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엔도 슈사쿠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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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2080

"세계는 넓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책임감 때문에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옆에서 봤을때는 답답해 보이긴 하지만 멈출수는 없다. 그에게는 그 일이 운명이기 때문에, 원망 한마디 못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배하던 시절의 일본, 당시 천주교의 두 계파인 '베드로회'와 '바울회'는 일본에 대한 포교를 진행중이었지만, 일본 국민이 가진 토속 신앙과 생각의 차이로 쉽게 되지는 않았고,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신도(기리시탄)들을 추방하고 있었다. 특히 '바울회' 소속인 "벨라스코" 신부는 일본에서 제대로된 포교가 안된 원인을 일본 국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베드로회'의 무리한 포교라 판단하고, 만약 '바울회'의 자신이 일본의 주교가 된다면 일본에 대한 포교를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는 그의 무리한 망상이었음이 마지막에는 밝혀지게 되지만.

[포교도 외교처럼 술책을 부리고 흥정을 하고 위협을 하고 때로는 타협도 해야 한다. 나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면 그러는 것이 꼭 꺼림칙하고 지저분한 행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포교를 위해서라면 눈을 감아야 하는 일도 있다.] P.176



그러던 "벨라스코" 신부에게 기회가 왔다. 아직 기리시탄이 허용되는 지역인 도호쿠에서 그를 부른 것이다. 도호쿠의 영주는 자신의 영내에 무역항을 만들어 멕시코와 교역하는 것을 희망하고 있었고, 그 통역 임무를 "벨라스코"에 부탁한 것이다. 그 대신 도호쿠 지역의 기리시탄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개미 같은 인종이다. 그들은 뭐든지 하려고 든다. 선교사는 이 순간 왠지 웅덩이를 만나면 그 일부가 자기 몸을 희생하여 다리가 됨으로써 동료를 건너게 하는 개미를 떠올렸다. 일본인은 그런 지혜를 가진 검은 개미떼다.] P.36



이미 일본의 많은 영지에서 기리시탄들이 처형되고 있었고, 이 소문은 외국으로까지 퍼져 있기 때문에 멕시코(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와의 교역 성사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벨라스코"는 일본에서의 포교를 위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소속인 '바울회'를 통해 도호쿠 영주의 서신을 교황에게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서신의 내용은 도호쿠 영지에서는 기리시탄을 친절하게 대하고 신부가 모이는 것을 기뻐하며 수많은 교회를 세우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 그런데 과연 이러한 "벨라스코"의 행위를 오직 종교적인 순수한 목적으로 볼 수 있을까? 자신의 사리사욕은 전혀 없는걸까? 과연 실현될 수 있는걸까?

[그들에게는 이익을 주고 우리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다.] P.41



결국 이 계획은 시행되게 되고, 도호쿠의 영주는 포획한 스페인 기술자들을 이용해 멕시코 까지 항해할 수 있는 큰 배를 건조하며, 멕시코에 가는 사절단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하세쿠라 로쿠에몬"등 네명을 선정한다. 사절단이라 하기에는 이 네명은 다소 급이 낮은 사무라이 계층이었지만 감추어진 이유 때문에 이들이 선정된다. 영주는 "로쿠에몬"에게 사절단의 임무를 성공하고 돌아오면 예전에 가문의 땅이었지만 현재는 잃어버린 구로카와의 땅을 돌려 줄수도 있다는 조건을 내건다.


현재 살고 있는 골짜기 땅에서 가족과 함게 평화롭게 사는것에 만족하고 있었던 그이지만, 가문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사무라이 "로쿠에몬", 그는 과연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화창하다. 골짜기는 이미 봄이다. 잡목림에는 하얀 꽃이 피고 밭에서는 종다리가 울고 있었다. 앞으로 오랫동안 볼수 없는 이 광경을 잊지 않으려고 사무라이는 말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P.92



"벨라스코"신부와 "로쿠에몬" 등의 일본 사절단, 그리고 배에 편승한 일본 상인들은 일본을 출항해서 멕시코로 향한다. 단 한번도 일본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던 그들은 광활하고 거센 태평양을 보고 놀라움을 느낀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가끔씩 맞닥드리는 폭풍을 경험한 "로쿠에몬"은 그가 있던 일본과 골짜기는 단지 작은 새장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무라이는 현기증이 났다. 이마를 때리는 바람에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동쪽도 파도가 미쳐 날뛰는 바다. 서쪽도 파도가 싸우는 바다. 남쪽도 북쪽도 보이는 거라고는 바다뿐, 난생처음 사무라이는 바다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알았다. 그 바다를 앞에 두고 있으니 그가 살던 골짜기는 한 알의 겨자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P.109



"벨라스코" 신부는 배에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스페인어를 교육한다. 이와 병행하여 포교를 하는데, 상인들에게는 기리시탄이 되면 쉽게 교역을 할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런데 진심없이, 단순히 타인의 이익을 위한 포교가 진정한 포교인 걸까? "벨라스코" 신부는 일본의 주교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너무 과도한 욕심을 내는건 아닐까? 상인들은 기리시탄으로 전향하지만 "로쿠에몬" 등을 포함한 사절단들은 그들의 근원을 저버릴 수 없어서 "벨라스코"신부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신부님들의 진정한 행복이란 게 일본에는 지나치게 독합니다. 강한 약은 어떤 사람의 몸에는 독으로 변합니다. 신부님이 말하는 더없는 행복은 일본에 그런 독입니다. 멕시코로 와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곳 멕시코도 스페인 배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조용히 살았을 텐데 말이지요. 신부님들의 더없는 행복이 이 나라를 흐트러트렸습니다." ] P.207



우여곡절 끝에 배는 멕시코의 아카풀코 항에 도착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한다. 기리시탄에 대한 일본의 박해가 심하다는 소문은 벌써 맥시코까지 퍼져 있었고, 공식사절로 보기에는 일본의 사절단의 급이 낮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멕시코에서는 아무리 영주의 친서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결정할 수는 없다고 하고, 결국 "벨라스코" 신부와 "로쿠에몬" 등의 사절단은 다시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으로 향한다. 스페인 왕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고 나서도 두 번이나 더 계절풍에 의한 폭풍을 만나고 드디어 조국 스페인의 산루카르항을 멀리서 바라본 것은 베라쿠르스를 떠난 지 열달 만이었다.] P.258



"벨라스코" 신부는 일본의 포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없애기 위해 한가지 계략을 생각해내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 사절단을 스페인 국왕이 보고있는 앞에서 기리스탄으로 전향시키는 것이었다. "로쿠에몬" 역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떠한 성과라도 내어 돌아가야만 잃어버린 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가족과 가문에 고개를 들 수 있기에, 자신의 임무를 달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과연 현재까지도 유효한 걸까? 고향을 떠난지 오래되서인지 가족이 그립기만 한 "로쿠에몬". 그는 무엇을 위해 이런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걸까? 결국 그는 "기리시탄"으로 전항한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해온 모든 것이 눈사태처럼 무너져 내린 듯한 공허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해온 것은 모두 헛고생이 되고 의도한 일은 모두 무의미해지며 신앙했던 것은 사실 자기만족을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눈앞에 들이대진 것 같았다. 그때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전보다 더 큰 홍소가 울려 퍼졌다.] P.338



반신반의 했지만 그래도 어쨋든 믿을만한 사람이 "벨라스코" 신부 뿐이었기에 사절단은 여기까지 왔다. 표면적이긴 하지만 '기리시탄'으로 전향까지 한다. 하지만 스페인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로마 교황청 까지 가지만 그들의 목적은 물거품이 된다. 이미 일본은 전 국토에 포교 금지령을 내렸고, '기리시탄'은 추방되거나 처형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교황청은 더이상 희생을 보고만 있을 수 없기에 일본에 대한 포교를 포기한다. 처음부터 지킬 수 없었던 약속들, 일본을 떠난지 너무 오래되어서 변해버린 환경, 이제 그들은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게다가 일본에서 금지하고 있는 '기리시탄'을 받아들이기 까지한 "로쿠에몬"과 사절단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일본에 대한 포교의 욕망이 가득한 "벨라스코"는 이대로 물러설까?

[우리는 함께 좌절한 자였다. 불확실한 샘을 찾아 오늘도 내일도 사막을 여행하는 유랑민과 비슷했다. 입 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아도 그들은 믿고 있던 영주와 평정소에 배신당했다는 슬픔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내가 꿈꾸는 것을 주님이 버린 고통을 맛보았다. 지금에야 비로소 배신당한 자와 버림받은 자 사이에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듯한 우정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P.353

(이후 줄거리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생략한다.)





<사무라이>를 읽는 내내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운명을 직접 선택할 수도 없고 시대의 조류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과 고뇌가 느껴졌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탐욕에 눈이 먼 권력자들 때문에 쉽게 버려지고, 어디에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 그들이 헛되이 보낸 4년이라는 긴 시간은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할까? 과연 사람이 사람을 믿는게 맞는걸까? 이러한 억울함을 달래줄 신은 어디에 있는걸까?

[그 미지의 운명, 그것을 끝내고 마침내 돌아왔다. 기쁨도 없고, 공허한 기분과 피로감만 남아 있는 건 왜일까. 너무 많은 것을 봤기 때문에 보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일까. 너무 많은 것을 맛보았기 때문에 맛보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일까.] P.432



시대적 상황은 다르지만 "로쿠에몬"이 처한 상황과 내가 처한 상황이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이젠 무언가를 선택할 수도 없이 멀리 달려와서 돌아갈수 없는 삶. 그래도 어딘가에 잊을 수 없고, 믿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위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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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6-09 22: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샤쿠의 작품 중 사무라이 한 편 읽었는데 넘 좋았어요.
주어진 임무를 그저 묵묵히 수행하는 사무라이들도 그렇고 종교의 목적이 다르지만 그것이 스며들고야 마는 어떤 힘도 보았고요^^
새파랑님의 글에 엔도 슈샤쿠의 문장이 느껴집니다**

새파랑 2022-06-09 22:48   좋아요 4 | URL
페넬로페님은 사무라이만 읽으셨군요~!! 전 이제 네번째 엔도 슈사쿠의 읽은 책입니다^^ 특이하게도 출판사가 다 다르네요~!! 저에겐 네번다 백점이었습니다^^

미미 2022-06-09 22:2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상깊은 문장이 많았어요.
새파랑님 읽으실때 따라 읽기를
잘했습니다. 올해 최고의 소설!!
결말 부분 읽다가 통곡했네요ㅠ
어떻게 이런 글을 쓰는지 엔도 슈샤쿠에게 또한번 감동받음요

새파랑 2022-06-09 22:50   좋아요 4 | URL
엔도 슈사쿠 정말 대단한거 같아요. <집구석들>을 읽고 나서 그런지 정화(?)가 되었습니다~!! 이제 미미님 엔도 슈사쿠 전작 하실거 같아요^^

그레이스 2022-06-09 22: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신유박해때 죽거나 유배당한 정약용 가문과 이벽, 황사영, 이승훈...
이들도 생각나네요.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신앙이든 새로운 학문이든을 선택한 결과로 거센 파도에 휩쓸린 자들!
그들의 선택을 바라보는 가치관은 각자의 몫이고, 자신의 신념을 따르겠죠?!

새파랑 2022-06-09 22:54   좋아요 4 | URL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삼키는 사무라이의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참 그랬습니다. 마지막도 그렇고~~ 제가 너무 제 주관(?)대로 리뷰를 쓴거 같아요 ㅋ 전 사무라이에 너무 이입해서 읽었어요 😅

희선 2022-06-10 03: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무사는 무사로 살아가는 그런 게 생각나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걸려서 다른 나라에 갔는데 그 일은 제대로 되지도 않고, 벨라스코는 자기 이익만 생각하다니... 선교사가 그렇지만은 않을 텐데, 실제 그런 사람도 있을 듯합니다


희선

새파랑 2022-06-10 06:12   좋아요 3 | URL
상관의 지시를 따를 수 밖에 없는 무사의 운명인거 같아요. 벨라스코도 목적 자체는 나쁘다고 할 없지만 조금 더 사람든에게 진심이었다면 어땠을까란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