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 페이지터너스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빛소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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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고독은 완전하다.


일단, 추리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반전의 반전!
첫 번째 반전은 조금(?) 예상할 수 있었는데, 두 번째 반전에서는 그야말로 뜨악했다.
스포일러 없음. 따라서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쏟아낼 수 없어 리뷰가 심심할지도.  








늙고 가난한 홀아비 실베스트르는 숲 깊은 곳의 허름한 집에 살고 있는 은둔자다. 유산으로 젊은 시절을 여행하며 보냈던 그는 탕아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실비오라고 부른다. 늙은 그가 교류하는 사람이라고는 사촌 엘렌과 그녀의 남편 프랑수아 에라르,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이 전부다. 에라르 부부의 가정은 정겹고 따뜻하며 안락하다. 그들의 자녀들 중 실비오가 가장 아끼는 콜레트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고, 결혼 후 물랭뇌프에 자리를 잡을 예정이다.  


(도입부에 이미 복선이 있었다. 몰랐는데 리뷰를 쓰려고 다시 읽어보니 알겠더라는!) 



실비오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이런저런 직업을 가져보려 애썼으나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스스로 큰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자신의 젊은 피의 열기에 떠밀려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그 열기가 식어버린 지금, 노년을 앞둔 나이가 되어서 그때 왜 그랬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긴 행로. 돌이켜보면 다 무의미할 것 같은 방황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일까.



숨 막힐 듯한 권태감과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청춘의 욕망. 어리고 젊은 날, 나에게도 이런 욕망이 한 번쯤은 있었을 터다. 책을 읽으면서 실비오에게 마음이 갔던 이유는... . 


탕자가 되어 돌아온 고향의 땅은 그대로 있으나 임자를 달리해 더 이상 실비오의 것이 아니다. 큰돈을 벌겠다는 야심으로 성과없는 세월을 보내며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후회하지 않더라. 심지어 스무 살에 이미 현명하게 미래를 설계하고 차곡차곡 현재를 쌓아둔 이들보다 지나간 자신의 광기가 더 마음에 든다는 사람. 아마도 떠나지 않았다면 터져버릴 듯한 욕망에 억눌려 지레 죽었을테지.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 참 어려운 일이거든. 다만 지금에서야 미치도록 떠나고 싶었던 옛날의 자신이, 실비오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지독하게 고요하고 차가운 고독이 유일하게 절실한 소망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까닭에 실비오는 젊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던, 혹은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숨겨진 사실을 부모에게 대신 말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실비오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는 이 사건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도덕적으로 설교를 늘어놓으며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그에게는 그만한 열정이 없다. 실비오에게 있어 젊은이의 죽음은 그가 보아왔던 수많은 죽음 중에 하나일뿐이다. 그에게 있어 세상에는 열렬하게 예찬받아 마땅한 사람도, 극도로 분개하며 경멸해야 마땅한 사람도 없다. 그는 지루하기만 할 것 같은 그렇고 그런, 반복되는 안온한 하루가 축복이라 여긴다.  


무릇 인생이 그런 것 아닐까? 다 태워버려야만 진정될 수 있을 것 같은 열정의 시기를 거쳐 차갑게 식어버리는, 그래서 미약하게 남은 불씨를 끄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인생에 있어서 과거의 실수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도에 따라 다르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본인과 함께 했던 그 긴 세월에서 보여진 상대의 애정과 헌신을 생각한다면, 무엇보다 상대는 변하지 않았고 그 사람에 대한 본인의 인식만 바뀌었음을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묻고 싶다.
왜 미치도록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대가와 비난의 화살은 늘 여인의 몫이며, 수많은 그녀들이 시들어가는 동안 당신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떤 봄을 보내고 있었느냐고. 



음...
사실 이 소설이 이렇게까지 좋을 거라는 짐작은 하지 못했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외로웠던 유년 시절, 유대인 박해와 현상수배범이 된 아버지로 인해 부유하듯 도피 생활을 했던 청년 시절, 그리고 십 년도 채 되지 못한 행복한 시기를 지나 서른아홉 살에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된 낯선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작품보다 더 크게, 나의 관심을 차지했다. 


작품은 그녀의 삶을 투영했다는 섣부른 나의 선입견을 여지없이 부숴주었다. 어쩌면 젊은 실비오와 콜레트의 뜨거운 열기도, 그 열기가 꺼져 차갑게 식어버려 세상 일에 무심해진 나이든 실비오의 고독도, 모두 이렌 니메롭스키의 가슴 안에 담겨져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길지 않은 이 소설에는 사랑, 젊음, 열정, 고독, 신뢰 등을 모두 담고 있다. 반전에 놀란 마음의 크기만큼 가슴 한 켠에는 그들의 고통에, 나는 헛헛해진다. 




23.
나는 내 집이 좋다. 불이 사그라든다. 불이 더는 놀지 않고 춤추지 않을 때, 더는 눈부신 불꽃을 사방으로 내던지지 않을 때, 수많은 불티가 빛도 열기도 없이, 아무에게도 득이 되지 않은 채 꺼져가며 그저 냄비를 천천히 데우기만 할 때, 그때 내 집은 참 좋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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