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스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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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멕시코 귀족인 어머니와 폴란드 왕족인 아버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의 삶의 흔적을 담은 소설이다. 멕시코 혁명 이후 부르주아와 노동자 계층의 대립 관계, 정부의 부정부패, 여성의 사회 진출 제한 등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백인 혼혈 여성인 마리아나의 성장을 담고 있다.  







주인공 화자인 마리아나는 내성적이고 관심과 인정을 받기 위해 순종적인 태도로 끊임없이 엄마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녀의 동생 소피아는 외향적이고 반항을 일삼으며 가슴에 품은 열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는 아이다. 여성의 활동이 거의 제한된 사회에서 두 자매의 엄마인 루스는 자유분방하고 활동적인 사교 생활을 주저없이 이어갔다. 소설은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백인 혼혈인 마리아나는 멕시코인으로서 인성받지 못한다. 또한 엄마 루스 역시 프랑스인과 결혼해 교민 신분이기에 정당한 멕시코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그녀는 프랑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프랑스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더구나 멕시코 내에서는 외국 이민자들과 교민들을 혐오하며 제 나라로 돌아가기를 강하게 촉구하면서 그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예민한 루스는 부유하듯 안정을 찾지 못하고, 이러한 엄마를 좇는 마리아나 역시 루스와 마찬가지였다.  


마리아나의 흔들리는 정체성과 단단하게 쌓아지지 못한 자존감은 소설 곳곳에서 나타난다. 언제나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칭찬과 사랑에 목마르다. 누군가 그녀에게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면 그 사람에게 집착하기에 이른다. 현재의 자신을 사랑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스스로 미래에 무엇이 될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전혀 모르겠다고만 한다. 마리아나는 그저 사랑받고 싶은 것이 전부다.  



이 소설에서의 전환점은 신부 퇴펠의 등장이다.
마리아나가 다니는 교구에 새로 부임한 퇴펠 신부는 영성 수련회 강연에서 십대 여성들에게 높은 사회 신분의 계급적 특권 안에서 착한 여자 아이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두려 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있는 직업을 갖기 위한 공부를 하라고 집요하게 추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깊은 이해를 통해 내면의 자유와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선택해 진정한 인격체로, 분리된 개인으로서 나아가야한다고 역설한다. 퇴펠 신부는 소녀들이 받은 교육은 민중과 평등하게 연대하고 그들과 융화되지 않는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제의 모습에 마리아나는 한순간에 빠져든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마리아나를 뒤흔들고 고양시켰다. 그토록 훌륭한 신부님이 그녀의 능력과 잠재력을 믿는다지 않는가. 마리아나 인생 최대의 욕구를 채워주고 있는 신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나 곧이어 퇴펠 신부의 모순이 드러난다. 희망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간다지만, 그는 정작 위생적이지 못한 낡은 교구 성당을 견디지 못한다. 낮은 자들의 삶에 발을 딛지도 못하면서 그들을 위해, 그들의 해방을 위해 살겠다니. 또한 부르주아와 여성들을 극도로 혐오하며 이에 따른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면서, 귀족 계급인 루스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상류층 여성이 제공하는 차량을 이용하며 그 집안의 가장 행세를 하는 등 납득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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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나와 퇴펠 신부의 대화 장면을 읽다보면 마리아나가 지적 능력과는 별개로 사회적 환경과 자신의 삶에 대해서 무지하고 수동적이라고 밖에는 보여지지 않는다. 주변의 모든 것에 한 치의 의구심이나 호기심도 없이 그저 어린애처럼 오로지 사랑과 관심과 인정만 갈구한다. 그야말로 정신 연령이 유아기에서 멈춰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더구나 수련회의 공개적인 토론장에서 옳든 그르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질문을 쏟아내는 다른 소녀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두 자매를 살펴볼때, 소피아가 주변의 변화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리아나는 타인의 시선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들이 같은 환경에 놓여있었음에도 이토록 다른 이유는 단순히 타고난 성향이나 기질이 달라서일까. 자매는 감정으로 표현하고 해결하는 방식이 다를 뿐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보여진다. 안으로 숨어드는 마리아나와는 달리 소피아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불만과 요구 사항을 격하게 표출한다. 그래서 소피아는 어린 시절에는 유난히 양육하기 힘든 아이로 그려지는데, 소피아가 어느 시점부터 그런 면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사견으로 그 이유가 알레한드로에게 있지 않을까싶다. 열한 살부터 교제 관계를 분명히 하고 청소년기에 이르는 시점까지 그 관계를 유지한 두 사람. 정서적으로 의탁할 존재가 생긴 소피아는 애착의 대상이 가족에서 연인으로 바뀐 것이고, 이를 확인하듯 이른 나이에 결혼한다.(이 점이 상당히 의외였다.)


읽는 내내 나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했던 인물은 루스다. 늘 어딘가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그녀. 얼핏 보기에 소피아가 루스와 닮은 듯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와 같은 혼란을 겪고 있는 딸은 마리아나다. 멕시코인으로서 프랑스 사회에서 정서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채 전쟁으로 인해 오랜 기간 남편의 부재를 겪었고, 고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로 이방인이 되어야했다.  


전장에서 돌아왔으나 가정을 방임한 남편 카시미로와의 단절된 정서적 교류가 회복되지 않자 퇴펠에게서 안정을 찾고자 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 루스는 정서적으로 떠돌듯 자신의 삶에 정착하지 못하고, 점점 더 무기력과 권태와 자아 상실감을 겪는다. 그런데 이같은 루스의 결핍을 알아보며 공감하는 사람이 마리아나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는 소피아일 것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인물은 루스와 마리아나가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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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생, 이제는 아흔 살이 된 작가의 표지 사진을 바라본다. 이 사진도 여든에 가까운 사진이 아닐까 싶다. 노년의 사진에서 지칠줄 모르고 사랑을 갈구하던 어린 소녀를 상상한다.   


제목 '아이리스'는 타말 가게의 이름으로써 소설 초반부와 마지막 장에 단 두 번 등장(그것도 각각 한 줄씩)하는데, 타말 가게는 마리아나의 유년 시절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어디에요, 엄마?'라고 묻는 마리아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지만, 그녀의 정체성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부유한다.  



​501.
마리아나의 유일한 불안, 앎을 좇는 움지임은 감격적이다. 마리아나의 방황 속에서, 미래에 예정된 고독의 씨앗이 움튼다. 루스와 프란시스카 안에, 언제나 이방인이라서 거의 감지되지도 않는 흔적을 남기는 여자들 안에 음툰 것과 같은 씨앗이다. 한 손에 쉽게 쥘 수 있을 만큼 부서질 듯 가느다란 발목에서 시작되는 작은 새의 다리, 피부에 꽃처럼 비치는 푸른 혈관. 맙소사, 이런 연약함이라니.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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