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124

여자!
그것은 내가 태어난 그날부터 오늘까지
나를 부단히 이끌어온,
아니, 아마도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나를 이끌어줄 유일한 빛.
암흑 속에 떠다니는 배를 비춰주는
유일한 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많이 읽은건 아니지만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게 느껴진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평범하지 않고, 성에 대한 집착이 크며, 다소 변태직이고 가학적이다. 그럼에도 거부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들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주받은 재능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에는 <만>과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두 중편이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론 내가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들 중에서 두 작품 모두 세손가락안에 들어간다.



<만>은 네 남녀의 엽기적인 애정행각과 서로 속고 속이면서 꼬여있는 인긴관계를 그리고 있는데, 그의 다른 작품인 <소년>,  <치인의 사랑>,  <열쇠>랑 분위기가 비슷하다.





반면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권력자에게 젊은 아내를 빼앗긴 한 노인의 사무치는 그리움과, 그 노인과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시게모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슌킨이야기>랑 비슷하다. 그런데 <슌킨이야기>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다. 



<시게모토>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시게모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잊기 위해 부정관을 행하는 장면이었다.

[시게모토의 일기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늙은 대납언도 역시 그렇게 부정관을 닦으려 했던 것이다. 이 대납언의 경우는, 잃어버렸던 한마리 학(鶴)이 언제까지나 눈앞에서 사라지지를 않아, 애타는 생각을 참지 못하고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 노력했음이 확실하다. 그날 밤 시게모토의 아버지는 그렇게 친자식을 상대로, 부정관의 수행법부터 시작해 자기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를 저버린 그분을 향한 원망과 뜨거운 그리움, 정념에서 벗어나고 싶다, 마음속 깊이 각인된 그이의 미모를 심장 속에서 몽땅 씻어내어 애달픈 괴로움에서 풀려나고 싶다, 이런 자신이 미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쨌든 지금 그 때문에 수행을 하는 것이다, 하고털어놓았다.]  P.307



부정관이란 불교용어로 ‘시체가 부패하는 과정이나 신체의 부정함을 관찰하여 몸에 대한 애착이나 감각적 욕망 등을 끊는 수행법‘이라고 하는데, 시게모토의 아버지는 자신을 떠난(시게모토 아버지가 반강제제으로 어쩔수 없이 보낸거긴 했지만) 아내를 잊을 수 없었다. 모든 생활이 정지해 버린다. 결국 어떻게든 그녀를 잊기 위해 시체를 찾아다니면서 이 부정관을 행한다. 도대체 아내를 얼마나 잊고 싶었기에, 얼마나 잊을 수 없었기에, 얼마나 그리웠기에 그랬던 걸까? 장면들이 다소 섬뜩하게 그려져 있지만 왠지 모를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또한 시게모토가 40년만에 한밤 중 깊은 산속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정말 예술이었다. 이런게 바로 재회라는 걸까?

[시게모토는 다시 한 번 불렀다. 그는 맨땅 위에 꿇어앉아, 아래에서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그녀의 무릎에 온몸을 내맡기듯 기댔다. 하얀 모자 속에 파묻힌 어머니의 얼굴은, 꽃무더기를 뚫고 내리비치는 달빛을 받아 뿌옇게 보였지만 여전히 귀엽고 자그마했으며 마치 원광(圓光)을 뒤에 달고 있는 듯했다. 40년 전의 어느 봄날, 휘장 그늘 속에서 그 품에 안겼을 적의 기억이 금세 영롱하게 되살아나고, 한순간에 시게모토는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어머니 손에 들린 황매화 가지를 거칠게 젖혀내면서 자신의 얼굴을 어머니 얼굴 쪽으로 더욱더 디밀었다. 어머니의 검정 소매에 스민 향내가 문득 먼 옛날의 잔향(殘)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마치 응석이라도 부리듯 어머니 소매에 얼굴을 문지르면서 눈물을 마음껏 쏟아냈다.]  P.324



위에 쓴 인상적인 두장면은 작품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전반부에는 다소 엽기적인 장면도 있다. 특히 짝사랑 하는 여인인 ‘지쥬노기미‘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자 그녀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그녀의 변기통을 훔치는 ‘헤이주‘의 이야기는 엽기 그 자체다. 그는 훔친 변기통에서 조차 향긋한 흑방향을 느낄 정도로 그녀에게 빠져있던 것이다. 그리고 냄새를 맡은 이후 엽기적인 행동을 행한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리뷰를 쓰기 위해서 밑줄도 긋고 했어야 했는데 정신없이 읽는다고 밑줄도 얼마 못그었다. 그만큼 좋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처음 접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작품속에 변태적인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Ps 1.  리뷰가 좀 부실해서... 그동안 내가 읽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 평점을 매겨본다면,
(내가 대가의 작품에 점수를 매긴다는게 좀 그렇지만)


1. <만,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100점 : 완벽 완벽

2. <슌킨 이야기> 99점 : 완벽하나 분량이 아쉬움

3. <미친 사랑> 95점 : 읽는 재미 보장

4. <소년> 93점 : <문신>, <소년> 강추, 잔인, <작은 왕국>은 약간 아쉬움

5. <열쇠> 90점 : 내가 처음 읽은 준이치로의 작품. 그때는 엽기적이어서 별 네개를 줬는데,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읽으면 95점 이상 줄거 같다.

6. <요시노 구즈> 70점  :  일단 한자가 너무 많고 역사이야기가 초반에 지루하게 전개되어서 읽기 힘들다.



Ps 2.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별로 안읽은것 같다. 다음에는 그 유명한 <세설>을 읽어야 겠다. 이러다 또 1위가 바뀌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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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0-18 20: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게모토 이야기 저도 좋았어요 새파랑님. 특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고 쓰신 부분 ㅎㅎ 넘 웃깁니다 ㅋㅋ 세설이야기 스콧님이 재미있다고 추천하는 댓글 달아주셨는데, 그 당시 김영하작가님이 추천하면서 도서관 인기 도서로 등극 ㅠㅠ 그러다 잊었네요 ㅎㅎ

새파랑 2022-10-18 21:18   좋아요 3 | URL
전 <세설> 중고로 구해놓았습니다 ㅋ 아 리뷰 잘 써보고 싶었는데 야근한다고 해서 급하게 막 썼습니다. 리뷰를 써야 퇴근해서 다른책을 맘편하게 읽을수 있다는 ㅡㅡ

청아 2022-10-18 20: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팟케에서 듣고 <만>을 꼭 읽어야지 사두었는데 역시 새파랑님 별5개!! 그리고 100점ㅋㅋㅋ밑줄 못 그을 정도면 말 다했네요^^*

새파랑 2022-10-18 21:19   좋아요 3 | URL
<만>도 재미있고 좋은데, <시게모토>가 전 더 좋더라구요~!! 미미님 책장에 아마 이 책이 째려보고 있을겁니다 ㅋ

페넬로페 2022-10-18 21: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으로서 새파랑님의 평점 순위, 참고 하겠습니다.
약간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움이 있는 문장이 어떨지 기대되는데요^^

새파랑 2022-10-18 21:20   좋아요 3 | URL
이 책은 페넬로페님이 좋아하실거 같아요 ㅋ 다소 충격적인 장면만 잘 넘어간다면 아주 좋습니다~!!

파이버 2022-10-18 2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내용은 새파랑님께서 써주신 것만으로도 충격인데 새파랑님께서 완벽x2 이라고 해주시니 궁금하네요~ 일본 탐미주의 소설들이 엽기적이지만 매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2-10-18 21:21   좋아요 3 | URL
아 엽기적인데 몰입이 되는 ㅋ 이런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매력인가 봅니다. 읽으시면 재미는 있으실거 같아요 ^^ 다만 호불호갈릴 수 있습니다 ㅋ

coolcat329 2022-10-19 09: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변태적인 아름다움 ㅋㅋ 입문작품으로 이 책을 추천하시니 기억해 두겠습니다. 변기통하니 위화의 <형제>가 떠오르네요 ㅋ

새파랑 2022-10-19 12:30   좋아요 3 | URL
요새 책읽을 시간이 부족해서 우울했는데 이 책읽고 힘을 얻었습니다 ㅋ 딱 제취항 ㅋ 다른 변기통 이야기가 또 있나보군요 ㅎㅎ

희선 2022-10-20 0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니자키 준이치로 책 많이 보셨네요 저는 한권도 못 봤는데... 지금까지 본 책에서 이 책이 가장 좋으셨군요 다음에 《세설》을 보시면 그게 1위가 되는 건 아닐지... 그건 좀 길어서 좋을 듯하네요


희선

새파랑 2022-10-20 07:15   좋아요 2 | URL
일본문학 전문가이신 희선님이 한권도 안보셨다니 놀랍습니다 ^^

페크pek0501 2022-10-23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만, 시게모토~ 를 읽었어요. 빨려 들어가는 이야기의 저자라 생각해요.

새파랑 2022-10-25 06:58   좋아요 0 | URL
페크님도 읽으셨군요~!! 이 책 완전 좋았습니다 ^^ 전 요런 재미있고 잘읽히는 작품이 좋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