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렘 입숨의 책 - 구병모 미니픽션
구병모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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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Dum spiro spero. 

 


단편 <입회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스무 장을 넘기지 않는, 표지에 쓰여 있듯 미니픽션이다. 적은 분량이라 읽고난 후 소감도 한 번에 바로바로 쓱쓱 써봤다. 







 
죽은 뒤에 지표는 알아서 무엇하리.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을 죽이기 위한 신인의 행위가 '나스카의 지상화'와 연결된 것도 재밌는데, 이를 공허와 무의미로 대변하다니.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일까. 하긴 신의 계시든 외계인의 흔적이든 지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지 않나. 


돈이 세상의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소박한 꿈 따위는 오히려 장애물이다. 지독한 경쟁과 이기적인 승자독식의 사회구조를 바라는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책에 실린 <동사를 가질 권리>, 그리고 덧붙인 작가의 글을 읽고나니 그의 소설 <상아의 문으로>를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는 말에 더 가깝겠지만.   


동종도 전쟁의 도구로 쓰는 인간이 동물을 학살하고 전쟁의 폭탄으로 이용하는 것쯤이야 대수롭게 여기랴. 그들에게 아름다운 희생을 부여할 권리와 자격을 누가 인간에게 주었나.   


관객은 그들이 쥔 권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버튼에 누군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한다는 것을. 우리가 무의식 중에 내뱉은 말들이나 행동이 어느 사람의 인생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자주 잊고 산다. 속된 말로 '목숨 걸고 한다'는 말이 있는데, 어쩌면 우리는 매순간 목숨 걸고 삶을 이어가는 건 아닐지. 입시, 취업, 승진, 창업 등 단 한 발짝만 헛디뎌도 끝이라는 위기의식과 두려움으로 인한 긴장감. 가끔 제정신으로 사는 게 더 기이할 지경이다. 대중매체에서의 순위 경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탈락 방식도 점점 자극적이고 가학적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런 사회에서 예술은 얼어죽을... .  


"눈앞에 펼쳐진 모든 집이 사람 사는 터전으로 보였지만, 실은 쥐들의 왕국에 사람이 세내어 살고 있었다는 듯이. (p169)" - 이 문장을 읽는데 무섭더라는.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인간 외에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을지.   


신의 사전에서 '노화'를 지우면 인간은 늙어감과 필멸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까? '공격'을 지우면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위한 온순함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고독'이라는 단어를 지우면 한평생 외롭지 않을까? '오염'을 지우면 유해 세균 없는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을지... . 세상은 하나의 단어를 지우고 생성하는 것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인간이 갖은 감정의 생명력, 그리고 무엇보다 욕망과 탐욕은 얼마나 강한가. 원이 지우기로 마음 먹은 다음 말은 '혐오'. 과연 무엇에 대한, 누구를 향한 혐오인가.   


세상은 생각보다 투명인간이 많다. 보여도 외면 당하는 투명인간, 아니면 인지조차 되지 않는 투명인가.   


가문, 직업, 성별, 나이, 소득 수준, 공교육 정도, 학벌 등을 잣대로 한 교양과 품위에 대한 고정관념. 요즘에 그런 사람이 어디있냐고 하겠지만, 그럴까? 나를 포함해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지 않은 척, 혹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거나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아마 자기 스스로 제일 잘 알겠지. 


ㅡ 


각 픽션마다 작가의 글을 쓴 의도나 짧은 감상들이 포함된 코멘터리도 좋았다. 


작가는 인간이든 사회든 획일적인 하나의 색깔로만 존재할 수 없기에 선과 악에 대한 선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와 모순을 얘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함께 살아 '가야'만 하는 세상에서 지켜야할 이상과 도리, 그리고 자유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이 깔끔한 소설들에 깜빡 넘어간다. 
  


 
220.
기억해두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언제 내가, 그리고 나와 같은 이들이 투명한 몸과 마음을 갖고서 당신들의 앞에 설지 모른다는 걸. 모든 색칠을 벗겨내고서, 모든 덧칠을 지워내고서.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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