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정이현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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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27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람은 이 사람의 방식으로 풍화를 견디는 중이었다.˝


<시간의 흐름> 시리즈 책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해봤자 지금까지 네권밖에 안읽었지만...그냥 좋다. 원래 좋아하는데는 이유가 없는거다.


이번에 읽은 책은 나름 신작인 <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는 세편의 단편을 모은 책이다. 정이현, 임솔아, 정지돈 세분의 작가가 참가하였다. 일단 책 제목부터 너무 마음에 들었다. 사랑, 이별, 죽음 이 세 단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키워드 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표지도 너무 깔끔해서 이건 안살수가 없었다.


짧은 세 단편 모두 좋았다. 특히 한번 읽었을때는 잘 몰랐었는데, 두번 읽으니까 처음에 못느꼈던 감정들을 느꼈다. 특이한 점은 사랑, 이별,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키워드를 주제로 했지만, 내용은 좀 일반적이진 않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사랑 : 우리가 떠난 해변에>

14년전에 일반인들의 짝짓기 연애 프로그램인 ‘러브 애드벌룬‘이 있었다고 한다. 10회분만 방영하고 프로그램은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 프로그램의 모토는 ‘사회적 조건에 종속된 사랑이 진짜 사랑일까?‘ 였다. 출연자의 모든 사회적 배경은 밝히지 않은채 오직 그 사람 하나만을 가지고 서로를 관찰한다. 그리고 1차 커플이 만들어진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오고, 서로는 서로의 사회적 배경을 밝혀야 한다. 만약 상대방의 배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커플은 사랑의 걸음을 멈춰야 한다.

[출연자들이 사흘 동안 서로의 신상에 대해 알게 되는 거라곤 이름이 전부였다. 노정훈 씨, 이혜정 씨 그리고 다른 모든 출연자들도 캠프 애드벌룬 안에서 오직 한명의 개인으로만 존재했다. ‘사회적 조건에 종속된 사랑 이 진짜 사랑일까.‘ 선우는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 의도에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고 기억했다. ‘조건에 얽매인 결혼 상대자로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대 인간의 만남. 네이키드 상태에서 피어나는 진실한 사랑을 찾기 위해 기획되었다.‘ 유치하고 조악한 문장이었다.] P.20



피디인 ‘선우‘는 14년전에 ‘러브 애드벌룬‘에서 본 한 커플을 기억하고 있었다. 커플이 된 두 사람은 서로의 사회적 배경을 밝히는데, 너무나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이를 극복하고 진짜 커플이된다. 그리고 결혼까지 했다고 한다. ‘선우‘는 이 커플이 아직도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 하며, 두 사람을 대상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한다. 그래서 주인공인 ‘설‘과 함께(선우가 주인공이 아니다...) 두 사람을 찾아간다. 과연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사회적 배경의 차이는 잘 극복했을까?

[두 사람은 모든 게 달랐어요. 그냥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보였어요.태어날 때도 자라는 동안에도 어른이 되어서 경험한 삶에도 접점과 교차점이 없는 사람들. 이런 두 사람이 사흘 만에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 을까요. 그게 경이롭고 끔찍하게 불가사의했어요! 선우의 느낌표가 환청처럼 귓가에 부서졌다. 두 사람 의 유튜브 영상에서 추천 수가 가장 많은 댓글은 다음과 같았다.

‘보고 또 봅니다. 사랑의 첫 순간에 대해 생각하면 저 는 항상 이 장면이 떠오릅니다.‘] P.24



사랑하는데 있어서 재산, 집안, 직업 등 그 사람 자체가 아닌 주위 조건들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조건을 신경쓰는 사람을 속물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상과 현실에 있어서 사랑만큼 큰 괴리를 보여주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고정불변한 틀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도 착각 아닌가요? 사랑은 감정인데 네모 통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원형 통에 담으면 또 원형이 되는 거죠.] P.35







<이별 : 쉴 곳>

이별이란게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이 작품은 자신을 불안하게 했었던 과거의 기억과 나를 속박했던 현실과의 이별을 그린 작품이다.


누구나 어린시절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주인공인 민영은 어린시절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스무살 정도의 나이차가 나는 오빠와 새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린시절 오빠와 새언니는 자주 싸웠고, 민영은 그때마다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졌고, 민영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몸을 떠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 민영은 사람을 피하게 된다.


하지만 뭐든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는법, 민영은 이제 오빠와 새언니가 싸우더라도 떨지 않는다. 그리고 직장 사람들과 있으면서도, 회사를 떠나면서도 예전과는 다르게 마음이 편했다. 자신을 둘러싼 불안과 이별하게 된 민영은 조금 더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언니, 해볼래? 자기가 운전하면 멀미가 안 나.˝
˝안 한 지 오래됐는데.˝
˝그냥 해봐. 달걀 꺼내듯이.˝
그럴까? 라고 말하며 정화는 활짝 웃었다. 민영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정화와 자리를 바꿨다. 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잔뜩 긴장한 듯 정화는 운전대에 상체를 바짝 붙였다. 차가 크게 휘청였고 정화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웅덩이였다. 정화의 손이 떨려왔다. 민영은 비상등을 켰다. 한쪽 손을 정화의 손 위에 포갰다.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
민영은 민기에게 배운 말을 뱉었다. 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P.69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무뎌지게 해주는건 확실히 맞는것 같다. 지쳐가게 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죽음 :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몸과 마음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 몸은 의식에 따라 다르게 인지될 수 있는 고깃덩이에 불과해.˝



(당연히 둘을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없지만...)
나라는 존재를 대표하는건 육체일까? 정신일까? 이 작품은 이런 물음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육체보다는 정신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 작품을 읽고나서 생각이 약간 바꼈다. 왜인지 궁금하시다면? 이 단편을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작가의 상상력이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 책에 실린 세편의 단편이 다 좋았지만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이 작품을 선택하겠다. (그래서 자세한 줄거리는 생략....ㅎㅎ)

[만약 그의 기억 역시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를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냐고 졸탄은 물었다. 부활한 그가 목소리도 얼굴도 전과 다르지만, 아무도 모르는 모어와의 기억을 정확히 떠올릴 수 있고, 되살아난 스스로를 인지한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그건 다르죠. 몸이 다르면 존재도 달라지는 거니까.]

[그럼 심장 이식수술을 한 사람은요? 전신 성형을 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사고로 뇌에 손상이 생겨서 성격이 전혀 달라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인가요? 나를 나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P.95



어떤 단어를 듣고 떠올리는 건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내가 떠올렸던 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이미지와 이 책에서 그리는 이미지는 많이 달랐지만, 다르기 때문에 더 신선하게 읽혔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좋은 작가 세분을 알게 되어서 너무 좋았다. 작가님들의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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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19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작품을 읽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랑과 죽음 둘 다 관심이 가네요.
사랑, 에서 그 커플은 잘 살고 있는지 저도 궁금하네요. 그리고 어떤 노력이 필요했는지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차이를 극복할 수 있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는지 궁금해요.
장바구니에 담겠습니다.^^

새파랑 2023-05-19 12:51   좋아요 1 | URL
음... 잘살지는 못한거 같아요 ㅋ

이 책 좀 얇고 비싸지만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거 같아요. 전 대만족입니다~!!

페넬로페 2023-05-20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 이별, 죽음이 우리 주위의 거의 전부를 이루고 있는데 뻔할 것 같아도 다양한 스토리가 수없이 나오기도 하는듯요^^
저는 연애관련 예능을 좋아하지 않는데 결국 사람들이 조건으로 실망하고 애정하는 것이 보기 싫더라고요^^

새파랑 2023-05-20 11:15   좋아요 1 | URL
조건을 보지 않고 사람 그 자체로만 사람을 바라보기는 쉽지 않겠죠? 그래도 페넬로페님 같은 분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저도 연애관련 예능을 안봅니다. 티비 자체를 안보기는 하지만요 ㅎㅎ

희선 2023-05-20 0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별 하면 사람하고 헤어지는 게 먼저 떠오르는데 불안과 헤어진다니 좋네요 저도 헤어지고 싶군요 어려울 것 같아요 소설에선 그런 거 잘 하는구나 하기도 해요 실제로는 참 어려운데...


희선

새파랑 2023-05-20 11:16   좋아요 0 | URL
사람이든 습관이든 뭐든지 헤어지는건 정말 어려운거 같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ㅜㅜ

얄라알라 2023-06-08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역시 당선글 목록에서 새파랑님의 이름을 봅니다! 역시!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3-06-08 15:53   좋아요 0 | URL
와우 ㅋ 저번달에 별로 못읽었는데 당첨이라니 ㅋ 감사합니다~!! 책 또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