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시대 -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281
토마스 불핀치 지음, 박중서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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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식으로든 신화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터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판본을 달리하며 성인이 되어서도 꾸준히 읽어온 책 중 하나가 그리스(로마) 신화다. 십년을 훌쩍 넘겨 오랜만에 읽는 신화책인데, 많은 작품들이 그렇겠지만 신화는 간격을 두고 읽을수록 예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점들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서론에서 그리스(로마)의 신을 소개하는데, 서양 신화가 처음인 독자라면 이 부분만 읽어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듯하다. 







 
신화는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빗대어도 어색함이 없다. 
절대 권력, 압제와 저항, 사랑과 질투, 의심과 증오, 불륜과 복수, 가족애와 우정, 역지사지, 탐욕이 불러온 참극, 운명과 모순과 부조리, 일방적인 여성의 헌신, 전쟁과 학살, 영생과 젊음에 대한 욕망, 용기와 무모함, 겸손과 오만, 진실과 거짓, 관대와 용서, 성찰과 각성, 애도와 비통, 번성과 파멸 등 인간이 느끼는 보편적 감정과 욕구들을 신들의 세계에서도 볼 수 있다. 신들 역시 음악과 스포츠에 열광하고, 사랑에 울고, 질투에 눈이 멀기도 한다.


이번에 읽을 때에는 이러한 점들이 좀더 구체적으로 보였다.  
제우스가 여자를 만들어서 프로케테우스와 그 형제에게 보냈는데, 그 이유가 하늘에서 불을 훔쳐 낸 이들의 뻔뻔한 행동을 처벌하기 위해서였다는 일부 주장이 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판도라. 그렇다면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벌'이라는 말인데, 결국은 태초부터 여성 혐오 혹은 비하가 시작됐다는 뜻인가? 그런데 또 다른 한편에는 판도라는 인간을 축복하기 위한 제우스가 선의로 지상에 보낸 존재였다는 주장이다. 그럼 뭐하나? 벌이든 선물이든 여성은 애초에 비주류이자 수동적인 존재로 정해졌고, 결국 상자를 연 사람은 어쨌든 여성인 것을. 


프로메테우스가 절대권력자에게 저항하는 힘의 상징으로 전해졌다면, 아폴론에게서는 소위 스토커 범죄자의 모습이 보인다. 밀턴은 카시에페이아의 이야기를 통해 <우울한 사람>에서 '겸손'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여기에는 그녀가 에티오피아인, 즉 흑인이라는 데에 이유 중 하나로 두는 것처럼 신화가 시대를 반영하는 듯한 느낌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어쩌면 신화가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 의해 조금씩 바뀌어서 전해져 온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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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힘겨루기와 놀음에 농락당하는 건 아무런 힘 없는 인간이다. 땅과 물이 말라버리고, 터전을 잃고, 자식이 납치와 죽임을 당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아있는 자식과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무서운 힘과 권력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다. 신이자 정복자이며 절대 권력자의 잔혹함을 보여준 니오베의 이야기처럼. 



불멸자들 앞의 필멸자는 나약하기 그지없다. 불멸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필멸자들의 저항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은 겸손하지 않으면서 인간에게는 겸손이라는 명분으로 순종과 복종을 강요하며, 거래와 다름하지 않는 관용을 관대함과 용서라는 이름으로 베푼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라크네라고 생각하는데, 아테나가 신의 치부를 들춰낸 아라크네를 간접적으로 죽음으로 몰아간 이후 그녀를 살려내면서 한 말은 무력한 필멸자 존재 차제가 '죄'임을 의미한다. 


"살아나라. 죄 많은 것아! 그리고 이 교훈에 대한 기억을 보전하기 위해, 너는 물론이고 너의 후손들 역시 앞으로도 계속해서 매달려 있어라." (p209)


이 구도를 잘 살펴보면 신과 인간의 세계가 아닌 '인간 세계의 질서'를 그대로 보여준다. 필멸자 인간, 특히 보이지 않는 계급에 의한 줄의 길이는 제각각 다를 터다. 



불핀치는 그리스 신화를 마무리하면서 신화의 기원에 대해 정리한다. 성서 이론, 역사 이론, 우의 이론, 자연 이론 등을 드는데, 그는 어느 하나의 이론에 치우치기보다는 모든 원천들이 어우러져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우의 이론에 더 무게가 있다는 데에 사견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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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불핀스의 해석도 재미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이 책이 좋았던 점은 존 밀턴, 토마스 무어, 사무엘 콜리지, 존 키츠, 프리드리히 실러, 바이런 등 불핀스가 신화를 인유한 문헌들을 발췌해 소개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집트와 조로아스터를 포함한 아시아와 북유럽의 신화를 간략하게나마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베오울프까지 실려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런데 아시아의 경우 신화에서 시작하지만 대부분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더 크다. 


프시케와 콩쥐와 다나오스의 딸들, 스킬레와 낙랑공주, 키르케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티라모스와 티스베'와 셰익스피어 등등. 신화가 민족을 불문하고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과 사회를 구성하며 지속시키는 방식에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시사하며, 그리스 신화를 마치면서 별도로 신들의 조상彫像들과 신화를 노래한 시인들을 열거하며 해석함으로써 문학과 다양한 예술에 미치는 신화의 영향과 가치를 짐작해 볼 수 있게끔 한다. 또한 '토르', '반지의 제왕' 등의 영화들을 보더라도 문학 뿐만 아니라 대중예술에 있어서도 영감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신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신과 인간은 삶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 신이 불멸의 존재이기는 하지만 인간으로부터 받는 영향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받는 영향과 다르지 않다. 읽으면서 느낀 점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훨씬 더 인간적이라는 것. 북유럽의 신들이야말로 신같은 느낌?! 그렇지만 어쨌거나 의외로 신들에게서 그다지 경외심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북유럽 신화 책은 W출판사 에서 나온 판본으로 읽어봤는데, 다른 책들을 찾아서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디세이아> <아이네이스> <오레스테이아> <메데이아> <베오울프> 등을 원전 완역본으로 읽기에 부담스러운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읽은 후에 도전해보면 도움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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