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미 다이어리 I&ME - 인문학과 경영철학이 담긴 성장일기
스타북스 편집부 지음 / 스타북스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년 동안 쓸 수 있게 구성된 다이어리. 
만년형이라서 아무때나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보통 세 권의 다이어리를 사용하면서 날짜형은 한 권만, 나머지는 만년형을 사용하는 나로서는 딱 좋은 구성이다. 





 



내가 이 다이어리를 넘기다가 깜짝 놀란 건 사실 다른 데에 있다.
보통 다이어리에는 명문장이나 격언 혹은 잠언 등이 쓰여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물론 이 여기에도 있다. 사자성어까지), 이 다이어리에는 단편 소설 세 작품ㅡ어린 왕자, 노인과 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ㅡ이 완역본으로 실려있다. '설마... 다...?' 라는 마음이 들어 앉은 자리에서 읽었는데, 정말 전체 내용을 다 실었다. 다이어리에 세계문학 세 작품이 들어있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ㅡ 


전체적으로 살펴본 결과, 용도를 결정했다.
독서목록으로 사용할 요량이다. 매일 읽고 있는 책과 완독책을 기록하고 100자 전후로 한줄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 2023년, 2024년, 2025년, 2026년 5월 5일에 읽은 책과 그 순간의 소감을 초간단 기록으로 한 장에 남겨놓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4년의 독서 기록을 한 권에 담는 것도 나름 의미있을 것도 같고.  


올해는 다이어리를 간단하게 가자했는데, 어째 더 많아진 것 같은 기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생의 심장 가까이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0.
"행복해지는 건 무얼 위한 거예요?"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 초독 당시 오십 여 페이지를 읽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진정한(?) 의식의 흐름대로 쓴 소설이었는데, 그 작품을 능가하는 '의식의 흐름'이 등장했다. 


이 소설은 3인칭시점으로서 주아나, 오타비우, 리디아 각각의 관점에서 서술하며, 세월의 순서대로 전개하지 않고 무작위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고간다  









이른 나이에 죽은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와의 짧은 삶, 숙모집에 얹혀 살았던 날들, 사는 법을 가르쳐 준 선생님, 사춘기, 기숙학교, 오타비우와의 결혼. 주아나가 살아온 길이다.  


숙제도, 혼자 놀이도 다 했다. 끊임없이 아빠에게 "나 뭐 해요?"를 묻는, 살아있는 작은 알 같은, 너무 마르고 조숙한 아이. 그녀를 세상 속에서 지탱해 주는 건 연민이다. 연민은 주아나 방식의 사랑이고 증오이고 소통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공포와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무기력함을 순순히 인정했고,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고난 혹은 고통스러운 경험의 정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은 크나큰 상실과 슬픔이었고 무거운 피로였다. 자신을 향한 숙모의 동정심을, 그리고 앞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동정심을, 그녀는 혐오했다.  


주아나는 자신의 유년시절이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을 향한 섬뜩한 폭언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제 뺨을 때리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것으로 불행을 상쇄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묻는 선생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소녀는 선은 사는 것이고, 악은 살지 않는 것이며, 죽음은 선악과는 다른 거라고 대답한다. 이렇듯 소녀는 살아야할 명분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학교 선생에게 느끼는 감정, 2차 성징 시작, 육체적 갈망. 주아나는 삶 자체를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고독 속에 던져놓는다. 그녀 자신조차 무엇을 갈망하는지 명명하지 못한다. 그녀가 고독 안에서도 귀를 기울인 건 내면의 행복. 주아나는 행복했던 순간 순간을 잊어선 안 된다고 되뇌이지만, 늘 잊는다. 주아나 뿐이랴. 모든 인간이 그렇다. 


ㅡ 


오타비우는 주아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발가벗은 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끌렸다. 매혹적인 혐오감을 느끼면서. 인간의 관계 맺기에 큰 신뢰가 없는 주아나. 여기에는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고 타인들과의 결속에서 과감하게 벗어나기는 어렵다. 주아나는 거짓된 사랑, 사랑하지 못하는 혹은 사랑받지 못하는 두려움에서 자유롭고 싶다. 고통을 감수하고 매일매일 순간순간 각성했으나, 오히려 더 깊이 가라앉는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목표 또는 목적한 바대로 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다가 막상 마지막 관문을 눈앞에 두었을 때 오는 왠지 모를 두려움과 불안,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닥치면서 막상 그것에 도달한 후 밀려오는 주체할 수 없는 허무감. 어쩌면 이 거추장스러운 감정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이 인간의 숨겨진 욕망이 아닐까.  


ㅡ 


오타비우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약혼녀 리디아를 저버리고 만난지 얼마 안 된 주아나와 결혼했다. 리디아는 오타비우가 떠나는 걸 원하지 않지만, 떠난다고 해서 두렵지는 않다고 말한다.  


약혼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떠난다해도, 그 이별이나 약혼자의 다른 여자와의 사랑까지 먼 훗날에 공유하게 될 소재에 불과하다는, 어떻게 되건 전 약혼자의 삶에 참여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사랑인가, 집착인가, 미련인가. 아니면 그와의 사랑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절대적 운명이라는 믿음인가. 자신이 그 흔적을 간직할 것이기에 그가 자신과 함께 한 순간을 잊어버리더라도 상관없다는 리디아의 말. 어떻게 하면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지?  


리디아의 힘이 '확신'에 있다면, 주아나의 힘은 '부정확성'에 있다. 주아나는 리디아가 평생 품었던 '작은 가족'에 대한 소망을 비웃는다. 결혼은 불행할 자유와 권태와 고독조차 허락하지 않는, 공동의 죽음을 향하는 것이라고. 자기가 결혼을 한 이유는 '오타비우가 원했기 때문'이며 자신은 오타비우의 생물적인 몸으로서만 그를 원한다고, 리디아에게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리디아는 알게 된다. 주아나는 아직 진정으로 사랑을 한 적이 없고, 사랑을 통해 깨달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주아나가 갖는 사랑에 대한 갈망은 고통보다 더 우위에 있지만, 오타비우와 리디아는 그녀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도구로써 같은 선상에 있다. 더구나 사랑이 삶을 연장시키는 수단이 되기에 주아나는 태생적으로 집착하는 고립과 사랑을 동시에 갈망한다. 주아나에게 있어서 이 모순의 열쇠가 남편 오타비우에게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일찍 주아나를 떠났거나, 혹은 그녀를 불신했던 사람들. 끊임없이 종말을 향해 가는 주아나가 그들에게 바랐던 것은 그녀가 겉으로 드러내는 바와는 다르게 신뢰와 관심이었다. 주아나는 끊임없이 삶을 살아가기를 열망했다. 오타비우는 주아나를 떠나면서 작별을 고하는 편지를 남기는데, 그 편지에는 돌아올테니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긴다. 그는 정말 돌아올 생각이 있었을까?  


ㅡ 


소설에는 주아나가 해리성정체장애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되는 부분이 꽤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악과 강인한 힘과 세상을 향한 차가운 복수를 갈망하는 주아나, 다른 한편에는 여성스러우며 단단한 애정을 통해 평온하고 따뜻한 삶을 소망하는 주아나.   


삶의 고리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 연결이 늘 행복과 만족이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어느 누구의 인생도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다. '난 계속해서 삶의 고리들을 열고 닫으며, 그것들을 내던지고, 시들고, 과거로 가득 채워진 채, 새로 시작한다 (p160)'.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숙명 아니던가.   


그녀가 찾아다녀야할 존재는 진심으로 사랑을 주고 받을 '연인' 혹은 어떤 대상이기 전에 스스로를 사랑해주어야만 하는 '그 자신' 아닐까.   


책을 덮으면서 주아나, 그녀의 소리없는 절규가 들리는듯 했다.
살고 싶다, 강하고 아름답게.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돌프의 사랑 문지 스펙트럼
뱅자맹 콩스탕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3.
나는 여전히 불안하게, 엘레노르는 여전히 슬프게, P 백작은 여전히 우울하게. 



위의 발췌문이 아돌프와 엘레노르의 전반적인 감정선이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이 소설을 짐작할 수 있다. 







   
아돌프의 일방적인 애정 공세로 시작된 사랑은 점차 상호관계로 흘러간다. 아돌프는 엘레노르가 자신과 비슷한 성향과 처지에 놓여 있어 동질감을 느껴왔었는데, 그와 상호작용을 한 이후로 엘레노르가 점점 외향적으로 바뀌어어가자 불만을 터뜨린다. 아돌프는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만이 진정성 있다고 설득하며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막아서는데, 아돌프는 본인이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의 약점을 잡아 가스라이팅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관계가 시간이 흐를수록 입장이 바뀌어간다는 것이다. 아돌프의 욕망과 이기심, 엘레노르의 불안과 죄책감은 부적절한 두 사람의 관계에 끊임없이 충돌을 만들어낸다. 그것도 연애를 시작한 직후부터.


아들프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양 행세한다. 그녀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강조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자식과 스스로에게 지운 엘레노르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아돌프는 엘레노르가 자신과의 만남에 죄의식과 불편함을 느낄수록 그녀의 도덕성을 신성시하며 엘레노르를 향한 사랑에 더 불타오른다. 이러한 아돌프의 모순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아돌프는 엘레노르의 애원에 6개월간의 체류 연장을 부탁하고, 아버지는 의외로 아들의 요청을 승낙했다. 그런데 체류를 허가한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아돌프는 기쁨보다는 이 불편함과 답답함을 여섯 달이나 더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스러워한다. 매사 이런 식이다보니 아돌프의 이중성은 독자로 하여금 분노를 유발시킨다는.  


아무튼 끊임없이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는 연인은 행복을 가장하며 관계를 지속시킨다. 혹여 이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다고 하더라도 이 모습이 그들의 미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P 백작이 아돌프와 관계를 끊으라고 명령하자 엘레노르는 아예 집을 나와버렸다. 물론 그녀는 아돌프에게 아무런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자신은 그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이와 같은 결정은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생각이 나눠진다. 엘레노르가 속사포같이 쏟아낸 말들은 진심일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 급조한 변명인지, 아니면 아돌프와의 관계를 통해 자아감을 각성한 것인지... .


P 백작과의 별거로 엘레노르는 10년에 걸쳐 쌓아온 헌신과 정절의 결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자식을 버린 비정하고 헤픈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했으며 뭇 남성들의 노골적인 흑심에 노출됐다. 결국 그녀는 평생 동안 노심초사하며 조심했던 수렁에 스스로를 빠트린 셈이다. 여기에서 연인이 선택한 방법은 '모른 척 하기'였다. 괴로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의지하고 위로해야하는 상황에서 서로를 비난하고 상처를 남기게 될까봐 침묵을 선택한 두 사람에게 감정적 연대란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아돌프는 자신을 선택한 엘레노르를 혐오하기까지 한다. 비밀과 가식으로 겨우 관계를 이어가는 그들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   


두 사람의 도피는 계속 이어진다. 도망치듯 살아온 3년여의 시간 뒤에 아돌프에게 남은 것은 애틋한 추억도, 절절한 사랑도 아닌 후회였다. 사랑은, 엘레노르는, 이제 그에게 있어 멍에에 불과했다. 아돌프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서 넘어야할 장벽은 엘레노르다. 그러나 정작 그가 넘어야할 것은 그 자신이 아닐까. 제 인생 어느 것 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아버지, 애인, 주변 시선에 의해 휩쓸리는 주제에 엘레노르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공평한 세상에 맞서 언감생심 그녀의 기둥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겠다는 말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똑똑한 척은 다 하지만 제 분수와 깜냥을 모른다고 할 밖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돌프는 엘레노르를 원망했고, 그녀에 대해서는 권태와 연민만이 남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과 감정, 관계만 소비하고 있다. 아돌프의 결정적인 잘못은 엘레노르에 대한 감정이 의무감에 의한 동정만 남아 있을 뿐 사랑의 감정은 조금도 없다는 고백을 연인의 친구에게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친구를 통해 전해들은 엘레노르의 분노는 둘째치고 아돌프는 연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꼴이다. 


적어도 이들 사랑에 있어 용기 있는 사람은 엘레노르였다. 스스로 둘러쳤던 장벽을 벗어난 순간부터 그녀는 오롯이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충실했다. 아이를 버린 비정한 어미라고 손가락질 받았으나 남편이 아이를 사랑으로 책임감 있게 돌볼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상당한 재산 증여도 과감하게 포기했으며, 바닥으로 끌어내려진 모욕과 평판을 감수했다. 그러나 그들 사랑에, 아돌프는 단 한 가지도 버리지 못했고, 지키지도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처지와 장래에 대한 소망을 들먹이며 헤어져 달라고 간청하며 끝까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아돌프가 비겁하고 치졸하게 느껴지는 더 큰 이유는 엘레노르의 불행은 관습과 사회적 시선에 대항해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랑, 그 하나만으로는 사회에서 작용하는 굴레와 운명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돌프가 모를 리 없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강자가 약자에게 가해자 프레임을 씌우며 벼랑에서 밀어버린 격이다.  


ㅡ 


이토록 현실적이고 냉절하며 이성적인 치정소설이라니! 읽다보면 <마담 보바리>가 생각날 수 있으나 결이 확연히 다른 두 작품이다. 공통점이라면 무모하리만큼 사랑에 충실하고 그 책임을 다 한 사람은 여성이라는 것인데, 쓰다보니 어쩌면 더 절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불현듯 든다.  



작가의 직업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소설 곳곳에서는 작가의 정치적 감각이나 성향이 나타난다. '속물적인 패들이 도덕이나 관습이니 종교니 하는 것에 관해 이론의 여지조차 없을 만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 진부한 견해들을 마치 오랜 사색 끝에 찾아낸 가설이라도 되는 듯이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그런 꼬락서니를 면박하고 싶어서 욕지기가 날 지경이다.(...) 오로지 그들이 확신하는 그 우둔한 신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외도 없을 만큼 당연하고 약간의 견해차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자명한 일반론을 듣다 보면, 무언지 모를 본능적인 반발심이 솟아나 그것들을 경계하라고 나에게 속삭이는 듯했다.(p2-23)'. 이 부분의 앞뒤를 읽다보면 정치 구조 특히 입법을 맡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다. 이외에도 두 연인의 관계가 현대 사회의 정치적 구도와도 비슷해 보이는 점이 꽤 많다. 


이 소설, 엉뚱한 지점에서 흥미롭고, 적은 분량에도 할 말이 많은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마의 시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8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3.
악은 혈관 속에 날카로운 한 조각의 얼음을 남기고, 그것이 서서히 움직여 마침내 심장을 찌르는 것일까? 
 







지브릴이 천사의 눈으로 본 도시의 실체는, 주류자들의 지역은 두려움과 허영과 경멸의 집약체였고, 가난한 자들의 거처는 혼란과 물질적인 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썩은 영혼이 도사리고 있고, 도시는 온통 거짓 뿐이다.  


지브릴은 도시에 자리잡은 완강한 악의 힘을 실감하고 널리 선을 펼치겠다고 결심하며 부패한 도시를 차례대로 구원하리라 마음 먹지만, 그의 예상만큼 순조롭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외모와 입성이 노숙자 몰골이 되어가는 지브릴. 악은 천사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지브릴 앞에 나타난 사나이 바알은 지브릴을 마훈드라고 부르며 질문을 던진다. '너는 어떤 존재인가?'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든 타협하고 거래하고 순응하며 살아남으려 하는가, 아니면 휘어지느니 부러지는 쪽을 택하겠는가. 지브릴은 이 질문 자체가 속임수라고, 신 이외의 신은 없으니 타협 따위는 없다고 단언하며 자신이 하나의 시험을 이겨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점은 지브릴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한 이들이 레카, 알리 등 여성이라는 점이고,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비행 능력을 되찾는다. 소설에서는 성적 욕망에 대해 지속적으로 언급하는데, 이것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ㅡ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쇠퇴한 자힐리아에서 절대적 군주이자 폭군으로 군림하는 힌드의 모습은 마치 가난한 백성의 삶에는 무관심하며 여성을 비롯한 약자를 억압하고, 왜곡시킨 '신의 이름'을 이용해 사람들을 세뇌시키며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을 겨냥한 듯 보인다. 힌드는 여성인데, 1권에서 이맘이 망명지에서도 혁명군이라 일컫는 반정부 세력을 주도하는 장면에서 특이한 점은 이맘의 고국을 통치하며 종교적.정치적 지도자인 그를 추방한 사람은 여왕 아예샤다. 이맘은 아예샤를 폭군이자 부도덕한 자로 단정한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마훈드와 지브릴은 동일시된다. 마훈드는 율법에 집착하는데, 섭생과 용변, 가려워도 절대 긁으면 안 되는 신체 부위 등 인간의 일생 전반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 아주 사소한 것까지 규정이 따른다. 페르시아인 이민자이자 마훈드의 제자 살만은 도무지 이를 납득하지 못한다. 도대체 인간에게 평화를 안겨주어야 할 신이 요구와 조건이 이렇게 많다니, 그는 마훈드에 대한 믿음을 잃는다. 이 대목에서 결정적인 부분은 마훈드가 지브릴에게서 먼저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마훈드가 먼저 율법을 정해버렸고 천사는 나중에 나타나 이를 확인해 준다는 대목이다. 즉, 신성한 말씀은 신(대천사)의 계시가 아닌 마훈드 개인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살만이 마훈드와 결별하게 된 이유는 여자 문제와 '악마의 시' 때문이었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들이 못마땅해 율법을 통해 여성들을 순종과 복종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훈드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내용도 한마디로 제 뜻대로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부유한 아내의 경제적 능력 덕을 톡톡히 본 예언자가 왜 여성을 종속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켰을까를 따져본다면 루슈디의 의문은 타당하지 않을까.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이러한 지적들은 이슬람교도들을 충분히 자극시킬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살만의 대사는 마치 작가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장章에서 바알을 통해 여성이 수동적으로 변해과는 과정을 서술한 부분도 꽤 흥미롭다. 


"어째서 그가 자네를 죽일 거라고 확신하지?"
"그의 '말씀'이 옳으냐 내 말이 옳으냐하는 상황이니까." 


ㅡ 


어쩌면 살만 루슈디는 이슬람교와 코란이 아닌 이를 왜곡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그릇된 관습을 만들어간 사람들을 비판했던 건 아닐런지. 지브릴은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신앙을 잃었다. 자신이 그동안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해서 죄책감도 없는 그는 자신이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죽을 뻔 했다는 사실에 분노해 신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신이 있음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대립과 반목하고, 그로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얘기한 건 아닌가싶기도 하고.  


지니는 자신의 정체성을 강하게 부정하고 폄하하는 살라딘에게 처음부터 죽어있었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충고한다. 소설은 수피안 가족을 통해 인종주의와 이민자의 상실감에 대해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하는데, 이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살라딘의 선택과 같은 선상에 있다.  


ㅡ 


소설에서 뱀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유는 '질문' 때문이다. 악은, 고통은, 죽음은 왜 있는지, 그럼으로써 신을 판단해서 쫓겨났다. 결국 천사든, 악마든 순종을 강요한다. 천사들조차 동료와 구원받아야할 영혼을 조롱하고 질투하고 비웃으며, 권력과 계급의 욕망에 의해 타락한다. 이 정도면 천사와 악마를 구분하는 경계는 무엇일까? 살라딘의 깨달음처럼 나쁜 짓을 하고도 벌을 받지 않는 자들이 악마일까? 


신은 모든 것을 알아서 한다고 했지만, 인간들은 대천사의 존재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인간 이외의 생명체를 향해 온갖 폭력을 휘두르며 지상의 주인이 되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 보자. 과연 인간 세계에서 신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 


루슈디는 살라딘을 통해 지브릴이 출연했던 영화와 그들이 경험했던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몽상에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은 종교와 이념을 가리지 않고 악마가 판을 치는 지옥같은 세상임을 얘기한다. 타고난 계급으로 특정 신분을 억압하고, 서로 다른 종교와 민족을 겨냥해 학살을 일삼으며, 인종과 여성과 이민자를 차별하는 사회 등 점점 선과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잔혹성을 더해가는 세태를 신랄하게 파헤치며 겨냥한다.  


과연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마술 램프는 무엇일까? 진부하게도 서로에 대한 사랑, 그리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다. 죽음이 참혹한 비극이 아닌 다음 세대의 새로운 삶을 환하게 비추는 빛이 되어줄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이 긴 이야기를 통해 루슈디가 하고자했던 말이 아닐까. 


길고 긴 한 편의 익살극 같은 이 소설의 완벽한 반전은 제9부에서 드러난다. 읽다보면 다소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일단 읽으시라. 완독하는 순간 그 난해함은 해결된다. 










144.
"사람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야. 그러니까 전문적인 거짓말쟁이는 돈을 잘 벌기 마련이지. 내가 쓴 연애편지나 업무용 통신문은 시내에서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는데, 그건 진실을 아주 조금만 왜곡시켜 멋진 거짓말을 꾸며내는 재간 덕분이지. 그래서 겨우 이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했어. 고향! 그리운 조국 땅! 내일 출발할 거야. 그동안 참 용케도 버텼지." 


177.
"악마는 왜 찾아, 인간이 곧 악마인데?"
"천사는 왜 찾아, 인간도 천사를 닮았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웰의 장미 -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
리베카 솔닛 지음, 최애리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53.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단 하나뿐인 이 지상에서의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조지 오웰) 



오웰의 삶(가계를 포함한)의 궤적과 그의 문학 작품 및 비문학 글들을 관통하면서 동시에 전쟁, 정치, 이념, 사조, 자유, 산업, 환경, 오염, 기후, 노동, 여성, 인권, 예술, 문화, 생물, 과학, 농업, 식민주의 그리고 문학 등 근대를 지나 1900년대 초중반, '오웰의 시대'의 전반적인 사회 구조를 탐구한다. 스페인 내전을 비롯해 스탈린 독재에 대한 비판은 현재 스탈린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 러시아의 권위주의적 지도자에게까지 이어지며 신자유주의 시대에 나타나는 전체주의와 여성 노동, 새롭게 대두되는 산업 식민까지 짚어내려간다.   










조지 오웰의 삶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보어전쟁 직후에 태어나 사춘기에 제1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20대에는 러시아 혁명과 아일랜드 독립전쟁, 30대 이후에는 스페인내전에 참전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습 동안 런던에 살았으며, 1945년에는 '냉전'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다. 1950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삶은 세상에 존재하는 극악한 위협과 대립을 관통했다. 


오웰은 버마 주재 대영제국 경찰로 5년간 복무한 경험을 통해 하류 지향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는 소년 시절의 자신에 대해 "나는 속물이자 혁명가였다. 모든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나는 막연히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노동계급도 인간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오웰의 고백은 소설 <엽란을 날려라>에 잘 드러난다.  


거의 평생동안 오웰을 괴롭혔던 호흡기 질환은 오히려 그에게 삶을 더 열심히 살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언제든 죽을 수 있음을, 그리고 생각보다 죽음이 가까운 데에 있음을 상기했을 때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갈까?  


ㅡ  


오웰은 '나무를 심는 것, 특히 오래가는 단단한 나무를 심는 것'은 큰 수고와 비용을 들이지 않고 후세에 해줄 수 있는 선물이라고 자신의 에세이에 썼다. 그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으로써 당장의 사회 변화를 넘어 후대에 미칠 영향까지 확장해 말하고 있다. 여기에 솔닛은 씨앗이 인류를 비롯한 많은 다른 종들의 주된 먹이이자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발달 시켰음을 상기시키며, 조지 오웰이 장미를 심는 것으로 두 가지의 시간을 살았듯, 인간 대부분이 마찬가지임을 말한다. 정치적 행위자로서, 시민으로서, 개별적 정신의 소유자로서, 또한 동시에 생육하는 생물학적 독립체로서 필멸의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을. 


솔닛은 이 책에서 오웰이 열정적인 자연애호가였음을 얘기하는데, 도시가 아닌 시골 생활을 하면서 나무와 꽃을 심고, 닭을 키우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평소 우리가 접했던 오웰을 떠올려볼때 상당히 의외의 면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솔닛의 지적을 따라가다보면 독자가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짚어낸다. 오웰에게 있어 일기에 써내려간 기록은 문학적 가치나 감정적.창조적 삶의 기록이 아닌 단지 노동과 작업 계획을 담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렇지만 글 쓰는 본업 외에 가장 좋아했다던 정원과 텃밭 가꾸기,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애정은 오롯이 전해진다. 



비정치적인 문학은 없으며, 모든 예술은 어느 정도 프로파간다라고 말한 것처럼 오웰은 인간 사회에서 정치는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지만, 예술이나 예술가가 특정 정당이나 국가의 의제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의제에는 미학적 경험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솔닛은 오웰이 글을 쓰는 것으로써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평등과 민주주의, 언어의 명확성과 의도의 정직성, 사생활과 그 모든 즐거움과 기쁨, 정치적 자유와 침범받지 않는 프라이버시, 즉각적 경험의 즐검움이라고 말한다. 그의 암울한 글에도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다고 말하는데, 문득 삶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든다.  


오웰의 시대에는 자연 세계가 사회적 및 정치적인 것과는 연관이 없거나 혹은 경우에 따라 하찮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오웰은 모든 예술이 프로파간다이듯 자연도 예외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을 증명하듯 현재 기후 위기는 그 자체로써 논의되기보다는 경제적 측면과 맞출린 정치적 싸움이라고 할수 있다. 더하여 이는 또 다른 식민주의의 양태를 보여준다. 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장미(산업)도 예외가 아니다. 


잠깐 벗어나서, 오웰의 가계를 되짚어 올라가 보면 그는 제국의 하수인이자 제국주의 사업에서 혜택을 누렸던 식민자의 후손이다. 자신의 집안 내력과 성을 혐오해 필명으로 바꾼 점이나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식민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 납득이 된다. 


ㅡ 


솔닛은 오웰이 어떠한 암울한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칭송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극단의 절망적인 소설 <1984>에서 조차도 말이다. 어쩌면 오웰은 가장 냉철한 시선과 문장으로 글을 쓰지만 종단에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정치든 예술이든 문화든 간에. 


솔닛의 시선에서 오웰이 장미를 심는 것은 자신의 사상에 뿌리를 내리는 것과 다름하지 않다. 이는 양날의 칼과도 같아서 관념과 자유에서 온전히 하나를 털어낼 수 없는 보편적 딜레마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솔닛은 형식은 기능과 분리되지 않으며, 아름다움 또는 추악함이란 그저 외관보다는 그 의미, 영향, 함의 등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만연한 전일성integrity의 결여를 짚는다. 


솔닛은 책을 마치면서 우리가 오웰이 이룩한 성과를 더욱 심오하게 만드는 길은 그가 소중히 여기고 욕망했던 것들이 전체주의의 국가의 영혼을 파괴하는 침식력에 반대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라고 강조한다.   


ㅡ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장미는 인간의 존재와 욕구가 재화 및 여건 등의 물리적으로 환원되는 것에 그치지 않음을 상징한다. 속된 말로 인간은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욕망들을 내재하고 있는며 훨씬 더 심오하고 섬세한 존재라는 것. 나무와 장미를 심고 정원을 가꾸는 행위가 의미하는 바(산업적 행위가 아닌)는 단순하지 않다. 이는 우리의 손상된 부분을 복구하는 행위이면서 미래에 기여한다.  


이 책에 실린 오웰의 일기를 사이사이 읽다보면 그가 식물을 관찰하는 시선에서 섬세함과 다정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아내 아일린의 무덤을 돌아보러 갔을 때 쓴 일기에서는 무덤의 주변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잘 살아나기를 바람하는 그의 모습이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전체주의 혹은 강대국의 이기주의에 위협받는 인류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나무들은 인간의 영욕의 삶을 모두 지켜보며 훨씬 더 긴 시간동안 살아남는다. 세대를 이어 함께 살아갈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미래를 맞이할지는 결국 우리 각각의 사람들이 할 일임을, 솔닛은 말하고 있다.   




※ 출판사 지원도서 _ 솔닛 북클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