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4
보리스 비앙 지음, 이재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7.
금발과 분홍색이 도는 흰 피부, 정말이지 위험할 게 전혀 없었다. 그들 모두를 감쪽같이 속일 수 있으리라.  



수수께끼 투성이의 스물여섯 살 남성 리 앤더슨. 도망치듯 살던 도시를 떠났고, '그 아이'를 한시도 잊지 못하다. 또한 자신의 외모로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다고 말한다. 책장을 넘길수록 독자들은 그가 어떤 범죄에 연류됐다는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도대체 리 앤더슨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마치 쫓기듯 벅턴에 숨어든 것일까? 
 








리는 신앙에 기대어 선을 행하면 보답을 받는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행여 그런 일이 일어난다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복수. 그가 그토록 염원하는 복수는 누구에 대한, 누구를 향한 것인지 독자는 궁금해진다. 



소설 초반, 불편할 정도로 리가 백인 십대 소녀들과의 성행위에 집착하는 이유를 중반으로 넘어가면 비로소 알게 된다. 그가 백인 소녀들, 특히 애스퀴스 자매, 진과 루를 상대로 집착하는 성행위는 다름아닌 동생에 대한 복수의 시작이다. 


리는 아이티 음악가들이 세계 최고 음악가들이자 미국 음악의 원조라고 말하고, 루는 일류 악단들은 모두 백인이라고 대답한다. 리가 백인이 훨씬 더 나은 위치에서 흑인의 창조물을 착취한다고 지적하자 루는 맥락없이 무작정 흑인이 정말 싫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난 흑인이 정말 싫어요." 


이 한마디가 그렇지 않아도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복수만을 향해 질주하는 리에게 불을 붙이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리에게 있어 애스퀴스 자매는 시험 케이스다. 유력 인사를 살해하기 전 연습인데, 리는 무수히 많은 백인들을 죽여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고 말한다. 거기다 자동차 사고는 너무 순식간에 끝나기 때문에 고통의 시간이 적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에게 왜 죽어야 하는지 설명할 시간이 필요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깨달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참 잔인하다.  



리의 동생이 살해당한 이유를 알고 나면 그의 동생을 위한 복수심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동생의 억울한 죽음에 무력한 톰도 마뜩치 않지만, 동생의 복수를 빌미로 자신의 삐뚤어진 성적 욕망과 오로지 극단적인 자극만을 좇으며 분노를 토해내는 리 또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소설 후반부에서 극에 달한 리의 광기는 그것이 진정 동생에 대한 복수심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을 갖게 하는 부분은 '(...)두 차례에 걸쳐 느꼈던 감정을 또다시 경험하고 싶었다 (p177)' 라는 지점이다. 이쯤되면 동생의 죽음과 관계없이 그는 그저 자극을 좇는 살인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어쩌면 리는 자신의 광기를 뱉어내기 위해 동생의 죽음을 핑게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든다.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행복했던 한때를 회상하면서 즐거운 기분으로 웃으며 이제는 두렵지 않다는 리의 모습은 괴괴하게 느껴질 정도다.   



나는 이 소설이 인종 차별로 인한 복수극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보다는 광기어린 살의를 품은 한 인간에 대해 읽었다는 생각이 크다. 무엇보다 인물 설정이 세대를 거친 백인 혼혈의 흑인이라는 점도 단지 사건 전개상 필요한 장치였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작가 자신이 백인이자 음악가이며 재즈 팬으로서 흑인 재즈를 정통으로 여기고 백인 재즈 연주자를 신랄하게 비판(비난에 가까운)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딘가 짐작되는 부분이 있다. 


흑인이 싫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두 여자,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악의적으로 모두를 농락한 흑인 남자. 그들에게 남은 건 죽음 뿐. 제목에서는 침을 뱉겠다고 했으나 침을 뱉을 수 있는 자는 남아있지 않다. 과연 침을 뱉지 못하는 이유가 오로지 죽음 때문만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