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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잡이 여인 ㅣ 범우문고 74
패터 한트케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N22091
"밝은 대낮에 여인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밋밋하고 얼어붙은 곧바른 길을 걸어갔다. 그녀는 계속 똑바로 걸었다. 어두워질 때까지 여인은 그렇게 걸어갔다."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을수는 없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변한다. 다른사람이 변한 걸 느꼈을때는 '갑자기 애가 왜이래?' 이렇게 황당해 할 수도 있지만 그건 갑자기가 아니다. 조금씩이다.
페터 한트케의 <왼손잡이 여인>의 여인 '마리안느'도 마찬가지다. 남편인 '부르노'는 갑작스런 이별통보에 아마 황당했을 것이다. 자신의 별 대수롭지도 않은 말 때문에 갑자기 부인이 헤어지자고 말한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헤어짐이 잠깐일거라 오판하게 된다.
["당신이 나를 떠나리라는 것, 당신이 나를 혼자 버려 두리라는 깨달음이었어요. 바로 그거예요. 부르노, 가세요.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요."] P.32
하지만 그녀에게 헤어짐은 잠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꿈꿔왔고, 권태에 따른 새로운 시작이었던 것이다. 왜 그녀가 그런 헤어짐을 선택했는지 페터 한트케는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3인칭 관찰자로서 그녀를 바라보고 차분히 그릴 뿐이다. 그럼에도 독자는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작가가 의도한 생각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프란치스카가 당신을 뭐라고 불렀는지 알아? 개인적인 신비주의자라는 거야. 맞아, 당신은 신비주의자야. 신비주의자! 제기랄! 당신, 병이야. 그래서 나는 프란치스카에게 한두 번 전기치료만 하면 당신은 다시 이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어."] P.45
갑자기 남편과 헤어져서 아들과 단둘이 살게된 '마리안느'의 앞날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다. 아들은 더럽게 말도 안듣고 자신의 번역일을 방해하기만 하며, 남편인 '부르노'는 자주 찾아와 그녀를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하며, 주변 남자들은 그녀에게 추근거리기만 한다.
["없어, 난 행복하고 싶지가 않아. 기껏 만족할 뿐이야, 난 행복이 두려워. 난 행복을 견뎌 내지 못할 것만 같아. 머릿속에서 말이야. 난 영원히 미치거나 죽고 말 거야.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를 살해할지도 모르지."] P.88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고독을 그대로 밀고 나간다. 누구와도 가까워지는걸 원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해나간다. 미래에 또 어떻게 마음이 바뀔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선택을 만족해 한다. 뭐 그게 인생이지, 한결같이 산다는게 어디 쉬운일인가.
[그렇게 모든 사람들은 함께 모여 제나름의 방식대로 일상의 삶을 계속한다. 생각을 하기도 안 하기도 하면서 비록 모든 것이 노름에 걸린 엄청난 경우에도 사람들은 제각기 일상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화젯거리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양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 P.137
긴 이별이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이후 사년(?)만에 페터 한트케의 <완손잡이 여인>을 접했다. 내가 읽은 그의 두번째 작품. <왼손잡이 여인>은 <긴 이별...> 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약간 한트케가 힘을 빼고 쓴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한트케가 써내려가는 담담한 문장들은 대단히 매력적이었고, 순간순간을 포착해 써내려간 장면은 영화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긴 이별...>을 재독해 봐야겠다 ^^
"넌 너를 드러내지 않았어. 그리고 아무도 너를 비굴하게 하지는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