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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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이라는 모순이 거듭되는 기묘한 제목. 이것만으로도 읽기 전부터 기대가 풍선처럼 커져 버립니다만, 실제로 읽어 보면 이 제목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기기묘묘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 소설은 1989년 발표당시의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순위에서는 8위였지만, 1998년판의 역대 베스트 20에서는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특이한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높은 평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확실히 당시로서는 (본격추리의)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작품이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를 앞서간 소설이라 해야 할까요.

국의 어떤 시골 마을에서 죽은자가 되살아나는 괴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장의회사(꽤 규모가 큰) 일가의 허둥지둥 살인 희극이라는 것이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집고 넘어갈 것은 제목때문에 한없이 진지하고 그로테스크한 것을 기대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이 허둥지둥하는 부분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생각보다 가벼워서 의외라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해자가 사망자인 것은 당연합니다만, 용의자도 사망자,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역할도 사망자, 게다가 죽은 게 분명한 피해자가 다시 살아돌아오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의 연속. 살아있는 시체들이 사건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으면서, 사건을 혼란시키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이미 죽은 피해자가 사건에 대해 증언을 한다든가 하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상한 세계가 시종 펼쳐집니다.

살아 있는 사람 중에도, 여러가지 사정에 의해 정신적으로는 이미 사망자나 마찬가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어서, 이들 역시 "준살아있는 시체"로서 사건에 연관됩니다. 이런 살아있는 시체들이 생생하게 날뛰고 도는 세계는 좀비소설이 아닌가 싶을만큼 파격적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탐정 역인 주인공이 시작부터 허망하게 죽어버린다던가 하는 대담한 설정이나, 사망자가 되살아난다는 점 때문에, 혹시 추리소설의 룰을 무시하고 반칙을 일삼는(예를 들자면 밀실살인사건의 범인이 외계인으로 밝혀진다던가 하는) 작품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할 수도 있지만, 전혀 기우입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소재로도 얼마든지 공정한 추리소설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저자의 독창성이 불을 뿜는 작품입니다.

독창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복잡하게 헝클어진 이야기가 마지막에는 깔끔히 정리되는 데에 놀랐습니다. (본격)추리소설을 읽으면서 기발한 복선이나 트릭, 예술같은 추리, 깜짝 놀랄만한 결말에 감탄하는 경우는 많지만, 그 이상으로 감정에 호소해 오는 작품을 만나는 경우는 좀처럼 없습니다. 이 소설은 기상 천외한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는데, 그 난해하게 어지럽혀진 것들을 마지막에 아름답게 정리하는 결말에도 감동해 버렸습니다. 대한민국 박수와 함께 엄지 손가락을 하늘높이 치켜올릴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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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
존 론슨 지음, 정미나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다 읽고 결국 뭐가 어떻다는건지 잘 모른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논픽션이라고는 하지만 컨셉자체가 블랙코미디라 의도적으로 바보같이 보이게 연출한다. 코믹 다큐라고 해도 좋다. 확실한 규명이라기 보다는 두리뭉실 그래서 결론이 어떻다는 것인지 모르는 곳이 너무 많고, 정작 중요한 부분은 교묘하게 잘 피해 다니고 있는 느낌이 든다.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 피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저자의 의도와 맞는 방향으로, 그러니까 아메리칸 스타일의 웃음 포인트를 잘 짚어내면 굉장히 재미있을수도(그래서 영화화도 되는 거겠지만), 반대로 너무 진지하게 몰두해서 읽으면 인생무상, 허무감을 안고 돌아서는 책이 될 수도 있으리라 본다.

모든 것은 베트남 전쟁의 패전에서부터 비롯된다. 징병제의 폐지와 함께 위신이 땅에 떨어져 낙담하는 군인들에게, 뉴 에이지 운동의 영향을 받은 어떤 장교가 엉뚱한 구상을 들려준다. 적을 상처 입히지 않는 평화의 군대, 흔히 말하는 "러브&피스"의 정신으로 무장한 군대다!
보통때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터무니없는 발상이지만, 패전의 악몽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 상층부에는 매력적으로 비쳤다. 말하자면 현실 도피적으로 시작된 계획이지만...
이 책은 그러한 평화의 군대의 전사들의 궤적을 쫓은 취재기록이다. 실제로 초능력 훈련을 받은 남자들의 이야기는 황당 무계이고, 그 캐릭터도 정상궤도에서 두어발짝 쯤 비켜있는 엉성한 사람들 뿐이다.
일례를 들면,

글렌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말했다.
"당신은 들어오면서 앞문에서 뒷문까지 쭉 거쳐왔소. 그러면 우리 집에 의자가 몇 개나 되오?"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당신은 우리 집에 몇 개의 의자가 있는 지 알지 못할거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슈퍼솔저(supersoldier)라면 볼 필요도 없소. 그냥 알 테니까."
"슈퍼솔저요?"
"그렇소, 슈퍼솔저. 제다이 전사요. 모든 빛의 소재를 알고 모든 힘의 출구를 아는 자. 대다수 사람들은 관찰력이 빈약하오. 주변에서 정말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 못하지."
"제다이 전사가 뭡니까?"
"당신은 지금 그 한 명을 보고 있소." 글렌이 말했다.(p25~26)

잠깐, 뭐냐 이거!
나오는건 이런 안습인 사람들뿐이지만, 한술 더떠서 본인들은 극도로 진지.
유리 겔러가 공작 활동에 관련되어 있다든가,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군이라든가, 염소를 노려 보는 것 만으로 죽였다던가, 이제 터무니없는 증언의 대행진이다.
하지만, 뭔가 엉성해 보이던 취재가 중반 이후로 가면 뭔가 갑작스레 묵직해진다.
이 초능력 부대가 오랜 시행 착오를 거쳐 만들어낸 기술이, 실은 테러리스트나 이라크전쟁의 포로들의 심문에 사용되고 있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노래로 적을 물리친다는 거시적인 구상이 포로를 학대하는데 사용된다는 현실은 그렇다고 해도, 이것을 미디어에서 알고도 단순한 가십거리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것에는 아연실색했다. 마지막에는 과거에 CIA가 일으킨 사건에까지 이야기는 옮겨간다. 이 책은 거창하게 말하면 미국의, 그야말로<암흑면>을 다룬 것이었던 것이다!

터무니없는 소재를 가지고 냉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머를 잔뜩 뿌려서 독특한 이야기로 만들어 낸다. 그 진지함과 유머의 배합이 절묘해서 논픽션이 아니라 소설로 만들어내도 색다른 맛이 있을 것 같다.
모든 게 확실하게 물증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고, 진짜와 가짜의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고 있는 부분이 크지만, 뭐, 꽤 충격적인 르포다.

이 책을 읽고 깨달은 게 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며칠뒤에 서울에서 십만명쯤 죽는 사고가 일어난다고 예언했다고 치자. 그럼 한국 사람 같으면, 전쟁 발발? 63 빌딩의 붕괴? 핵폭탄? 화산폭발일까?(이건 좀 이상하다), 아 쓰나미가 몰려오는 구나! 정도의 예상을 할거라 생각한다. 아무리 엇나가도 UFO 의 도발이라든지, 화성인 침공, 혜성이 지구로 날아와 충돌한다던가 하는 발상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미국인은 이런 것 예상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취재를 할 생각을 했는지. 이게 사실인지 어쩐지 아리까리. 그래서 결론은, 초능력으로 염소를 죽일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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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킹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1 아서 왕 연대기 1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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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이라고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보검 엑스칼리버, 갑옷, 호수의 요정같은 월트디즈니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는 대부분 영국 소설가들이 전설에 추가한 것이며 실제 그는 기사도의 미덕을 갖춘 이가 아니라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실린 기사를 얼마전에 읽은 적이 있다. 고대 영국 최초의 통일왕국을 세운 전설적인 영웅으로 추앙받는 아서왕이 사실은 대량학살을 자행했던 잔학한 왕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민족의 것이나 그 전설을 파헤쳐 오랜세월동안 불려온 살점들을 해체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보통 인간들의 삶이다. 따라서 배신감이랄 것 까지도 없다. 그동안 쉬쉬해 오던 게 드디어 밝혀지는구나 라는 느낌? 그보다는, 그렇다면 과연 진짜 아서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것이 알고싶다 라는 호기심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그러던 차에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책, 영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역사소설가라는 "버나드 콘웰"의 아서왕 연대기 첫번째작, <윈터 킹>이다.

일찌기 아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수많은 싸움을 함께 해 온 노수도사 데르벨이 과거를 적어 내려가는 형태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무대는 대략 5세기에서 6세기 즈음의 브리튼. 로마인들이 물러간 뒤에도 평화는 요원해 보이고, 동쪽의 색슨족으로부터의 잦은 습격으로 인해 피바람이 그칠 날이 없다. 브리튼의 각 왕국들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색슨족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해 일단은 단결하는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단결의 구심점인 둠노니아유서왕이 싸움에서 적자를 잃고 절름발이 손자 모드레드만을 남겨둔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유서의 서자인 아서가 후계자 모드레드의 후견인이 되어, 유서 사후에 둠노니아를 호시탐탐 노리는 각 나라들과의 평화에 힘쓰는데...

현란하고 호화로운 기사이야기로 세상에 알려져 있는 아서왕전설이지만, 이 또 다른 아서왕 이야기에서는 가능한 한 당시의 시대 배경을 충실히 묘사해 내려간다. 당시의 종교나 전투의 형태, 취락의 모습 등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상세하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저자의 상당히 의욕적이고 면밀한 조사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인물들의 인간상도 기존의 이야기와 비교하면 오히려 촌스럽다 할 정도로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그 아서 전설의 이정표와 같은 귀족적인 격조와는 거리가 멀다.

저자 버나드 콘웰의 묘사는 철저하게 리얼리티. 동화같은 달콤한 장면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인간의 증오와 광기가 눈보라친다. 그 존재감과 현실성이 가져오는 압도적인 박력을 마주하고 있으면 정말로 묵직한 흥분과 같은것이 밀려온다. 개성적인 등장 인물들은 이야기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전설속의 영웅다운 인물은 애당초 한사람도 없고, 저마다 질투와 증오 투성이가 되어 후회와 속죄에 시달린다. 그렇지만 이런 진흙탕 같은 혼돈 속에서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숭고하고 고결한 마음가짐이나 행동 하나하나는 진흙속의 사금처럼 반짝반짝 빛을 낸다. 진짜 인간군상이 살아 숨쉬는 아서왕 이야기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프리미엄이다.

다만, 사람에 따라서는 좋아하는 등장 인물이 왜 이런 식으로 바뀌었냐고 실망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인간 란슬롯의 허접함에는 할말을 잃는다. 니무에귀니비어, 두 여성의 묘사도 흥미로운 부분. 수단도 목적도 다른 이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보이는 집념은 혐오감이나 처절함같은 감정을 넘어서 눈부시기까지 하다.

시점은 항상 데르벨에게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를 주인공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드루이드의 죽음의 구덩이으로부터 빠져나와 멀린에게 거두어진 일개 견습승려가 아서나 니무에, 그리고 동료들과의 전투를 통해 성장하고, 데르벨경이 되어 가는 모습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솔직한 심경을 이야기하면, 이런 굉장한 아서왕 이야기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제서라도 알게 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앞으로 펼쳐질 장대한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금 몹시 흥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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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망가 섬의 세사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9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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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로망가 섬에 가서 에로만화를 읽는다는 엉뚱한 발상을 그린 표제작 외, SF소설, 기상 천외한 골프 소설, 관능소설에다, "에로망가 섬의 세사람 그후... "에 해당하는 에피소드까지 더해서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나가시마 유"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하는 이색 작품집. 예의 나가시마 유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에로망가 섬에 가서 에로만화를 읽는다는 발상이 왜 엉뚱하냐 하면 에로만화의 일본어 발음이 바로 에로망가이기 때문이다. 그럼 에로망가 섬은 작가가 웃기려고 만들어낸 가상의 섬이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에로망가섬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동 바누아뜨 공화국에 실재하는 작은 섬. 공교롭게도 에로만화와 발음이 같은 이 섬은, "모모타로 전철"이라는 유명 게임에 등장하면서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에 이 섬의 이름이 에로망가가 아니라 에로만화 섬이었다면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을까. 그와 같은 원리다.(원리는 무슨)

하여간에 술자리에서 급조된 이 바보같은 아이디어가 결국 실현되서, 정말로 가방에 에로만화를 주섬주섬 챙겨넣고 에로망가섬으로 떠나는 게임잡지 편집자 3인방. 게임잡지의 편집자들이라는 점도 있어서 세세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이야기가 수시로 화제가 된다. 그렇다고 매니아 취향의 이야기로 끌고가는 건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게임이나 만화영화에 대한 아련한 추억, 감정같은 것들을 현재의 주인공의 심정에 연관지어 종종 끌어다 붙이고는 하는데 이게 또 제법 재미있다.

이야기는 에로망가섬과, 주인공이 일본에 남겨두고 온 연인의 시점이 교차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실존하는 섬인만큼 섬의 정경은 리얼하게 그려져 있지만, 원래 에로망가라는 섬 자체가 우리에게는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어딘가 만화속 장소같은 비현실감이 감돈다. 실존하는 섬이라고는 해도 받아들여지는 것은 가상의 섬이나 다를 바가 없다. 때로는 티비프로그램의 오지탐험을 보는 듯한 느낌도 난다. 오지탐험이라고 해봐야 탐험이라 할만한 것은 거의 없고 그냥 오지에 가깝지만.

등장인물은 에로망가섬을 찾아간 이들 일본인 세 명 외에, 현지인 가이드 남성과 그의 다섯 딸들. 이 섬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티없이 맑고, 소박하고 매우 친절하다. 그에 반해 방문객 팀은 오타쿠와 수수께끼의 남자를 포함한 우중충한 남자들 뿐, 이국적인 남쪽 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세남자의 유치한 발상이라던가, 엉뚱한 기대감, 혹은 망상들. 이 엉망진창 언밸런스함이 의외로 좋은 그림을 낸다. 모 애니메이션의 엔딩장면을 패러디 한 마지막에 섬의 아이들과 노래하는 장면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웃음과 함께, 희미한 향수를 느낀다. 한국 사람이 일본 애니를 연상하며 향수에 젖는다는게 어딘가 이상하긴 하지만 어릴적 티비에서 방영해 준 만화영화가 거의 다 일제였던 것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내 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물들은 대체로 바보 냄새가 나고 귀엽게 그려지지만 실은 그 어리숙함 뒤에서는 상당히 진지한 문제를 껴안고 고뇌하거나 한다. 그렇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진지해지지 않고 이것까지 포함해서 웃음의 재료가 된다. 웃다보면 나 자신을 비롯한 이런 인간의 어리숙함이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지니 이상하다. 에로망가 섬같은 묘한 걸 들고 나와서도 진짜 사람냄새 나는 사람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나가시마 유라는 작가의 재능이구나 감탄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뒤쫓아 다닐 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다.

그런가하면, 다음 타순은 SF로 이어진다. 게다가 상당히 초현실주의. 그리고 거기에 계속되는 (본인이 후기에 쓰고 있는 것처럼)전혀 "에로틱하지 않은 건조한" 관능소설. 마지막은(등장 인물의 이름이 모두 이니셜로 표기되어 있어서 깨닫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표제작의 후일담이자, 이것이 또 깜짝 놀랄만한 전개다. 전혀 관계없는 몇편의 단편들이 이어진뒤 이 마지막 단편 <청색LED>에서 다시 에로망가로 출발하기 전으로 되돌아와 의문점들이 밝혀지는 구성이 재미있다.

꽤 조촐하고 아담한 인상이지만 가끔 깜짝 놀랄 만한 표현들과도 만난다. 인생의 미묘한 맛이 있다. 분명 그려져 있는 색조는 여느 때의 나가시마 유와 같지만, 그동안 나가시마 유라는 작가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불변이었기 때문에 조금 변칙적인 소재를 들고 나온 것만으로도 이 단편집은 의외의 맛을 낸다. 작가의 이런 깜짝 변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즐거움을 맛보았으면 한다. 나가시마 유를 읽은 적이 없다면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을 읽기 전에 우선 <유코의 지름길>부터 읽어보는 것도 저자의 이런 깜짝변화를 제대로 즐기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그렇게 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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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존 모중석 스릴러 클럽 12
앤드루 그로스 지음, 김진석 옮김 / 비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동이 무서워서 피하는게 아니고 더러워서 피한다고들 하지만 더러는 무서워서 피하게 되는 동도 있는 법이다. 예를 들자면 이 책에 나오는 마약조직의 경우가 그렇다. 배신자가 나오면 십년이 지나든 이십년이 지나든 지구끝까지 추적해 철저하게 보복한다. 도망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포기하겠지라는 일말의 희망도 가지지 못하게 한다. 배신자의 말로를 잘 알고 있는 조직원들이 조직에 등을 돌리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처절한 응징. 거야말로 이들이 조직을 유지해 가는 가장 위협적인 수단이자 효과적인 무기이다. 이 정도 되면 이미 동의 레벨이 아니다.

소재 자체가 신선하다면 신선하다. 조직의 보복에 대한 공포를 무릎쓰고 용기있는 배신을 감행한 내부고발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FBI의 증인 보호프로그램을 다룬다. FBI의 증인보호프로그램은 대상이 된 증인 가족의 상태에 따라 3종류로 나뉘는데, 증인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거나 재판 중인 상태를 "레드 존", 증인과 그 가족이 이름을 바꾸고 다른 장소에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 상태가 "그린 존", 그리고 최악의 사태, 증인 본인 또는 그 가족의 신원이 노출되고 연락이 두절된 상태를 "블루 존"이라 칭하고 있는 듯 하다. 바로 그 블루존 상태에 놓인 가족의 이야기.

브롱크스의 의학 연구자 케이트 라브의 금무역을 하는 아버지가 FBI에 체포되었다.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을 위해서 자금세탁을 하고 있었다는 혐의지만, FBI에서 진짜로 원하는 것은 조직의 유력자를 잡아넣기 위한 케이트의 아버지의 증언. 아버지는 결국 증언을 결심하고, 케이트를 제외한 가족 전원은 살인 청부업자들의 보복을 피하기위해 증인보호프로그램에 의해 이름을 바꾸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런 상태에서 케이트는 증인보호 프로그램의 보호를 받고 있던 아버지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조사를 해나가면서 그동안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말해 온 것들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지, 모든것을 완전히 갈아엎는 후반부의 진행이 쇼킹하다.

저자의 데뷔작이라고는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데뷔작이 아니라 지금까지 베스트셀러를 한 5권쯤 낸 작가의 필력이다. 흥미진진하기도 하지만, 자잘한 설정의 문제라던가 이런 류의 소설을 읽으며 흔히 잡는 트집을 제외하더라도, 그 구성 자체가 굉장히 노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종결말에 이르기까지 몇차례의 반전이 연속적으로 등장하지만, 반전의 남발이나 불필요한 연출없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데뷔작에서 보이는 이런 의외의 노련함은 작가의 독특한 이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 "앤드루 그로스"는 데뷔 하기 전까지 베스트 셀러 작가 "제임스 페터슨"과 의기투합해서 공동작업을 해 왔다고 하는데, 그 중 다섯권이 블록버스터 베스트셀러였다. 물론 이 작품들의 공식적인 저자는 제임스 페터슨이다.

긴박한 상황을 범죄나 경찰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증인의 딸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긴장감이 배가된다. 백지상태에서 하나씩 드러나는 진실은 케이트같은 평범한 젊은 여성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해 내기 힘든 충격의 연속이다. 여기에 마피아와 같이 혈연으로 똘똘뭉친 콜롬비아 마약조직이라던가 FBI의 증인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까지 더해서 늘어지는 부분없이 다이랙트로 내달린다.

다만, 원래 증인 보호 프로그램이 발동하고 있는 상태에서 가족 구성원 한명이 임의로 벗어나 있을 수도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프로그램의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일촉즉발의 위기를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케이트를 보면서 아무 생각없이 벌컥벌컥 읽어나가기는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역시 이 부분은 석연치 않는 곳으로 남는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한편의 대반전을 즐기는데는 아무 문제 없지만, 눈에 불을 켜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면 그렇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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