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의 사랑 문지 스펙트럼
뱅자맹 콩스탕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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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나는 여전히 불안하게, 엘레노르는 여전히 슬프게, P 백작은 여전히 우울하게. 



위의 발췌문이 아돌프와 엘레노르의 전반적인 감정선이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이 소설을 짐작할 수 있다. 







   
아돌프의 일방적인 애정 공세로 시작된 사랑은 점차 상호관계로 흘러간다. 아돌프는 엘레노르가 자신과 비슷한 성향과 처지에 놓여 있어 동질감을 느껴왔었는데, 그와 상호작용을 한 이후로 엘레노르가 점점 외향적으로 바뀌어어가자 불만을 터뜨린다. 아돌프는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만이 진정성 있다고 설득하며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막아서는데, 아돌프는 본인이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의 약점을 잡아 가스라이팅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관계가 시간이 흐를수록 입장이 바뀌어간다는 것이다. 아돌프의 욕망과 이기심, 엘레노르의 불안과 죄책감은 부적절한 두 사람의 관계에 끊임없이 충돌을 만들어낸다. 그것도 연애를 시작한 직후부터.


아들프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양 행세한다. 그녀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강조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자식과 스스로에게 지운 엘레노르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아돌프는 엘레노르가 자신과의 만남에 죄의식과 불편함을 느낄수록 그녀의 도덕성을 신성시하며 엘레노르를 향한 사랑에 더 불타오른다. 이러한 아돌프의 모순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아돌프는 엘레노르의 애원에 6개월간의 체류 연장을 부탁하고, 아버지는 의외로 아들의 요청을 승낙했다. 그런데 체류를 허가한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아돌프는 기쁨보다는 이 불편함과 답답함을 여섯 달이나 더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스러워한다. 매사 이런 식이다보니 아돌프의 이중성은 독자로 하여금 분노를 유발시킨다는.  


아무튼 끊임없이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는 연인은 행복을 가장하며 관계를 지속시킨다. 혹여 이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다고 하더라도 이 모습이 그들의 미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P 백작이 아돌프와 관계를 끊으라고 명령하자 엘레노르는 아예 집을 나와버렸다. 물론 그녀는 아돌프에게 아무런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자신은 그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이와 같은 결정은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생각이 나눠진다. 엘레노르가 속사포같이 쏟아낸 말들은 진심일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 급조한 변명인지, 아니면 아돌프와의 관계를 통해 자아감을 각성한 것인지... .


P 백작과의 별거로 엘레노르는 10년에 걸쳐 쌓아온 헌신과 정절의 결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자식을 버린 비정하고 헤픈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했으며 뭇 남성들의 노골적인 흑심에 노출됐다. 결국 그녀는 평생 동안 노심초사하며 조심했던 수렁에 스스로를 빠트린 셈이다. 여기에서 연인이 선택한 방법은 '모른 척 하기'였다. 괴로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의지하고 위로해야하는 상황에서 서로를 비난하고 상처를 남기게 될까봐 침묵을 선택한 두 사람에게 감정적 연대란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아돌프는 자신을 선택한 엘레노르를 혐오하기까지 한다. 비밀과 가식으로 겨우 관계를 이어가는 그들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   


두 사람의 도피는 계속 이어진다. 도망치듯 살아온 3년여의 시간 뒤에 아돌프에게 남은 것은 애틋한 추억도, 절절한 사랑도 아닌 후회였다. 사랑은, 엘레노르는, 이제 그에게 있어 멍에에 불과했다. 아돌프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서 넘어야할 장벽은 엘레노르다. 그러나 정작 그가 넘어야할 것은 그 자신이 아닐까. 제 인생 어느 것 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아버지, 애인, 주변 시선에 의해 휩쓸리는 주제에 엘레노르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공평한 세상에 맞서 언감생심 그녀의 기둥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겠다는 말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똑똑한 척은 다 하지만 제 분수와 깜냥을 모른다고 할 밖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돌프는 엘레노르를 원망했고, 그녀에 대해서는 권태와 연민만이 남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과 감정, 관계만 소비하고 있다. 아돌프의 결정적인 잘못은 엘레노르에 대한 감정이 의무감에 의한 동정만 남아 있을 뿐 사랑의 감정은 조금도 없다는 고백을 연인의 친구에게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친구를 통해 전해들은 엘레노르의 분노는 둘째치고 아돌프는 연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꼴이다. 


적어도 이들 사랑에 있어 용기 있는 사람은 엘레노르였다. 스스로 둘러쳤던 장벽을 벗어난 순간부터 그녀는 오롯이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 충실했다. 아이를 버린 비정한 어미라고 손가락질 받았으나 남편이 아이를 사랑으로 책임감 있게 돌볼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상당한 재산 증여도 과감하게 포기했으며, 바닥으로 끌어내려진 모욕과 평판을 감수했다. 그러나 그들 사랑에, 아돌프는 단 한 가지도 버리지 못했고, 지키지도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처지와 장래에 대한 소망을 들먹이며 헤어져 달라고 간청하며 끝까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아돌프가 비겁하고 치졸하게 느껴지는 더 큰 이유는 엘레노르의 불행은 관습과 사회적 시선에 대항해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랑, 그 하나만으로는 사회에서 작용하는 굴레와 운명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돌프가 모를 리 없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강자가 약자에게 가해자 프레임을 씌우며 벼랑에서 밀어버린 격이다.  


ㅡ 


이토록 현실적이고 냉절하며 이성적인 치정소설이라니! 읽다보면 <마담 보바리>가 생각날 수 있으나 결이 확연히 다른 두 작품이다. 공통점이라면 무모하리만큼 사랑에 충실하고 그 책임을 다 한 사람은 여성이라는 것인데, 쓰다보니 어쩌면 더 절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불현듯 든다.  



작가의 직업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소설 곳곳에서는 작가의 정치적 감각이나 성향이 나타난다. '속물적인 패들이 도덕이나 관습이니 종교니 하는 것에 관해 이론의 여지조차 없을 만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 진부한 견해들을 마치 오랜 사색 끝에 찾아낸 가설이라도 되는 듯이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그런 꼬락서니를 면박하고 싶어서 욕지기가 날 지경이다.(...) 오로지 그들이 확신하는 그 우둔한 신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외도 없을 만큼 당연하고 약간의 견해차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자명한 일반론을 듣다 보면, 무언지 모를 본능적인 반발심이 솟아나 그것들을 경계하라고 나에게 속삭이는 듯했다.(p2-23)'. 이 부분의 앞뒤를 읽다보면 정치 구조 특히 입법을 맡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다. 이외에도 두 연인의 관계가 현대 사회의 정치적 구도와도 비슷해 보이는 점이 꽤 많다. 


이 소설, 엉뚱한 지점에서 흥미롭고, 적은 분량에도 할 말이 많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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