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장난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3
로베르토 아를트 지음, 엄지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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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126
내 영혼에 스며들어 어두운 동굴을 파는 나병. 나는 언제나 화가난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에 깨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망감에 빠질 때마다 혈관이 넓어지는 듯했고,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어떤 힘이 뼈와 살갗 사이에서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분노로 치를 떨며 몇 시간이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학교 밖 세상에 발을 내딛는 빈민층 소년이 마주하게 되는 사회에 대한 고발이자 더 나은 세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며 동시에 삶에 대한 분투기이다.   



주인공 화자 실비오는 틈만 나면 일자리를 얻으라고 재촉하는 엄마가 원망스럽고,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한 세상이 너무 증오스럽다. 무엇보다 실비오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슬픔이다. 더하여 이러한 삶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서글프다. 그가 즐겨 읽는 장르소설의 주인공 로캉볼처럼 위대한 도둑, 혹은 보들레르처럼 천재적인 시인이 되기를 바랐건만 현실은 학교도 그만둔 채 허드렛일만 하는 급사 신세다. 


이르수베타 가족은 집안 대대로 판사를 해온 사람들을 비롯해 보수당 쪽 사람들과 친척 관계라는 사실을 이용해 톡톡히 누리고 산다. 집세도 제 때에 못내는 주제에 집주인에게 카지노 무료 입장권을 내놓으라고 떼쓰고, 경찰인 가장은 외상값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피해를 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정권 교체가 이루어질 때까지 참을 수 밖에 없다. 그것도 모자라 그집 딸들은 시집을 읽는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엘리트 지식인이라고 확신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상놈이라고 멸시한다. 이것이 엔리케가 자란 가정 환경이다.  


절도 행위를 통해 한편으로 불안감을 느끼지만,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두 소년. 시간이 흐를수록 어설픈 흉내를 넘어서 전문 절도범이 되어 가고 있다. 심지어 총기까지 소지하고, 폭탄 제조까지 계획한다. 그들의 나이는 고작 열네 살이다.  


ㅡ 


소년 실비오가 경험한 세상은 가난 때문에 교육받지 못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착취 당하며, 이로인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공평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사회구조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마주한 세상은 법의 허점을 이용한 합법적인 절도와 사취, 위조와 부정, 약자를 착취해 부를 축적한 이들이 진실된 사람들보다 더 윤택한 삶을 사는 부조리다. 


아무리 똑똑하고 재능을 갖추고 잠재력이 커도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는 빈민층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빈곤과 오로지 노동뿐인 일상에서 오는 좌절을 벗어나는 길은 약탈과 도박 뿐이다. 그러나 실비오는 폭력과 절도범이 영웅이 될 수 있는 건 소설 안에서나 가능한 일임을, 이제는 모르지 않는다. 


실비오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부자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고, 죽은 뒤에는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바람조차 가난한 자들의 몫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비오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진실을 믿고 싶다. 아무런 사심없이 웃는 얼굴로 서로의 안부를 물어주는 이웃과 굽히지 않는 생명력의 힘으로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찾아 나눌 수 있는 삶의 긍정성, 그리고 삶 자체가 곧 선물이 될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이 실비오를 살게 한다.   



지금의 우리도 그렇지 않나?
만약 희망과 희망이 이루어질 거라는 믿음, 슬며시 기댈 어깨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힘으로 녹록치 않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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