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동안 읽은 책이다. 중간에 손이 다쳐서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어서 오래 걸렸다.
인간은 모두 짐승이고 애욕은 모두를 파멸로 이끌었다. 인간의 DNA라고 할까?

자크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몹시 가늘고 연약한 이 여자가 바닥을 알 수 없는 존재, 그녀 자신이 말한 대로 컴컴한 깊이를 지닌 존재, 이제는 뚫고 들어가는 게 불가능해진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더욱 힘주어 껴안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그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서로 꼭 끌어안은 상태에서 주섬주섬 읊조리는 그 살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뜻 모를 열기가 그를 휘감았다. - P347
칼이 박힌 몸이 세 번에 걸쳐 길게 경련을 일으키고, 흘러 내리는 뜨뜻한 피와 함께 숨이 끊어지는 장면, 그는 그 붉은 핏물이 흘러내려 자신의 두 손을 흥건히 적시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스무 번, 서른 번, 칼이 목에 박히고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 장면이 점점 거대해지더니 그를 덮치고 흘러넘쳐 일거에 작렬하며 밤을 산산조각냈다. 오! 그처럼 칼로 찌르다니, 멀게만 보였던 그 욕망을 만족시키다니, 실제로 경험을 해서 알다니, 한평생 겪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겪을 수 있는 그 짧은 순간을 맛보다니! - P357
자신의 손에 대한 공포가 엄습하면서 그는 손을 엉덩이 밑에 더욱 깊숙이 쑤셔넣었다. 자신의 두 손이 의지보다 더 강하게 반항하며 준동하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두 손이 이제 내게서 벗어나려는 것인가? 누군가로부터 나에게로 전해졌을 이 손, 먼 옛날 인간이 숲속에서 짐승을 목 졸라 죽이던 시절 어떤 조상이 나에게 물려주었을 이 손! - P359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우연히 피켓이라는 카드 게임을 접했다가 불붙기 시작한 도박벽은 비할 데 없는 재미를 제공하는데다 현실을 깨끗이 잊게 해주는 속성 때문에 그후로 점점 심해지더니 끊을 수 없는 습성으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그를 완전히 사로잡아 이 야성적인 수컷에게서 여자에 대한 욕망까지 앗아가버렸다. - P374
사랑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모조리 죽이고 말 텐데. 그래도 그는 자신의 애인에게 고통에도 지치지 않고 피로에도 지치지 않는 미친 사랑을 필사적으로 쏟아부었다. - P394
그때부터 세브린의 꿈은 바뀌었다. 루보가 사고로 죽는다. 그러면 자크와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단, 그와 결혼은 하고, 물론 크루아드모프라는 팔아서 전 재산을 현금화한다. 떠난 자리에는 어떠한 화근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렇게 고국을 등지는 것은 서로의 품에 안겨 다시태어나기 위해서다, 그곳으로는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하나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전혀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고 믿어도 되리라. 여기서는 한 차례 실수를 했으니 거기서는 처음부터 다시 행복의 경험을 만들어 나가리라. - P402
그녀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들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 그들이 그렇게 매주 사랑을 나누러 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그녀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이제 결코 그녀 혼자서 자크를 독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만큼 그녀로서는 그가 사라지고 없는 편이, 더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 P437
기차들은 그 온갖 참사와 온갖 범죄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자신들의 기계적인 건능함을 과시하며 냉혹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저 군중 가운데 모르는 존재 몇이 선로 바닥에 떨어져 기차 바퀴에 깔려 으스러졌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즉시 시체들을 치우고 피를 깨끗이 닦아낸 다음 저 먼 목적지를 향해, 미래를 향해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 P474
"왜냐하면 지금 우리 둘의 미래는 가로막혀 있잖아, 우린 더 멀리 갈수 없잖아. 떠난다는 우리의 꿈, 저멀리 미국에 가서 부자가 되고 행복해지겠다는 그 희망, 온전히 자기한테 달려 있는 그 지극한 행복이 이젠 불가능해졌잖아, 자기가 하지 못했으니까. 오! 자기를 탓하는 게 아냐.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게 차라리 더 잘된 건지도 몰라. 하지만 자기한테 이 사실만큼은 알려주고 싶어, 자기와 함께 있으면 이제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말이야. 내일도 어제와 같을 거야. 늘 똑같은 권태, 늘 똑같은 고통. - P490
사람은 합당한 이유에서 살인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사람은 피와 신경의 충동 때문에, 옛날 옛적 서로 투쟁했던 기억의 잔존 때문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과 강해졌다는 기쁨 때문에 살인을 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제 욕구를 채운 나른함만이 남았다. 그는 얼이 빠진 채 스스로 납득할 거리를 찾았지만 자신의 충족된 열정 밑바닥에서 경악과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쓰라린 슬픔 말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 P516
그는 그녀를 여전히 숭배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엄청난 연민에 휩싸여 있어 군중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자신이었던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또 자신이 살인을 범했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녀를 그리워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몇몇 부인들은 복받치는 감동을 이기지 못해 덩달아 흐느껴 울었다. 사람들은 남편이라는 자는 눈이 메마른 채 멀뚱거리고 있는데 애인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 P556
기차에서 함께 떨어진 두 사람은 어마어마한 속도의 반작용으로 기차 바퀴 밑으로 빨려들어가 한 덩어리로 으스러지고 짓이겨졌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형제처럼 지내온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껴안은 채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 P568
기관차가 도중에 산산조각내버린 희생자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기관차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로 인해 뿌려진 피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지 않은가? 운전자도 없이, 어둠 속 한가운데로, 마치 살육의 현장 한복판에 풀어놓은 눈멀고 귀먹은 한 마리 짐승처럼, 기관차는 이미 피곤에 절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병사들을 싣고, 그 총알받이들을 싣고, 달리고 또 달렸다. - P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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