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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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읽는 비비언 고닉의 책이다. 
일전에도 읽으면서 느낀점이지만 나이, 문화, 성장 배경, 살고 있는 도시와 환경이 다른데 어쩜 이렇게 찰떡 공감을 자아내는지 신기할 정도다. 








도입부에서 레너드와의 우정에 대한 짧은 이야기로 이 책을 시작하는데 이미 훅 이입이 되더라는. 나는 저자가 레너드를 대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고. 어떤 대상을 절친이라고 여기지만(물론 상대와는 별개로 나만의 생각이다), 시도때도 없이 과하게 자주 만나는 것은 주춤하게 되는 그 마음. 너무 잘 알지.  


우정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고하면서 하나는 서로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관계고, 다른 하나는 활기가 있어야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라고 말한다. 친구들과 주변의 지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봤는데, 일리 있는 말이다. 사람마다 관계를 맺는 데에 미묘하게 조금씩 다르다는 생각이 예전부터 들어더랬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 차이를 잘 이해하면 좋은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일테고.  



한 에피소드가 끝나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책 한 켠에 연필로 살짝 메모해 놓은 문구들. 
누군가를 도와주려면 제대로 도와야지, 햄버거에 탄산을 빼먹는 건 반칙이지, 암.
삶에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나아가는 것 뿐, 내 뒤에 누군가가 있을텐데 뒤로 갈 수는 없지 않나. 잠시 쉬어가는 건? 당연히 괜찮지.
조언을 해주는 것 이상으로 조언을 듣는 것 역시 그 사람의 인격에 달려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세상 일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겸손해야 하는 거고.
인생은 어차피 고독한 거야, 너나할 것 없이.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이디스 워튼, 아무도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는 헨리 제임스. 누구의 말에 더 동감하지? 


ㅡ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평생 내적으로 분열된 상태에 있다. 성장하길 원하는 동시에 성장하지 않길 원하고,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폭력으로 실현되는 정의구현에는 박수를 보낸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고통 그 자체는 아픔의 원친인 동시에 안도감의 원천이다. 정의와 원칙을 수호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것이 나에게 작은 불편함이라도 끼치게 된다면 얘기는 얼마든지 달라진다. 이렇듯 우리는 심리적으로 단 한 순간도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최소한의 것만 남기도 다 덜어낸 공간에 투영된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내면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일테다. 



에피소드 중에서 가슴이 답답했던 것 하나. 버스 요금을 냈다는 노인과 그가 요금을 내지 않았다는 버스 기사가 맞서고 있다. 기사는 결국 그 노인이 요금을 내지 않아서 운행을 중단하고 승객들을 모두 하차시킨다. 난감해 하는 사람, 욕을 하는 사람, 순순히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 결국 노인이 버스 타기를 그만두고서야 다시 운행을 하는데, 그 소동이 한 시간 정도 소요됐다. 여기서 기가막힌 노릇은 아무도 노인의 버스 요금을 대신 내주는 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게 정서의 차이일까? 아무튼 나는 그냥, 한숨이 나왔다.


ㅡ 


도시는 늘 번잡하고, 자주 황량하다. 과도한 경쟁과 삭막해져가는 인심과 빠듯한 살림살이에 푸념을 늘어놓지만, 늦은밤 창가마다 켜지는 불빛이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주변인들 중에는 전원주택을 지어 외곽에 사는 것이 바람이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도시를 떠나서 살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한 번도 도시 밖에서 일상을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러니저러니해도 도시에서 살 수 밖에 없다. 


비비언 고닉의 글은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읽혀진다. 부모 세대와의 이해, 우정과 애정의 경계, 연애와 결혼, 대중 안에서의 외로움, 부모가 된다는 것, 노동자 계급 이민자들의 삶, 비혼 여성에게 향하는 편향된 시선, 노년의 쓸쓸함, 중산층에 진입하지 못한 도시 생활자의 소외감 등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책을 펼친 독자들과 닿아있다.   


늦은밤, 차 한 잔 놓고 읽는 그 기분이 참 좋더라. 




26.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지 못한 사람은 어떤 타인에게도 우정을 기대할 권리가 없다.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으뜸가는 의무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적대적일 뿐 아니라 자기를 섬기는 타인의 가장 선한 마음조차 꺼꺼어버리고 '세상에 친구 따윈 없다'며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불평까지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카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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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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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진정한 절망은 우리가 더는 말을 할 수 없을 때 일어난다.  



저자는 본인의 관점뿐 아니라 철학, 문학, 예술, 사회학 등 다각적으로 불러들여 고대부터 현대까지 각 시대의 사상가와 철학자, 그리고 문필가들의 관점을 통해 비극을 탐조한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비극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예술적 의미의 비극은 매우 구체적인 사건이고, 비극이라는 형식은 특정 문명이 역사적 순간 동안 갈등과 씨름하는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비극은 실제로 정치적 제도로서 시작됐고, 예술 차원에서 미적 감상이며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또한 공민도덕을 심는 데 도움을 주는 윤리 정치적 교육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그리고 비극은 폭넓은 정치적 역할을 해왔다. 


저자는 비극적인 정신이 근대적인 것의 탄생과 더불어 소멸한다고 말한다. 세속적인 가치, 계몽된 정치, 인간사의 합리적 운용, 우주의 궁극적 불가해성을 믿는 시대에는 비극이 살아남을 수 없으며, 비극은 공리주의적 윤리나 평등주의적 정치를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 같은 일부 근대 비평가들은 비극이 합리적 설계를 드러낸다고 주장하지만, 비극적 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에는 고통 자체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롤랑 바르트의 말들을 생각해보면 고통과 슬픔을 토해내는 비극이야말로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책에서 언급된 이들과는 달리 오히려 근대성이 비극을 망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새로 연장 및 촉진해 주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그 이유로는 인간 이성의 한계, 인간 주체의 연약함과 자기 불투명성, 익명의 타자들 속에서 개인의 무작위 노출, 힘과 자율성에 가해지는 제약, 사회질서의 복잡한 밀도와 세계화(여기에는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인터넷 등 사회 집단과 개인적 차원도 포함될 듯 하다) 등을 드는데, 이는 고대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자기 자신으로 인해 정복당할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라는 건데 기후변화나 자연 재해 등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이야말로 위기라는 발터 베냐민의 말을 들면서 조지 엘리엇이 <미들마치>에서 쓴 '반발이라는 사실 자체에 들어 있는 그 비극의 요소'를 짚는데, 이것은 우리가 해당 상황에 요구되는 감수성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조용한 절망 상태임을 얘기한다. 문득 비극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비극보다 더 암울하고 절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ㅡ 


저자는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대표적인 비극적 소재로 꼽는 근친상간이라는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개인은 주체와 객체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필연적으로  완전히 자기동일성을 이룰 수 없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늘 연기가 따르며, 이는 사람의 정체성의 한 속성이 된다고 얘기한다. 


'자신을 아는 것은 자기 동일적이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둘로 쪼개 대상으로 바꾸고 그렇게 바로 그 행동 자체로 암묵적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p68)' 즉, 자기 결정적이라는 것은 자기 동일성에 반하는 것이자 동시에 상호적이라는, 그래서 인간의 관계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동인과 동인 사이의 경계가 명확할 수 없으며, 개인의 작은 행위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짚는다. 


ㅡ 


자아와 의존이라는 이중 결정에서 상당한 비극적 갈등이 생긴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대해 캐물어봤자 돌아오는 건 본질 따위는 없으며 일관성이나 확신 없이 오락가락하는 존재일 뿐이란다. 그러나 비극을 부르는 극적 행위는 새로운 종류의 자기 이해로 가는 길을 여는, 이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한 형식이라고 저자는 얘기한다. 이렇게 읽다보면 비극은 다차원적으로 인간 세계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야망은 인간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다. 문제는 야망이 지나치게 '과잉'된다는 데에 있는데, 이는 스스로를 속박하고 자기표현에 장애가 되어 자멸하는 원인이 된다. 모든 순응에 대한 거부와 복수도 같은 맥락이고. 과잉에 제동을 걸 수 없는 것이 비극이라고 볼 수 있을까? 


18세기 전환기 무렵부터 비극에는 '비극의 철학'이라는 새로운 담론이 수반된다. 예술 자체로부터 정치적.종교적.철학적 비전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흐름은 자유를 매개로 한 법, 자연, 필연 사이의 갈등을 숙고함고 동시에 비극적 예술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위대한 비극은 혁명적 행동이자 급진적인 힘에 갈음하는데, 사회적 질서의 핵심이면서도 표현 불가능한 것을 행동으로 표현한다. 


저자는 비극에 있어 원죄는 특정한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상호 피해의 가능성은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로스메르의 말을 빌어 죄에 뿌리를 둔 대의에서 승리는 얻을 수 없지만 인간 삶이 서로 엮인 상황에서 그렇지 않은 대의가 어디 있겠냐고 묻는다. 자유가 굴레가 되고, 자기완성이 자기 혐오가 되고, 진실이 거짓에 기초하는 변증법. 이러한 모순은 우리 사회에 늘 존재하고 끊임없이 딜레마를 던진다. 


ㅡ 


비극적인 것이라는 관념은 철학으로부터 예술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등장한다. 철학이 예술과 연극으로 확장된 데에는 합리주의적 철학에 의해 비극이 죽어가고, 이에 자유와 필연 사이의 갈등이 합리적으로 정리될 수 없다해도 존재론적으로는 해소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뭔 말인가 싶겠지만, 앞뒤의 내용을 읽어보면 충분히 동감하는 내용이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해 보자면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생명이 죽어야 하고,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한켠에서는 자기 버리기와 충성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예술 작품에서 비극을 내재한 자유와 필연은 동일한 것으로, 혹은 때때로 대립적으로 구현된다. 


헤겔이 비극의 진리가 화해에 있다고 한 반면에 괴테는 화해라는 관념은 비극적 감수성에 이질적이라고 보면서 모든 비극적인 것은 처리할 수 없는 대립에 있으며 해결이 가능해지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고 말했는데, 개인적으로 괴테의 주장에 더 공감하게 된다. 헤겔식 결말은 안도감은 있지만 어딘가 감정이 절정에 도달하지 못한 채 꺼져버리는 느낌이 크다. 내 감성이 너무 '비극적'인가? 


ㅡ  


책의 1장에서는 홀로코스트나 굴라크를 비극이라고 칭하지 않고, 비극적 묘사가 될 수 없다고 썼다. 아마 극단의 강제 노동과 집단 대학살에서 우리는 어떠한 카타르시스도, 어떠한 깨우침도, 어떠한 익살도 얻을 수 없으며, 가치나 이해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비극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없을만큼 참혹하고 무참하다. 저자가 조지프 콘래드를 들면서 삶의 거짓이 파괴적인 동시에 본질적이기에 비극적이라는 말이 납득이 된다. 


내가 그동안 비극 혹은 비극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에 대한 생각들의 일부분은 전환되었다. 인간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고양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는 사실, 의기소침하고 불행한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무엇이든 비극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어쩐지 비극은 점점 사라지고 있고, 슬픔을 슬픔으로, 고통을 고통으로 드러내지 못해 숨어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되어가고 있기에, 그렇기 때문에 비극이 사라진 인간의 삶은 오히려 더 황폐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굳이 따지자면 대부분의 인생이 희극보다는 비극에 더 가깝지 않을까. 살아가기 위해 비극적 체험을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 그래서 어쩌면 비극을 다룬 예술이나 문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면하고 치유받는 것일지도... . 




236.
비극은 역사 자체보다 강력한 현상으로 거대하게 떠오른다. 비극적 비전만이 궁극적 진리의 현현으로서 인간 실존에 의미를 주입한다. 비극적 위기의 순간에만 우리에게 모든 경험적 또는 심리적 우연을 쳐낸 순수한 자아 경험이라는 특권이 주어진다. 비극 예술은 다른 아닌 '존재'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인간의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현실이 되는 것"으로, 인간 노력의 정점이며 신비한 황홀경의 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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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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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멕시코 귀족인 어머니와 폴란드 왕족인 아버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의 삶의 흔적을 담은 소설이다. 멕시코 혁명 이후 부르주아와 노동자 계층의 대립 관계, 정부의 부정부패, 여성의 사회 진출 제한 등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백인 혼혈 여성인 마리아나의 성장을 담고 있다.  







주인공 화자인 마리아나는 내성적이고 관심과 인정을 받기 위해 순종적인 태도로 끊임없이 엄마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녀의 동생 소피아는 외향적이고 반항을 일삼으며 가슴에 품은 열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는 아이다. 여성의 활동이 거의 제한된 사회에서 두 자매의 엄마인 루스는 자유분방하고 활동적인 사교 생활을 주저없이 이어갔다. 소설은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백인 혼혈인 마리아나는 멕시코인으로서 인성받지 못한다. 또한 엄마 루스 역시 프랑스인과 결혼해 교민 신분이기에 정당한 멕시코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그녀는 프랑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프랑스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더구나 멕시코 내에서는 외국 이민자들과 교민들을 혐오하며 제 나라로 돌아가기를 강하게 촉구하면서 그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예민한 루스는 부유하듯 안정을 찾지 못하고, 이러한 엄마를 좇는 마리아나 역시 루스와 마찬가지였다.  


마리아나의 흔들리는 정체성과 단단하게 쌓아지지 못한 자존감은 소설 곳곳에서 나타난다. 언제나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칭찬과 사랑에 목마르다. 누군가 그녀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면 그 사람에게 집착하기에 이른다. 현재의 자신을 사랑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스스로 미래에 무엇이 될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전혀 모르겠다고만 한다. 마리아나는 그저 사랑받고 싶은 것이 전부다.  



이 소설에서의 전환점은 신부 퇴펠의 등장이다.
마리아나가 다니는 교구에 새로 부임한 퇴펠 신부는 영성 수련회 강연에서 십대 여성들에게 높은 사회 신분의 계급적 특권 안에서 착한 여자 아이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두려 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있는 직업을 갖기 위한 공부를 하라고 집요하게 추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깊은 이해를 통해 내면의 자유와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선택해 진정한 인격체로, 분리된 개인으로서 나아가야한다고 역설한다. 퇴펠 신부는 소녀들이 받은 교육은 민중과 평등하게 연대하고 그들과 융화되지 않는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제의 모습에 마리아나는 한순간에 빠져든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마리아나를 뒤흔들고 고양시켰다. 그토록 훌륭한 신부님이 그녀의 능력과 잠재력을 믿는다지 않는가. 마리아나 인생 최대의 욕구를 채워주고 있는 신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나 곧이어 퇴펠 신부의 모순이 드러난다. 희망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간다지만, 그는 정작 위생적이지 못한 낡은 교구 성당을 견디지 못한다. 낮은 자들의 삶에 발을 딛지도 못하면서 그들을 위해, 그들의 해방을 위해 살겠다니. 또한 부르주아와 여성들을 극도로 혐오하며 이에 따른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면서, 귀족 계급인 루스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상류층 여성이 제공하는 차량을 이용하며 그 집안의 가장 행세를 하는 등 납득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인다.  


ㅡ 


마리아나와 퇴펠 신부의 대화 장면을 읽다보면 마리아나가 지적 능력과는 별개로 사회적 환경과 자신의 삶에 대해서 무지하고 수동적이라고 밖에는 보여지지 않는다. 주변의 모든 것에 한 치의 의구심이나 호기심도 없이 그저 어린애처럼 오로지 사랑과 관심과 인정만 갈구한다. 그야말로 정신 연령이 유아기에서 멈춰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더구나 수련회의 공개적인 토론장에서 옳든 그르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질문을 쏟아내는 다른 소녀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두 자매를 살펴볼때, 소피아가 주변의 변화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리아나는 타인의 시선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들이 같은 환경에 놓여있었음에도 이토록 다른 이유는 단순히 타고난 성향이나 기질이 달라서일까. 자매는 감정으로 표현하고 해결하는 방식이 다를 뿐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보여진다. 안으로 숨어드는 마리아나와는 달리 소피아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불만과 요구 사항을 격하게 표출한다. 그래서 소피아는 어린 시절에는 유난히 양육하기 힘든 아이로 그려지는데, 소피아가 어느 시점부터 그런 면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사견으로 그 이유가 알레한드로에게 있지 않을까싶다. 열한 살부터 교제 관계를 분명히 하고 청소년기에 이르는 시점까지 그 관계를 유지한 두 사람. 정서적으로 의탁할 존재가 생긴 소피아는 애착의 대상이 가족에서 연인으로 바뀐 것이고, 이를 확인하듯 이른 나이에 결혼한다.(이 점이 상당히 의외였다.)


읽는 내내 나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했던 인물은 루스다. 늘 어딘가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그녀. 얼핏 보기에 소피아가 루스와 닮은 듯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와 같은 혼란을 겪고 있는 딸은 마리아나다. 멕시코인으로서 프랑스 사회에서 정서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채 전쟁으로 인해 오랜 기간 남편의 부재를 겪었고, 고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로 이방인이 되어야했다.  


전장에서 돌아왔으나 가정을 방임한 남편 카시미로와의 단절된 정서적 교류가 회복되지 않자 퇴펠에게서 안정을 찾고자 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 루스는 정서적으로 떠돌듯 자신의 삶에 정착하지 못하고, 점점 더 무기력과 권태와 자아 상실감을 겪는다. 그런데 이같은 루스의 결핍을 알아보며 공감하는 사람이 마리아나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는 소피아일 것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인물은 루스와 마리아나가 아닐까싶다.    


ㅡ 


1932년생, 이제는 아흔 살이 된 작가의 표지 사진을 바라본다. 이 사진도 여든에 가까운 사진이 아닐까 싶다. 노년의 사진에서 지칠줄 모르고 사랑을 갈구하던 어린 소녀를 상상한다.   


제목 '아이리스'는 타말 가게의 이름으로써 소설 초반부와 마지막 장에 단 두 번 등장(그것도 각각 한 줄씩)하는데, 타말 가게는 마리아나의 유년 시절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어디에요, 엄마?'라고 묻는 마리아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지만, 그녀의 정체성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부유한다.  



​501.
마리아나의 유일한 불안, 앎을 좇는 움지임은 감격적이다. 마리아나의 방황 속에서, 미래에 예정된 고독의 씨앗이 움튼다. 루스와 프란시스카 안에, 언제나 이방인이라서 거의 감지되지도 않는 흔적을 남기는 여자들 안에 음툰 것과 같은 씨앗이다. 한 손에 쉽게 쥘 수 있을 만큼 부서질 듯 가느다란 발목에서 시작되는 작은 새의 다리, 피부에 꽃처럼 비치는 푸른 혈관. 맙소사, 이런 연약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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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페이지터너스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빛소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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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독은 완전하다.


일단, 추리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반전의 반전!
첫 번째 반전은 조금(?) 예상할 수 있었는데, 두 번째 반전에서는 그야말로 뜨악했다.
스포일러 없음. 따라서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쏟아낼 수 없어 리뷰가 심심할지도.  








늙고 가난한 홀아비 실베스트르는 숲 깊은 곳의 허름한 집에 살고 있는 은둔자다. 유산으로 젊은 시절을 여행하며 보냈던 그는 탕아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실비오라고 부른다. 늙은 그가 교류하는 사람이라고는 사촌 엘렌과 그녀의 남편 프랑수아 에라르,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이 전부다. 에라르 부부의 가정은 정겹고 따뜻하며 안락하다. 그들의 자녀들 중 실비오가 가장 아끼는 콜레트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고, 결혼 후 물랭뇌프에 자리를 잡을 예정이다.  


(도입부에 이미 복선이 있었다. 몰랐는데 리뷰를 쓰려고 다시 읽어보니 알겠더라는!) 



실비오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이런저런 직업을 가져보려 애썼으나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스스로 큰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자신의 젊은 피의 열기에 떠밀려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그 열기가 식어버린 지금, 노년을 앞둔 나이가 되어서 그때 왜 그랬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긴 행로. 돌이켜보면 다 무의미할 것 같은 방황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일까.



숨 막힐 듯한 권태감과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청춘의 욕망. 어리고 젊은 날, 나에게도 이런 욕망이 한 번쯤은 있었을 터다. 책을 읽으면서 실비오에게 마음이 갔던 이유는... . 


탕자가 되어 돌아온 고향의 땅은 그대로 있으나 임자를 달리해 더 이상 실비오의 것이 아니다. 큰돈을 벌겠다는 야심으로 성과없는 세월을 보내며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후회하지 않더라. 심지어 스무 살에 이미 현명하게 미래를 설계하고 차곡차곡 현재를 쌓아둔 이들보다 지나간 자신의 광기가 더 마음에 든다는 사람. 아마도 떠나지 않았다면 터져버릴 듯한 욕망에 억눌려 지레 죽었을테지.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 참 어려운 일이거든. 다만 지금에서야 미치도록 떠나고 싶었던 옛날의 자신이, 실비오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지독하게 고요하고 차가운 고독이 유일하게 절실한 소망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까닭에 실비오는 젊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던, 혹은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숨겨진 사실을 부모에게 대신 말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실비오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는 이 사건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도덕적으로 설교를 늘어놓으며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그에게는 그만한 열정이 없다. 실비오에게 있어 젊은이의 죽음은 그가 보아왔던 수많은 죽음 중에 하나일뿐이다. 그에게 있어 세상에는 열렬하게 예찬받아 마땅한 사람도, 극도로 분개하며 경멸해야 마땅한 사람도 없다. 그는 지루하기만 할 것 같은 그렇고 그런, 반복되는 안온한 하루가 축복이라 여긴다.  


무릇 인생이 그런 것 아닐까? 다 태워버려야만 진정될 수 있을 것 같은 열정의 시기를 거쳐 차갑게 식어버리는, 그래서 미약하게 남은 불씨를 끄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인생에 있어서 과거의 실수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도에 따라 다르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본인과 함께 했던 그 긴 세월에서 보여진 상대의 애정과 헌신을 생각한다면, 무엇보다 상대는 변하지 않았고 그 사람에 대한 본인의 인식만 바뀌었음을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묻고 싶다.
왜 미치도록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대가와 비난의 화살은 늘 여인의 몫이며, 수많은 그녀들이 시들어가는 동안 당신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떤 봄을 보내고 있었느냐고. 



음...
사실 이 소설이 이렇게까지 좋을 거라는 짐작은 하지 못했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외로웠던 유년 시절, 유대인 박해와 현상수배범이 된 아버지로 인해 부유하듯 도피 생활을 했던 청년 시절, 그리고 십 년도 채 되지 못한 행복한 시기를 지나 서른아홉 살에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된 낯선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작품보다 더 크게, 나의 관심을 차지했다. 


작품은 그녀의 삶을 투영했다는 섣부른 나의 선입견을 여지없이 부숴주었다. 어쩌면 젊은 실비오와 콜레트의 뜨거운 열기도, 그 열기가 꺼져 차갑게 식어버려 세상 일에 무심해진 나이든 실비오의 고독도, 모두 이렌 니메롭스키의 가슴 안에 담겨져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길지 않은 이 소설에는 사랑, 젊음, 열정, 고독, 신뢰 등을 모두 담고 있다. 반전에 놀란 마음의 크기만큼 가슴 한 켠에는 그들의 고통에, 나는 헛헛해진다. 




23.
나는 내 집이 좋다. 불이 사그라든다. 불이 더는 놀지 않고 춤추지 않을 때, 더는 눈부신 불꽃을 사방으로 내던지지 않을 때, 수많은 불티가 빛도 열기도 없이, 아무에게도 득이 되지 않은 채 꺼져가며 그저 냄비를 천천히 데우기만 할 때, 그때 내 집은 참 좋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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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렘 입숨의 책 - 구병모 미니픽션
구병모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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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Dum spiro spero. 

 


단편 <입회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스무 장을 넘기지 않는, 표지에 쓰여 있듯 미니픽션이다. 적은 분량이라 읽고난 후 소감도 한 번에 바로바로 쓱쓱 써봤다. 







 
죽은 뒤에 지표는 알아서 무엇하리.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을 죽이기 위한 신인의 행위가 '나스카의 지상화'와 연결된 것도 재밌는데, 이를 공허와 무의미로 대변하다니.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일까. 하긴 신의 계시든 외계인의 흔적이든 지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 않나. 


돈이 세상의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소박한 꿈 따위는 오히려 장애물이다. 지독한 경쟁과 이기적인 승자독식의 사회구조를 바라는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책에 실린 <동사를 가질 권리>, 그리고 덧붙인 작가의 글을 읽고나니 그의 소설 <상아의 문으로>를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는 말에 더 가깝겠지만.   


동종도 전쟁의 도구로 쓰는 인간이 동물을 학살하고 전쟁의 폭탄으로 이용하는 것쯤이야 대수롭게 여기랴. 그들에게 아름다운 희생을 부여할 권리와 자격을 누가 인간에게 주었나.   


관객은 그들이 쥔 권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버튼에 누군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한다는 것을. 우리가 무의식 중에 내뱉은 말들이나 행동이 어느 사람의 인생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자주 잊고 산다. 속된 말로 '목숨 걸고 한다'는 말이 있는데, 어쩌면 우리는 매순간 목숨 걸고 삶을 이어가는 건 아닐지. 입시, 취업, 승진, 창업 등 단 한 발짝만 헛디뎌도 끝이라는 위기의식과 두려움으로 인한 긴장감. 가끔 제정신으로 사는 게 더 기이할 지경이다. 대중매체에서의 순위 경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탈락 방식도 점점 자극적이고 가학적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런 사회에서 예술은 얼어죽을... .  


"눈앞에 펼쳐진 모든 집이 사람 사는 터전으로 보였지만, 실은 쥐들의 왕국에 사람이 세내어 살고 있었다는 듯이. (p169)" - 이 문장을 읽는데 무섭더라는.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인간 외에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을지.   


신의 사전에서 '노화'를 지우면 인간은 늙어감과 필멸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까? '공격'을 지우면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위한 온순함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고독'이라는 단어를 지우면 한평생 외롭지 않을까? '오염'을 지우면 유해 세균 없는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을지... . 세상은 하나의 단어를 지우고 생성하는 것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인간이 갖은 감정의 생명력, 그리고 무엇보다 욕망과 탐욕은 얼마나 강한가. 원이 지우기로 마음 먹은 다음 말은 '혐오'. 과연 무엇에 대한, 누구를 향한 혐오인가.   


세상은 생각보다 투명인간이 많다. 보여도 외면 당하는 투명인간, 아니면 인지조차 되지 않는 투명인가.   


가문, 직업, 성별, 나이, 소득 수준, 공교육 정도, 학벌 등을 잣대로 한 교양과 품위에 대한 고정관념. 요즘에 그런 사람이 어디있냐고 하겠지만, 그럴까? 나를 포함해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지 않은 척, 혹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거나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아마 자기 스스로 제일 잘 알겠지. 


ㅡ 


각 픽션마다 작가의 글을 쓴 의도나 짧은 감상들이 포함된 코멘터리도 좋았다. 


작가는 인간이든 사회든 획일적인 하나의 색깔로만 존재할 수 없기에 선과 악에 대한 선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와 모순을 얘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함께 살아 '가야'만 하는 세상에서 지켜야할 이상과 도리, 그리고 자유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이 깔끔한 소설들에 깜빡 넘어간다. 
  


 
220.
기억해두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언제 내가, 그리고 나와 같은 이들이 투명한 몸과 마음을 갖고서 당신들의 앞에 설지 모른다는 걸. 모든 색칠을 벗겨내고서, 모든 덧칠을 지워내고서.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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