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감싸고 있는 가을의 풍경은 음울하고 슬퍼 보였다. 이 순 간 마샤와 이바노프를 집으로 실어 갈 기차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잿 빛 공간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사람에게 위안과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역시 사람의 마음밖에 없다. - P9
이바노프는 마샤의 머리카락에서 가을 숲의 낙엽 냄새가 난다고, 영원히 이 냄새를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철길에서 조금 물러 나와 이바노프는 마샤와 자기가 먹을 계란 프라이를 만들기 위해 작은 모닥불을 지폈다. - P11
이바노프는 철도 사령부에 체류 신고를 마치고 마샤와 함께 이 도시에 머물렀다. 사실 그는 4년째 보지 못한 아내와 두 자식이 기 다리고 있는 집으로 하루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바노프는 가족과의 설렘과 기쁨의 재회를 뒤로 미루고 있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렇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유의 시간을 좀더갖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P11
"날 영원히 기억한다고요? 그러실 필요없어요. 어차피 잊게 될 테니까요. 난 아저씨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 저를 잊어주세요." - P12
기차가 도착했고, 그들은 작별을 했다. 이바노프는 떠났다. 그리 고 그는 혼자 남은 마샤가 울음을 터뜨리는 걸 보지 못했다. 마샤는 여자친구건 동료건 하루라도 자신과 운명을 함께했던 사람이면 그 누구도 잊지 못했다. - P12
이바노프는 다시 마샤의 냄새를,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던 향취를 떠올렸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숲속나 뭇잎의, 풀이 무성히 자란 외진 오솔길의 냄새가, 집안의 평온함이 아닌 불안한 삶의 냄새가 풍겼다. 목욕탕 종업원의 딸 마사, 그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을까? 신의 가호가 있기를. - P16
한편 이바노프에게 고향집은 여전히 이상하고 낯설었다. 아내는 피로에 지친 얼굴이었지만, 예전의 모습 그대로 어여쁘고 다소곳했 다. 당연히 그래야 하듯 많이 자라긴 했지만, 아이들도 자신에게서 태어난 그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왠지 이바노프는 귀향의 기쁨을 만끽할 수 없었다. 가족들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것인가. - P21
"난 당신을 그리워했어요, 알료샤. 물론, 옆에 아이들이 있었지 만, 그 애들이 당신을 대신할 순 없었어요. 난 항상 당신만을 기다렸 어요. 이 길고 무시무시한 몇 년의 시간을 아침이면 잠에서 깨는 것 조차 두려웠어요." - P29
우리 집에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건 없었어요. 우리도 필요한 건 없었죠. 우리도 그 사람이 가져다 주는 선물이 없어도 살 수 있어요. 그 동안에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람은 다 른 사람을 도와주면 자기 마음이 좀 나아진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죽은 식구들을 조금은 잊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그 사람을 한번 보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 P31
마샤가 날 기다리지는 않겠지. 이바노프는 생각했다. ‘그녀는 내가 결국 자기를 잊게 될 거라고 했지. 우리가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하지만 이제 난 그녀에게 영원히 돌아갈거야. - P42
모든 사랑은 무언가에 대한 필요와 외로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못하고 외로워하지도 않는다면 결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 P43
이바노프는 눈을 감았다. 기진맥진해서 넘어지는 아이들을 더 이상은 애처로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순간 갑자기 그는 가슴이 뜨 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의 내부에 갇혀 평생을 힘겹게 뛰고 있던 심장이 그의 전신을 뜨거움과 전율로 휘감으며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듯했다. 갑자기 그가 예전에 알던 모든 것이 좀더 정확히, 그리고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예전에 그는 다른 사람의 삶을 자기의 이기심과 개인적인 이해관계라는 울타리 속에서 바라봤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타인의 삶이 열린 가슴을 통해 다가왔다. - P44
남편은 어린 시절 이후로는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고, 자기 얼굴이 가지는 의미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P50
"잠시 떠난 거지, 죽은 건 아니잖아. 다시 돌아올거야!"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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