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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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진정한 절망은 우리가 더는 말을 할 수 없을 때 일어난다.  



저자는 본인의 관점뿐 아니라 철학, 문학, 예술, 사회학 등 다각적으로 불러들여 고대부터 현대까지 각 시대의 사상가와 철학자, 그리고 문필가들의 관점을 통해 비극을 탐조한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비극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예술적 의미의 비극은 매우 구체적인 사건이고, 비극이라는 형식은 특정 문명이 역사적 순간 동안 갈등과 씨름하는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비극은 실제로 정치적 제도로서 시작됐고, 예술 차원에서 미적 감상이며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또한 공민도덕을 심는 데 도움을 주는 윤리 정치적 교육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그리고 비극은 폭넓은 정치적 역할을 해왔다. 


저자는 비극적인 정신이 근대적인 것의 탄생과 더불어 소멸한다고 말한다. 세속적인 가치, 계몽된 정치, 인간사의 합리적 운용, 우주의 궁극적 불가해성을 믿는 시대에는 비극이 살아남을 수 없으며, 비극은 공리주의적 윤리나 평등주의적 정치를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 같은 일부 근대 비평가들은 비극이 합리적 설계를 드러낸다고 주장하지만, 비극적 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에는 고통 자체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롤랑 바르트의 말들을 생각해보면 고통과 슬픔을 토해내는 비극이야말로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책에서 언급된 이들과는 달리 오히려 근대성이 비극을 망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새로 연장 및 촉진해 주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그 이유로는 인간 이성의 한계, 인간 주체의 연약함과 자기 불투명성, 익명의 타자들 속에서 개인의 무작위 노출, 힘과 자율성에 가해지는 제약, 사회질서의 복잡한 밀도와 세계화(여기에는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인터넷 등 사회 집단과 개인적 차원도 포함될 듯 하다) 등을 드는데, 이는 고대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자기 자신으로 인해 정복당할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라는 건데 기후변화나 자연 재해 등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이야말로 위기라는 발터 베냐민의 말을 들면서 조지 엘리엇이 <미들마치>에서 쓴 '반발이라는 사실 자체에 들어 있는 그 비극의 요소'를 짚는데, 이것은 우리가 해당 상황에 요구되는 감수성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조용한 절망 상태임을 얘기한다. 문득 비극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비극보다 더 암울하고 절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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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대표적인 비극적 소재로 꼽는 근친상간이라는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개인은 주체와 객체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필연적으로  완전히 자기동일성을 이룰 수 없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늘 연기가 따르며, 이는 사람의 정체성의 한 속성이 된다고 얘기한다. 


'자신을 아는 것은 자기 동일적이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둘로 쪼개 대상으로 바꾸고 그렇게 바로 그 행동 자체로 암묵적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p68)' 즉, 자기 결정적이라는 것은 자기 동일성에 반하는 것이자 동시에 상호적이라는, 그래서 인간의 관계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동인과 동인 사이의 경계가 명확할 수 없으며, 개인의 작은 행위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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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의존이라는 이중 결정에서 상당한 비극적 갈등이 생긴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에 대해 캐물어봤자 돌아오는 건 본질 따위는 없으며 일관성이나 확신 없이 오락가락하는 존재일 뿐이란다. 그러나 비극을 부르는 극적 행위는 새로운 종류의 자기 이해로 가는 길을 여는, 이성을 넘어서는 이성의 한 형식이라고 저자는 얘기한다. 이렇게 읽다보면 비극은 다차원적으로 인간 세계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야망은 인간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다. 문제는 야망이 지나치게 '과잉'된다는 데에 있는데, 이는 스스로를 속박하고 자기표현에 장애가 되어 자멸하는 원인이 된다. 모든 순응에 대한 거부와 복수도 같은 맥락이고. 과잉에 제동을 걸 수 없는 것이 비극이라고 볼 수 있을까? 


18세기 전환기 무렵부터 비극에는 '비극의 철학'이라는 새로운 담론이 수반된다. 예술 자체로부터 정치적.종교적.철학적 비전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흐름은 자유를 매개로 한 법, 자연, 필연 사이의 갈등을 숙고함고 동시에 비극적 예술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위대한 비극은 혁명적 행동이자 급진적인 힘에 갈음하는데, 사회적 질서의 핵심이면서도 표현 불가능한 것을 행동으로 표현한다. 


저자는 비극에 있어 원죄는 특정한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상호 피해의 가능성은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로스메르의 말을 빌어 죄에 뿌리를 둔 대의에서 승리는 얻을 수 없지만 인간 삶이 서로 엮인 상황에서 그렇지 않은 대의가 어디 있겠냐고 묻는다. 자유가 굴레가 되고, 자기완성이 자기 혐오가 되고, 진실이 거짓에 기초하는 변증법. 이러한 모순은 우리 사회에 늘 존재하고 끊임없이 딜레마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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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것이라는 관념은 철학으로부터 예술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등장한다. 철학이 예술과 연극으로 확장된 데에는 합리주의적 철학에 의해 비극이 죽어가고, 이에 자유와 필연 사이의 갈등이 합리적으로 정리될 수 없다해도 존재론적으로는 해소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뭔 말인가 싶겠지만, 앞뒤의 내용을 읽어보면 충분히 동감하는 내용이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해 보자면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생명이 죽어야 하고,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한켠에서는 자기 버리기와 충성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예술 작품에서 비극을 내재한 자유와 필연은 동일한 것으로, 혹은 때때로 대립적으로 구현된다. 


헤겔이 비극의 진리가 화해에 있다고 한 반면에 괴테는 화해라는 관념은 비극적 감수성에 이질적이라고 보면서 모든 비극적인 것은 처리할 수 없는 대립에 있으며 해결이 가능해지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고 말했는데, 개인적으로 괴테의 주장에 더 공감하게 된다. 헤겔식 결말은 안도감은 있지만 어딘가 감정이 절정에 도달하지 못한 채 꺼져버리는 느낌이 크다. 내 감성이 너무 '비극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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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1장에서는 홀로코스트나 굴라크를 비극이라고 칭하지 않고, 비극적 묘사가 될 수 없다고 썼다. 아마 극단의 강제 노동과 집단 대학살에서 우리는 어떠한 카타르시스도, 어떠한 깨우침도, 어떠한 익살도 얻을 수 없으며, 가치나 이해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비극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없을만큼 참혹하고 무참하다. 저자가 조지프 콘래드를 들면서 삶의 거짓이 파괴적인 동시에 본질적이기에 비극적이라는 말이 납득이 된다. 


내가 그동안 비극 혹은 비극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에 대한 생각들의 일부분은 전환되었다. 인간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고양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는 사실, 의기소침하고 불행한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무엇이든 비극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어쩐지 비극은 점점 사라지고 있고, 슬픔을 슬픔으로, 고통을 고통으로 드러내지 못해 숨어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되어가고 있기에, 그렇기 때문에 비극이 사라진 인간의 삶은 오히려 더 황폐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굳이 따지자면 대부분의 인생이 희극보다는 비극에 더 가깝지 않을까. 살아가기 위해 비극적 체험을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 그래서 어쩌면 비극을 다룬 예술이나 문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면하고 치유받는 것일지도... . 




236.
비극은 역사 자체보다 강력한 현상으로 거대하게 떠오른다. 비극적 비전만이 궁극적 진리의 현현으로서 인간 실존에 의미를 주입한다. 비극적 위기의 순간에만 우리에게 모든 경험적 또는 심리적 우연을 쳐낸 순수한 자아 경험이라는 특권이 주어진다. 비극 예술은 다른 아닌 '존재' 자체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인간의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현실이 되는 것"으로, 인간 노력의 정점이며 신비한 황홀경의 계기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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