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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석별.옛날이야기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서재곤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세월은 인간의 구원이다. 망각은 인간의 구원이다.
"다자이 오사무"하면 <인간실격>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그 다음이 아마 <사양>일텐데, 개인적으로 두 작품 모두 인상적으로 읽어서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올해 여름에 민음사에서 새로 출판된 <만년>을 나오자 마자 바로 구매해서 읽었는데, 이 작품 역시 너무 좋았다. 개인적으로 꼽은 세 작품의 공통된 키워드는 '우울'이었다.
특정 작가의 책을 몇편 읽다보면 그 작가만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이러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예로 들자면 "하루키"에게는 기발함을, "도선생님"에게는 '정신해부학'을, "소세키"에게는 '고독'을, "에밀졸라"에게는 '자연주의'를, "로맹가리"에게는 '낭만'을, "조셉 콘래드"에게는 '어둠'을, "필립 로스"에게는 '분노'를 기대하면서 책을 읽는다.
"다자이 오사무"에게 내가 기대한 분위기는 '우울' 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그의 단편 <쓰가루>, <석별>, <옛날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던 "다자이 오사무"의 '우울'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약간은 밝고 위트있는 작품들이었다.
일단 이 작품들이 쓰여진 시기를 고려해야 하는데 이 작품들은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향하던 1944년과 1945년에 쓰여졌고, 일본이 패전을 향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울함 보다는 약간은 밝고 일본인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소재로 이야기를 썼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소재가 아니면 책의 출판 자체가 어렵지 않았을가란 추측도 해본다.
1. 첫번째 작품인 <쓰가루>는 주인공인 "나"의 고향인 '쓰가루' 지역의 방문기이다. 성인이 된 '나'는 어린시절 자라난 곳과 즐겨찾던 곳과 어렴풋이만 알았던 인근 동네를 방문하고, 가족들과 지인들의 만남을 통해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디서 왔는지, 나는 무엇에 편안함을 느끼는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근본을 찾아가는 <쓰가루>는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품으로, 이 단편집 중에서는 가장 좋았던 작품이었다.
[어른이라는 것은 외로운 것이다. 사랑하고 있어도 조심하며 남처럼 행동해야 한다. 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까? 그 답은 간단하다. 보기 좋게 배신당해서 큰 창피를 당한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는 발견은 청년에서 어른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어른이란 배반당한 청년의 모습이다.] P.43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다. 그런데 누구나 고향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서 타지에서 외롭게 살아갈 수 밖에 없고, 힘들때면 고향을 떠올리면서 어린시절을 추억하게 된다. 고향은 그렇게 위안이 되는 곳이다. 그리워할 고향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축복이다.
2. 두번째 작품인 <석별>은 중국의 문학가 "루쉰"의 실제 일본에서의 삶을 "다자이 오사무"가 각색한 작품이다. 1904년 "루쉰"은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학교에서 강의중에 상영하는 영상에서 중국인이 처형되는 장면을 보고 격분하여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중국인의 계몽을 위해 문학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작품은 이러한 실제 "루쉰"의 삶을 바탕으로, 1904년 "저우(루쉰)" 의 의학전문학교 동기이자 가깝게 지냈던 "나"가, 1944년 신문기자의 취재를 계기로, 그를 회상하는 수기 형식으로 쓰인 이야기이다. 읽으면서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다자이 오사무"의 필력을 느낄 수 있었다.
[문학의 창조는 이 세상에 공표되는 사실보다 더욱 진실에 가까운 것입니다. 문학이 없으면 이 세상은 빈틈 투성이입니다. 문학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그런 불공평한 빈틈을 자연스럽게 채워가는 것입니다.] P.314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와 침략을 어느정도 미화하는 내용과 중국에 대한 인식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해설을 보니 이 작품이 쓰여진 이유가 일본 정부의 의뢰 때문이라고 하는데, "다자이 오사무" 역시 시대의 분위기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나 보다.
3. 세번째 작품인 <옛날이야기>는 공습경보로 인해 지하 방공호로 대피한 아버지가 다섯살 딸 아이에게 들려주는 각색된 전래동화로, "다지이 오사무"가 그만의 특유한 분위기로 패러디한 작품이다. 그가 패러디한 일본의 전래동화는 '혹부리 영감', '우라시마', '부싯돌 산', '혀짤린 참새' 총 네편인데 이중 '혹부리 영감'만 어느정도 아는 이야기였고, 나머지는 처음 들어본 이야기였다.
[의심하면서 시험 삼아 오른쪽으로 도는 것이나, 믿고 단호하게 오른쪽으로 도는 것이나 그 운명은 같은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돌이킬 수 없어요. 시험하는 순간, 당신의 운명은 분명하게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시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요.] P.363
[예로부터 전 세계의 슬픈 이야기의 주제는 오로기 이것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에게는 모두 무자비한 토끼가 한 마리 살고 있고 남성에게는 저 선량한 너구리가 늘 익사 직전 상태로 발버둥 치고있다. 지은이의, 그야말로 지난 30년 넘게 굉장히 부진했던 경험에 비취봐도 그것은 명명백백하다.] P.419
그런데 원작을 모름에도 "다자이 오사무"가 재미있게 패러디 해서 전래동화를 재창조 했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평소 이런 동화류의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의 각색 이야기는 나름 재미있고 신선했다.
<쓰가루, 석별, 옛날이야기>는 재미있게는 읽었지만 내가 기대하던 내용이 아니어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좋아하거나 전작하고 싶은 분들이 읽기에는 괜찮지만, 그의 작품을 처음 읽는 분들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혹시나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쓰가루>만은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