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버린 여자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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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45

"고통스러운 것은 몸 때문이 아니에요. 2년 동안 여기서 지내면서 깨달은 건데요. 고통스러운 것은 이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견뎌내는 거예요."


이 책의 제목이 다른 제목이었다면 아마 <침묵>처럼 명작이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버린 여자>라는 제목 보다 더 적절한 제목을 떠올릴수는 없다.


"그날 버린 그 여자
지금쯤 어디에 살고 있을까?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알바는 아니지만
이따금 가슴이 아파오네
그날 버린 그 여자"



이 작품은 버린남자인 '요시오카'와 버려진 여자인 '미츠' 두 사람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전쟁 후 먹고살기 힘들어서 지저분한 방에 살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되는데로 살아가는 대학생 '요시오카'는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어느 잡지에 사연을 기재한 '미츠'에게 연락을 한다.

[이것이 내가 그녀를 알게 된 동기였다. 머지않아 내가 버린 그녀를 만나게 된 최초의 계기이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생에 있어 우연이 아닌 인연이 있을 까? 인생에는 원래부터 우연이라는 것이 작용한다. 앞으로 기나긴 일생을 함께 할 부부도 처음에는 우연히 백화점 식당의 옆자리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하찮은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서로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하찮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였다는 것을 알기 위해, 나는 오늘까지의 기나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P.29



변두리 공장에서 어렵게 일하면서 살아가는 '미츠'는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러 간다. 대학생에 대한 환상때문인지 그녀는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요시오카'가 얼마나 불순한지도 모른채... '요시오카'는 '미츠'를 보자마자 큰 혐오감을 느낀다. 그녀의 외모부터 옷차림까지 어느것 하나 맘에 든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성욕 하나만으로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날 우리가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 여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기억하기는 힘들다. 정말로 사랑한 여인이었다면 최초의 데이트 때 손가락을 스친 일, 행복해 하는 여자의 웃는 얼굴까지 평생동안 마음에 새겨져 있겠지만, 그 여자는 내게 있어 우발적인 충동으로 만난 상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불량하게 말하면, '꼬셔서, 범하고, 그렇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 전철이 지나간 밤의 플랫폼에서 차가운 바람에 나뒹구는 빈 담뱃갑처럼 버린 한 여자였다.] P.31



결국 술에 취한 '미츠'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지만, 첫번째 만남에서는 '미츠'의 강한 거부로 실패한다. 하지만 '요시오카'는 자신이 소아마비를 겪고 있다고, 나와 자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것이라고 동정과 협박을 하면서 그녀를 압박한다.


결국 두번째 만남에서 두사람은 관계를 갖는다. '미츠'는 오직 그를 위해서 허락한 것이었지만, '요시오카'는 결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관계를 끝으로 '요시오카'는 그녀와의 연락을 끊는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기다린다. 언젠가는 그가 다시 나를 찾을거라는 한가닥의 희망을 가진 채 그녀는 계속 그렇게 어렵게 힘들게 살아간다. 언제나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손해보면서 살아가는 '미츠'는 그런 여자였다.

['책임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이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너의 슬픔을 다른 사람의 슬픔과 결부시키는 거야. 그리고 나의 십자가는 그 때문에 존재하는 거야.'

그 마지막 말의 의미를 미츠는 잘 몰랐다. 그러나 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아이 입가에 벌겋게 부어오른 부스럼이 그녀의 가슴을 죄어왔다. 누군가가 불행한 것은 슬프다. 세상의 누군가가 괴로워하는 것은 슬프다. 그녀로서는 그 부스럼이 점점 견딜 수 없었다.] P.107



'미츠'는 술집, 빠찡코, 업소를 옮겨다니며 살아가고, '요시오카'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중소기업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사장 딸의 환심을 사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의 결혼을 꿈꾼다. 자신의 추악한 욕심을 감추면서 '요시오카'는 그녀에게 어떤 성적 욕망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미츠'를 다시 찾는다.

[그때, 나는 왠지 상당히 오래 전에 초라한 시래기죽을 먹으면서 나가시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포도 시렁에 손을 뻗어 포도를 따고 있는 처녀들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런 처녀들과 사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애절한 감정과 더불어 또 다른 감정이 가슴에서 솟구쳤다. 그것은 애절한 감정과는 달리 훨씬 타산적이고 교활한 감정이었다.] P.121



'미츠'는 오랫동안 '요시오카'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정말로 그가 연락했을때는 만나기가 두려웠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센인병(나병)'에 걸렸다고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그를 만나고 그에게 사실을 말한다. 하지만 '요시오카'는 도망치듯 그녀를 떠난다. 두번째 도망.

[잘 지냈어요? 얼마전 요시오카 씨가 가게에 왔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어요. 화내지 마세요. 이제는 저를 찾지 마세요. 어쩔 수가 없어요. 전부터 몸이 아팠고……………] P.181



이후 '요시오카'는 사장 딸과 결혼에 성공하고 안정적인 삶을 알아간다. 그리고 어느순간 떠올린다, 내가 버린 여자 '미츠'는 아직 살아 있을까?

[그러나 왜 이렇게 허전할까? 지금의 내게는 작지만 견실한 행복이 있다. 나는 미츠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 행복을 버릴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왜이렇게 허전할까? 만일 미츠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스쳐 지나간 것이 있다면 거기엔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는다는 사실일까? 이 허전함은 그 흔적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그리고 만일 이 수녀가 믿고 있는 신이란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신은 그러한 흔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걸까? 그런데 이 허전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P.300





과연 신이란 있는걸까? 왜 착한사람이 더 고통을 받아야 하는걸까? 왜 나쁜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징벌이 가해지지 않는걸까? 이 책이 그에 대한 답을 주진 않는다. 단지 그런 시련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거라는 이야기기를 한다. 그리고 내가 손해를 보는것은 내가 바보여서가 아니라고 위로해준다.

"우리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스쳐지나간 것이 있다면 거기엔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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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7-17 0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버렸으면서 생각하기도 하네요 그렇게 가끔 생각하는 사람 있겠지만, 생각 안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스쳐 지나는 사람도 뭔가를 남길지... 그러려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아니겠습니다


희선

새파랑 2023-07-17 11:30   좋아요 2 | URL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은 해당 없겠죠? ㅋ 버릴땐 언제고 생각하다니 좀 괘씸하긴 하지만 어쩔수 없나 봅니다~!!

청아 2023-07-17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왜 이러지? 하고 관련 정보를 찾아봤던 기억이 납니다.^^
의외로 주제가 내포하는 의미가 깊었던 것 같은데 다 까먹...ㅋㅋㅋㅋ
새파랑님 별 다섯 주셨다니 준비해두길 잘했네요!


새파랑 2023-07-17 11:31   좋아요 2 | URL
제목이 좀 그래서 그렇지 완전 좋습니다. <침묵>의 인간적인 버젼?

슈사쿠의 <바보> 보다는 좋았습니다~!!

잠자냥 2023-07-17 12:08   좋아요 1 | URL
제목이 참 신파인데 역시 엔도 작품답습니다….

새파랑 2023-07-18 19:44   좋아요 1 | URL
역시 슈사쿠라는 감탄만 했습니다~!! 흔한 이야기도 흔하지 않게 쓰는 엔도의 능력~!!

페넬로페 2023-07-17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사쿠의 작품도 많네요.
이 책도 신과 연관되어 있는 건가요?
저도 참 그것이 의문입니다.
왜 인간의 삶은 공평하지 않고 힘든 사람은 계속 힘들게 사는지요~~

새파랑 2023-07-18 19:45   좋아요 1 | URL
엔도 슈사쿠 작품이 상당히 많습니다 ㅋ 전집으로 내주면 좋을텐데

신과 약간 연관 있습니다~!! 침묵의 현대버젼? ㅋ

독서괭 2023-07-19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한동안 서재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엔도 슈샤쿠군요! 제목이 약간.. 유행가 같아서 그런데, 내용을 보니 제목이 딱이네요 ㅎㅎ 요시오카 땜에 너무 화날 것 같지만 읽어보고 싶어요.

새파랑 2023-07-19 22:32   좋아요 1 | URL
책에서는 저런 노래가 있는걸로 나옵니다. 역시 예리하신 토지괭님~!!

혹시 침묵을 안읽으셨다면 침묵 먼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