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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스호퍼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이사카 고타로"라는 이름만으로도 책을 집어드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 하다. 요즈음의 일본문학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피해 갈 수 없는 이름일지도. 일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2009년도판 의 랭킹 1위가 바로 이사카 고타로의 <골든 슬럼버>였다. 2010년도판이 막 손에 들어와 펼쳐보니 이번에는 골든 슬럼버의 영화화 소식과 함께 주연배우 인터뷰가 맨 앞에 실려있다. 인상적인 것은 주연배우가 마치 미스터리 팬과의 좌담회같은 매니아틱한 내용의 인터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고 있다는 것. 역시 장르소설의 강국인 일본답다. 어쨌든, 책도 잘 나가고 연달아 영화로도 제작되고 이래저래 주가가 한창인 이사카 고타로다.
이사카 고타로의 책을 왜 읽느냐고 하면 물론 일단은 재미있어서이다. 예전에는 그럴싸한 이유도 가져다 붙이곤 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신작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챙겨 읽는 작가치고는 미스터리하게도 변변히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이사카 고타로라고 하면 자다가도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걸 보면, 이 작가의 글을 읽는것 자체가 즐겁다고 할까, 읽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고나 할까. 이 책 <그래스 호퍼>는 그런 최근의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중에서도 가장 고대하고 있던 작품이다. 살인 청부업자들의 배틀 로얄에 휘말려 들어간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뺑소니 차에 치어 목숨을 잃은 아내의 복수를 위해 뺑소니범 데라하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에 계약직으로 들어간 전직교사 스즈키. 그런데 이미 회사에서는 그런 스즈키의 의도를 궤뚫어보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스즈키의 눈앞에서, 돌연 데라하라가 달리는 자동차에 뛰어들어 날아가 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데라하라의 등을 떠민것으로 보이는 남자는 곧바로 혼잡한 인파에 섞여 사라져 버린다. 명령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남자를 뒤쫓기 시작한 스즈키는 곧 이 "밀치기"의 집을 알아내기는 하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이 집의 가정교사가 되어버리고 마는데...
3개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하나는 달리는 차 앞으로 사람을 밀어 살해하는 킬러 "밀치기"를 뒤쫓는 스즈키의 이야기, 두번째는 의뢰를 받고 사람을 자살로 몰고가는 킬러 구지라의 이야기, 세번째는 역시 의뢰를 받고 타겟을 제거하는 전문 칼잡이 새미의 이야기. 이들 살인청부업자들은 저마다 복수, 공명심, 과거의 청산등 각각의 목표를 안고 질주한다. 이들 3명의 생각이 한군데에서 교차하는 순간 운명은 크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사카 소설치고는 폭력이나 살해장면이 비교적 생생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있어서, 조금 의외였다. 그렇지만, 변함 없이 경쾌한 문장이다. 살인 청부업자들이라고는 하지만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매력덩어리라 어쩐지 감정이입 해버린다. 별개의 이야기가 점점 하나로 수렴되는 구성도 역시 특출. 다만, 순수하게 이야기로서는 매우 재미있지만 미스터리로서의 엄청난 극적반전이나 수수께끼를 기대하고 있었다면 다소 빈약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미스터리라기 보다도 치밀하게 짜여진 인생극장, 상급의 엔터테인먼트라는 인상이다. 3명의 주인공의 시점이 수시로 바뀌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수법은 마치 게임처럼 오락성 풍부하지만, 결코 산만하지 않고 그 끝맺음도 확실하다. 그러면서도 사회성을 포함하고 있거나, 문학적인 깊이있는 표현도 여기저기에서 느껴지고, 이래저래 각광받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향기가 물씬 난다. 이사카월드의 숨겨진 재미중에 하나는 서로 다른 작품들끼리의 연계. 다른 작품의 주인공이 또다른 작품에서 스쳐지나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 접점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스호퍼에서는 오듀본의 기도와 살짝 링크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오듀본의 기도를 읽은 사람이라면 찾아보시길. 이책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누군가로부터 자살을 강요받으면 나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죽고 싶어한다"라는 구지라의 대사가 알쏭달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