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심장 가까이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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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행복해지는 건 무얼 위한 거예요?"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 초독 당시 오십 여 페이지를 읽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진정한(?) 의식의 흐름대로 쓴 소설이었는데, 그 작품을 능가하는 '의식의 흐름'이 등장했다. 


이 소설은 3인칭시점으로서 주아나, 오타비우, 리디아 각각의 관점에서 서술하며, 세월의 순서대로 전개하지 않고 무작위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고간다  









이른 나이에 죽은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와의 짧은 삶, 숙모집에 얹혀 살았던 날들, 사는 법을 가르쳐 준 선생님, 사춘기, 기숙학교, 오타비우와의 결혼. 주아나가 살아온 길이다.  


숙제도, 혼자 놀이도 다 했다. 끊임없이 아빠에게 "나 뭐 해요?"를 묻는, 살아있는 작은 알 같은, 너무 마르고 조숙한 아이. 그녀를 세상 속에서 지탱해 주는 건 연민이다. 연민은 주아나 방식의 사랑이고 증오이고 소통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공포와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무기력함을 순순히 인정했고,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고난 혹은 고통스러운 경험의 정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은 크나큰 상실과 슬픔이었고 무거운 피로였다. 자신을 향한 숙모의 동정심을, 그리고 앞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동정심을, 그녀는 혐오했다.  


주아나는 자신의 유년시절이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을 향한 섬뜩한 폭언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제 뺨을 때리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것으로 불행을 상쇄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묻는 선생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소녀는 선은 사는 것이고, 악은 살지 않는 것이며, 죽음은 선악과는 다른 거라고 대답한다. 이렇듯 소녀는 살아야할 명분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학교 선생에게 느끼는 감정, 2차 성징 시작, 육체적 갈망. 주아나는 삶 자체를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고독 속에 던져놓는다. 그녀 자신조차 무엇을 갈망하는지 명명하지 못한다. 그녀가 고독 안에서도 귀를 기울인 건 내면의 행복. 주아나는 행복했던 순간 순간을 잊어선 안 된다고 되뇌이지만, 늘 잊는다. 주아나 뿐이랴. 모든 인간이 그렇다. 


ㅡ 


오타비우는 주아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발가벗은 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끌렸다. 매혹적인 혐오감을 느끼면서. 인간의 관계 맺기에 큰 신뢰가 없는 주아나. 여기에는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고 타인들과의 결속에서 과감하게 벗어나기는 어렵다. 주아나는 거짓된 사랑, 사랑하지 못하는 혹은 사랑받지 못하는 두려움에서 자유롭고 싶다. 고통을 감수하고 매일매일 순간순간 각성했으나, 오히려 더 깊이 가라앉는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목표 또는 목적한 바대로 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끼다가 막상 마지막 관문을 눈앞에 두었을 때 오는 왠지 모를 두려움과 불안,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닥치면서 막상 그것에 도달한 후 밀려오는 주체할 수 없는 허무감. 어쩌면 이 거추장스러운 감정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것이 인간의 숨겨진 욕망이 아닐까.  


ㅡ 


오타비우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약혼녀 리디아를 저버리고 만난지 얼마 안 된 주아나와 결혼했다. 리디아는 오타비우가 떠나는 걸 원하지 않지만, 떠난다고 해서 두렵지는 않다고 말한다.  


약혼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떠난다해도, 그 이별이나 약혼자의 다른 여자와의 사랑까지 먼 훗날에 공유하게 될 소재에 불과하다는, 어떻게 되건 전 약혼자의 삶에 참여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사랑인가, 집착인가, 미련인가. 아니면 그와의 사랑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절대적 운명이라는 믿음인가. 자신이 그 흔적을 간직할 것이기에 그가 자신과 함께 한 순간을 잊어버리더라도 상관없다는 리디아의 말. 어떻게 하면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지?  


리디아의 힘이 '확신'에 있다면, 주아나의 힘은 '부정확성'에 있다. 주아나는 리디아가 평생 품었던 '작은 가족'에 대한 소망을 비웃는다. 결혼은 불행할 자유와 권태와 고독조차 허락하지 않는, 공동의 죽음을 향하는 것이라고. 자기가 결혼을 한 이유는 '오타비우가 원했기 때문'이며 자신은 오타비우의 생물적인 몸으로서만 그를 원한다고, 리디아에게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리디아는 알게 된다. 주아나는 아직 진정으로 사랑을 한 적이 없고, 사랑을 통해 깨달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주아나가 갖는 사랑에 대한 갈망은 고통보다 더 우위에 있지만, 오타비우와 리디아는 그녀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도구로써 같은 선상에 있다. 더구나 사랑이 삶을 연장시키는 수단이 되기에 주아나는 태생적으로 집착하는 고립과 사랑을 동시에 갈망한다. 주아나에게 있어서 이 모순의 열쇠가 남편 오타비우에게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일찍 주아나를 떠났거나, 혹은 그녀를 불신했던 사람들. 끊임없이 종말을 향해 가는 주아나가 그들에게 바랐던 것은 그녀가 겉으로 드러내는 바와는 다르게 신뢰와 관심이었다. 주아나는 끊임없이 삶을 살아가기를 열망했다. 오타비우는 주아나를 떠나면서 작별을 고하는 편지를 남기는데, 그 편지에는 돌아올테니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긴다. 그는 정말 돌아올 생각이 있었을까?  


ㅡ 


소설에는 주아나가 해리성정체장애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되는 부분이 꽤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악과 강인한 힘과 세상을 향한 차가운 복수를 갈망하는 주아나, 다른 한편에는 여성스러우며 단단한 애정을 통해 평온하고 따뜻한 삶을 소망하는 주아나.   


삶의 고리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 연결이 늘 행복과 만족이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어느 누구의 인생도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다. '난 계속해서 삶의 고리들을 열고 닫으며, 그것들을 내던지고, 시들고, 과거로 가득 채워진 채, 새로 시작한다 (p160)'.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숙명 아니던가.   


그녀가 찾아다녀야할 존재는 진심으로 사랑을 주고 받을 '연인' 혹은 어떤 대상이기 전에 스스로를 사랑해주어야만 하는 '그 자신' 아닐까.   


책을 덮으면서 주아나, 그녀의 소리없는 절규가 들리는듯 했다.
살고 싶다, 강하고 아름답게.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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