전쟁 자체다. 질투는 죽음을 불사하고, 죽음을 선택할마큼 사랑했음에도 자존심은 버릴 수 없다. 죽음으로도 끊어내지 못하는 애정은 사랑일까, 구속일까.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함께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자는 남자와 결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다는 여자.  


모든 면에서 이상형이지만 이름(철자)이 너무 싫어 구애를 거절한 여자. 잠깐 사족을 달자면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가 마음에 들어 몇 번 만났으나 우연찮게 뒤에서 본 걸음걸이가 거슬려 헤어졌다는 친구가 있었다. 현실적으로 전혀 없는 얘기는 아닌듯 하고.


캐서린 앤 포터의 <그 애>에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휘플 부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지적 장애가 있는 둘째 아이를 무척 아끼는데, 휘플 부인이 사랑한 건 스스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남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이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의 해리엇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지만, 결국 두 여성이 자녀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의 중심에는 아이가 아닌 자신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생각이 든다.  


ㅡ 


사랑은 여러 모습으로 다채롭다지만 사랑을 능가하는 질투와 집착에 대해 사랑을 명분삼아서야 되겠는가.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비밀이 없다는 것과 솔직을 가장해 블필요할 정도로 과거를 습관적으로 늘어놓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그런 면에서 오 헨리의 <목장의 보피프 부인>에서 오랜 시간 동안 지켜왔던 사랑을 이룬 테디의 배려는 사랑만큼이나 아름답더라는.  


사랑을 빙자한 남성의 폭력, 전쟁, 여성 비하 등 소설마다 당시 비혼 여성이 감수해야 하는 차별과 사랑을, 당시 시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고 하면 열정적이고 뭔가 절절해야 할 것 같지만, 의외로 단순하고 소박함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시대를 막론하고 연인 혹은 배우자에게 바라는 사랑은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과 소소한 일상에서의 교감이다.   



시간이 흐르듯 감정도 흐른다. 사랑도 마냥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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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의 문법 (2023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 부유한 나라의 가난한 정부, 가난한 국민
김용익.이창곤.김태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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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복지에 관련해 사회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국가의 역할, 해결해야 할 난제, 해결 방안에 대한 제안,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의 '적자 확대' 및 '기금 고갈'에 대한 진실과 오해 등 우리나라 복지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동시에 복지 제도가 근본적이므로 재설계가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복지는 곧 낭비'라는 인식을 벗어나 한국형 복지국가의 전환 로드맵과 이에 따른 세부 실현 및 조직 구축 전략도 함께 제시한다. 








현재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더한 경제고통지수가 이십일 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으며 일시적인 경기 침체를 넘어 스태그플레이션에 진입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2020년부터의 팬데믹과 여러 국제 정세가 맞물려 세계가 불안정한 상황이다. 산업 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 성장지상주의의 가파른 고성장은 불평등과 양극화를 양산했고, 현재는 이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또한 산업 혁명 이후 기후 및 생태 위기 역시 산업성장지상주의에 의한 대량생산 및 대량소비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현 정부가 이와는 정반대로 정책방향을 잡고 있다는 것, 더하여 난제일수록 공론화해 시민의 의견과 판단을 경청해야함에도 소통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형 복지국가' 설계를 위해 넘어야 할 3대 난제는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다. 저자는 생산기능인구 감소의 해결으로 노인, 여성, 장애인, 청년 등의 경제사회 참여를 늘려 '실질적' 생산가능인구를 늘리자는 제안을 한다.  


고용 시장에서 소외된 사람이 복지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다. 결국 사회보장제도가 불평등을 개선하기는 커녕 심화시키는 역작용을 하게 된다. 이른바 '복지의 역설', '분배의 역설'이다. 사회보장제도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관건은 해당되는 사람들을 모두 가입시키는 것, '가입의 보편성'이 중요하다. 한국은 민간 공급에 강하게 의지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보장제도의 문제점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문에도 나와있듯 우리가 막연하게 인식했던 국가와 정부, 국민의 삶의 현주소에 대한 원인과 배경을 짚어감으로써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개선해야하는 것들을 인지하면서 동시에 함께 고민해야할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정권이 바뀌면서 각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에 있다고 지적한다. 개혁은 국민과의 소통을 전제로 해야 하는 쉽지 않고 지난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문제점를 뻔히 알고 해결 방안이 있음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안 좋은 일이 아니겠나. 


ㅡ 


우리는 일반적으로 진보 정당이 발전해야 복지국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복지 제도를 되짚어봤을 때 이를 이룩한 정당은 대체로 보수당이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일본의 자민당, 한국의 경우 의료보험을 최초로 도입한 대통령은 박정희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 짚고 넘어야가야 할 부분은 보수에 대척하는 사회주의 노동운동과 진보당의 견제, 강력한 여론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또한 정당이 바뀌어도 기존의 제도를 뒤집지 않고 진일보 발전시키는 '정당의 시대정신'이다. 한국은 이러한 정당 정치가 부재하다. 


능력없는 관료들이 집권당을 주도하는 구조에서는 어느 정당이 집권을 해도 정책은 변하지 않으며, 박정희 모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는 정당 제도의 미성숙에서 기인한다. 생각해보면 현 시점에서 백년 전 정책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으니 21세기 국가 비전을 떠들고 있지만 결국 허울 뿐이며, 1970년대의 향수를 벗어나지 못한 정부에게 우리의 삶을 맡기고 있는 셈이다.   


이에 저자는 우리나라 정당 제도의 문제점을 정책 기능의 취약함으로 꼽는다. 청년 인재 육성이 전무하다보니 정책을 만들고 키우는 능력이 없어 급할 때마다 외부인사를 끌어들이기에 급급하며 관료에 의존하는 안이한 편법을 쓰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당의 방향성은 온데간데 없다(지금 정권이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정치 선진국을 보면 이미 십대부터 지지하는 정당에 가입해 간접적으로 정치를 경험하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진로에 반영 및 확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육 과정을 보면 정치의 기본 개념과 이론만 설명하고, 그보다 나은 경우는 학생자치에서 선거를 치를 때 이를 실행해보는 체험 수준에 그친다. 고등학생이 정당에 가입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조차 불편해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교육청이나 학교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일단 기존의 정치인들이 젊은 정치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생각해보면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저자는 청년들이 젊은 시절부터 당에 들어와서 정치 훈련을 받고, 당의 이념을 충분히 인지해 중견 정치가로 성장했을 때 정당 제도가 진짜 발전하는 것이고, 따라서 기본적으로 당이 능력을 키우고, 관료 의존에서 벗어나 실력과 인재의 풀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얘기한다. 


ㅡ 


몇 년 전에 한 독서 모임에서 복지에 관련해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분이 나에게 대놓고 질문했다. 당신은 복지 때문에 소득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라면 내겠냐고. 민간 보험회사에 연금, 건강, 암, 재해, 실손 등의 보험을 가입하지 않고도 나의 안전과 노후가 보장된다면, 교육 복지를 통해 모든 아이들이 입시와 더 나아가 취업 및 임금 구조의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세금을 내겠다고 대답했다. 노인의 고독사, 입시와 취업 실패로 인한 자살 뉴스에 흘리는 눈물은 말라버리면 그만이다. 연민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행동이 동반하지 않는 연민은 그때 뿐이지 않은가. 물론 이전에 시민의식의 개혁이 동반해야 할 것이다. 누구의 말처럼 직장인이 세금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세금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바뀌어야 하고, 투명하고 공정하게 실행할 정부가 필요하다.  


사회보장제도 하나하나를 바꾸기보다 통합적으로 개선해야 하고, 계층별, 집단별, 연령별로 통합적 재설계를 해야하며, 제도 개선과 더불어 인프라 개혁도 동반되어야 한다. 정책 역량이 없으면 정치적 역량도 없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복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사실적 근거를 토대로 구체적이고 촘촘하고 면밀하게 쓰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복지에 대한 오해와 증세에 대한 편견, 정책적인 부분에서의 오류와 개선 방향, 지향해야할 점들까지 자세히 나타내고 있다. 물론 책을 읽은 후 판단은 독자의 몫이겠지만, 국가의 복지와 무관하게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해보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제발 복지가 낭비라는 인식만이라도 개선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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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 -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281
토마스 불핀치 지음, 박중서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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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식으로든 신화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터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판본을 달리하며 성인이 되어서도 꾸준히 읽어온 책 중 하나가 그리스(로마) 신화다. 십년을 훌쩍 넘겨 오랜만에 읽는 신화책인데, 많은 작품들이 그렇겠지만 신화는 간격을 두고 읽을수록 예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점들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서론에서 그리스(로마)의 신을 소개하는데, 서양 신화가 처음인 독자라면 이 부분만 읽어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듯하다. 







 
신화는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빗대어도 어색함이 없다. 
절대 권력, 압제와 저항, 사랑과 질투, 의심과 증오, 불륜과 복수, 가족애와 우정, 역지사지, 탐욕이 불러온 참극, 운명과 모순과 부조리, 일방적인 여성의 헌신, 전쟁과 학살, 영생과 젊음에 대한 욕망, 용기와 무모함, 겸손과 오만, 진실과 거짓, 관대와 용서, 성찰과 각성, 애도와 비통, 번성과 파멸 등 인간이 느끼는 보편적 감정과 욕구들을 신들의 세계에서도 볼 수 있다. 신들 역시 음악과 스포츠에 열광하고, 사랑에 울고, 질투에 눈이 멀기도 한다.


이번에 읽을 때에는 이러한 점들이 좀더 구체적으로 보였다.  
제우스가 여자를 만들어서 프로케테우스와 그 형제에게 보냈는데, 그 이유가 하늘에서 불을 훔쳐 낸 이들의 뻔뻔한 행동을 처벌하기 위해서였다는 일부 주장이 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판도라. 그렇다면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벌'이라는 말인데, 결국은 태초부터 여성 혐오 혹은 비하가 시작됐다는 뜻인가? 그런데 또 다른 한편에는 판도라는 인간을 축복하기 위한 제우스가 선의로 지상에 보낸 존재였다는 주장이다. 그럼 뭐하나? 벌이든 선물이든 여성은 애초에 비주류이자 수동적인 존재로 정해졌고, 결국 상자를 연 사람은 어쨌든 여성인 것을. 


프로메테우스가 절대권력자에게 저항하는 힘의 상징으로 전해졌다면, 아폴론에게서는 소위 스토커 범죄자의 모습이 보인다. 밀턴은 카시에페이아의 이야기를 통해 <우울한 사람>에서 '겸손'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여기에는 그녀가 에티오피아인, 즉 흑인이라는 데에 이유 중 하나로 두는 것처럼 신화가 시대를 반영하는 듯한 느낌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어쩌면 신화가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 의해 조금씩 바뀌어서 전해져 온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ㅡ 


신들의 힘겨루기와 놀음에 농락당하는 건 아무런 힘 없는 인간이다. 땅과 물이 말라버리고, 터전을 잃고, 자식이 납치와 죽임을 당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아있는 자식과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무서운 힘과 권력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다. 신이자 정복자이며 절대 권력자의 잔혹함을 보여준 니오베의 이야기처럼. 



불멸자들 앞의 필멸자는 나약하기 그지없다. 불멸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필멸자들의 저항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은 겸손하지 않으면서 인간에게는 겸손이라는 명분으로 순종과 복종을 강요하며, 거래와 다름하지 않는 관용을 관대함과 용서라는 이름으로 베푼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라크네라고 생각하는데, 아테나가 신의 치부를 들춰낸 아라크네를 간접적으로 죽음으로 몰아간 이후 그녀를 살려내면서 한 말은 무력한 필멸자 존재 차제가 '죄'임을 의미한다. 


"살아나라. 죄 많은 것아! 그리고 이 교훈에 대한 기억을 보전하기 위해, 너는 물론이고 너의 후손들 역시 앞으로도 계속해서 매달려 있어라." (p209)


이 구도를 잘 살펴보면 신과 인간의 세계가 아닌 '인간 세계의 질서'를 그대로 보여준다. 필멸자 인간, 특히 보이지 않는 계급에 의한 줄의 길이는 제각각 다를 터다. 



불핀치는 그리스 신화를 마무리하면서 신화의 기원에 대해 정리한다. 성서 이론, 역사 이론, 우의 이론, 자연 이론 등을 드는데, 그는 어느 하나의 이론에 치우치기보다는 모든 원천들이 어우러져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우의 이론에 더 무게가 있다는 데에 사견을 둔다. 


ㅡ 


개인적으로 불핀스의 해석도 재미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이 책이 좋았던 점은 존 밀턴, 토마스 무어, 사무엘 콜리지, 존 키츠, 프리드리히 실러, 바이런 등 불핀스가 신화를 인유한 문헌들을 발췌해 소개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집트와 조로아스터를 포함한 아시아와 북유럽의 신화를 간략하게나마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베오울프까지 실려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런데 아시아의 경우 신화에서 시작하지만 대부분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더 크다. 


프시케와 콩쥐와 다나오스의 딸들, 스킬레와 낙랑공주, 키르케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티라모스와 티스베'와 셰익스피어 등등. 신화가 민족을 불문하고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과 사회를 구성하며 지속시키는 방식에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시사하며, 그리스 신화를 마치면서 별도로 신들의 조상彫像들과 신화를 노래한 시인들을 열거하며 해석함으로써 문학과 다양한 예술에 미치는 신화의 영향과 가치를 짐작해 볼 수 있게끔 한다. 또한 '토르', '반지의 제왕' 등의 영화들을 보더라도 문학 뿐만 아니라 대중예술에 있어서도 영감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신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신과 인간은 삶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 신이 불멸의 존재이기는 하지만 인간으로부터 받는 영향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받는 영향과 다르지 않다. 읽으면서 느낀 점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훨씬 더 인간적이라는 것. 북유럽의 신들이야말로 신같은 느낌?! 그렇지만 어쨌거나 의외로 신들에게서 그다지 경외심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북유럽 신화 책은 W출판사 에서 나온 판본으로 읽어봤는데, 다른 책들을 찾아서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디세이아> <아이네이스> <오레스테이아> <메데이아> <베오울프> 등을 원전 완역본으로 읽기에 부담스러운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읽은 후에 도전해보면 도움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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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4
보리스 비앙 지음, 이재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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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금발과 분홍색이 도는 흰 피부, 정말이지 위험할 게 전혀 없었다. 그들 모두를 감쪽같이 속일 수 있으리라.  



수수께끼 투성이의 스물여섯 살 남성 리 앤더슨. 도망치듯 살던 도시를 떠났고, '그 아이'를 한시도 잊지 못하다. 또한 자신의 외모로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다고 말한다. 책장을 넘길수록 독자들은 그가 어떤 범죄에 연류됐다는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도대체 리 앤더슨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마치 쫓기듯 벅턴에 숨어든 것일까? 
 








리는 신앙에 기대어 선을 행하면 보답을 받는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행여 그런 일이 일어난다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복수. 그가 그토록 염원하는 복수는 누구에 대한, 누구를 향한 것인지 독자는 궁금해진다. 



소설 초반, 불편할 정도로 리가 백인 십대 소녀들과의 성행위에 집착하는 이유를 중반으로 넘어가면 비로소 알게 된다. 그가 백인 소녀들, 특히 애스퀴스 자매, 진과 루를 상대로 집착하는 성행위는 다름아닌 동생에 대한 복수의 시작이다. 


리는 아이티 음악가들이 세계 최고 음악가들이자 미국 음악의 원조라고 말하고, 루는 일류 악단들은 모두 백인이라고 대답한다. 리가 백인이 훨씬 더 나은 위치에서 흑인의 창조물을 착취한다고 지적하자 루는 맥락없이 무작정 흑인이 정말 싫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난 흑인이 정말 싫어요." 


이 한마디가 그렇지 않아도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복수만을 향해 질주하는 리에게 불을 붙이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리에게 있어 애스퀴스 자매는 시험 케이스다. 유력 인사를 살해하기 전 연습인데, 리는 무수히 많은 백인들을 죽여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고 말한다. 거기다 자동차 사고는 너무 순식간에 끝나기 때문에 고통의 시간이 적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에게 왜 죽어야 하는지 설명할 시간이 필요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깨달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참 잔인하다.  



리의 동생이 살해당한 이유를 알고 나면 그의 동생을 위한 복수심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동생의 억울한 죽음에 무력한 톰도 마뜩치 않지만, 동생의 복수를 빌미로 자신의 삐뚤어진 성적 욕망과 오로지 극단적인 자극만을 좇으며 분노를 토해내는 리 또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소설 후반부에서 극에 달한 리의 광기는 그것이 진정 동생에 대한 복수심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을 갖게 하는 부분은 '(...)두 차례에 걸쳐 느꼈던 감정을 또다시 경험하고 싶었다 (p177)' 라는 지점이다. 이쯤되면 동생의 죽음과 관계없이 그는 그저 자극을 좇는 살인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어쩌면 리는 자신의 광기를 뱉어내기 위해 동생의 죽음을 핑게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든다.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행복했던 한때를 회상하면서 즐거운 기분으로 웃으며 이제는 두렵지 않다는 리의 모습은 괴괴하게 느껴질 정도다.   



나는 이 소설이 인종 차별로 인한 복수극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보다는 광기어린 살의를 품은 한 인간에 대해 읽었다는 생각이 크다. 무엇보다 인물 설정이 세대를 거친 백인 혼혈의 흑인이라는 점도 단지 사건 전개상 필요한 장치였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작가 자신이 백인이자 음악가이며 재즈 팬으로서 흑인 재즈를 정통으로 여기고 백인 재즈 연주자를 신랄하게 비판(비난에 가까운)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딘가 짐작되는 부분이 있다. 


흑인이 싫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두 여자,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악의적으로 모두를 농락한 흑인 남자. 그들에게 남은 건 죽음 뿐. 제목에서는 침을 뱉겠다고 했으나 침을 뱉을 수 있는 자는 남아있지 않다. 과연 침을 뱉지 못하는 이유가 오로지 죽음 때문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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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장난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3
로베르토 아를트 지음, 엄지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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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126
내 영혼에 스며들어 어두운 동굴을 파는 나병. 나는 언제나 화가난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에 깨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망감에 빠질 때마다 혈관이 넓어지는 듯했고,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어떤 힘이 뼈와 살갗 사이에서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분노로 치를 떨며 몇 시간이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학교 밖 세상에 발을 내딛는 빈민층 소년이 마주하게 되는 사회에 대한 고발이자 더 나은 세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며 동시에 삶에 대한 분투기이다.   



주인공 화자 실비오는 틈만 나면 일자리를 얻으라고 재촉하는 엄마가 원망스럽고,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한 세상이 너무 증오스럽다. 무엇보다 실비오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슬픔이다. 더하여 이러한 삶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서글프다. 그가 즐겨 읽는 장르소설의 주인공 로캉볼처럼 위대한 도둑, 혹은 보들레르처럼 천재적인 시인이 되기를 바랐건만 현실은 학교도 그만둔 채 허드렛일만 하는 급사 신세다. 


이르수베타 가족은 집안 대대로 판사를 해온 사람들을 비롯해 보수당 쪽 사람들과 친척 관계라는 사실을 이용해 톡톡히 누리고 산다. 집세도 제 때에 못내는 주제에 집주인에게 카지노 무료 입장권을 내놓으라고 떼쓰고, 경찰인 가장은 외상값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피해를 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정권 교체가 이루어질 때까지 참을 수 밖에 없다. 그것도 모자라 그집 딸들은 시집을 읽는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엘리트 지식인이라고 확신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상놈이라고 멸시한다. 이것이 엔리케가 자란 가정 환경이다.  


절도 행위를 통해 한편으로 불안감을 느끼지만,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두 소년. 시간이 흐를수록 어설픈 흉내를 넘어서 전문 절도범이 되어 가고 있다. 심지어 총기까지 소지하고, 폭탄 제조까지 계획한다. 그들의 나이는 고작 열네 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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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실비오가 경험한 세상은 가난 때문에 교육받지 못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착취 당하며, 이로인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공평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사회구조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마주한 세상은 법의 허점을 이용한 합법적인 절도와 사취, 위조와 부정, 약자를 착취해 부를 축적한 이들이 진실된 사람들보다 더 윤택한 삶을 사는 부조리다. 


아무리 똑똑하고 재능을 갖추고 잠재력이 커도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는 빈민층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빈곤과 오로지 노동뿐인 일상에서 오는 좌절을 벗어나는 길은 약탈과 도박 뿐이다. 그러나 실비오는 폭력과 절도범이 영웅이 될 수 있는 건 소설 안에서나 가능한 일임을, 이제는 모르지 않는다. 


실비오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고, 죽은 뒤에는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바람조차 가난한 자들의 몫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비오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진실을 믿고 싶다. 아무런 사심없이 웃는 얼굴로 서로의 안부를 물어주는 이웃과 굽히지 않는 생명력의 힘으로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찾아 나눌 수 있는 삶의 긍정성, 그리고 삶 자체가 곧 선물이 될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이 실비오를 살게 한다.   



지금의 우리도 그렇지 않나?
만약 희망과 희망이 이루어질 거라는 믿음, 슬며시 기댈 어깨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힘으로 녹록치 않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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