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 제15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75
이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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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얼마 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예소연 작가의 <영원에 빚을 져서>와 맥락이 비슷한 작품을 읽었다. 바로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이다. 앞선 책과 이번에 읽은 책을 같은 비교선상에 두는 이유는 바로, ‘참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이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약간의 차이 또한 있었다. <영원에 빚을 져서> 같은 경우에는 사건을 허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제삼자의 시점에서 전개되었다면,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의 경우에는 그 참사에서 살아나온 ‘생존자’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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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이기도 하고 분량이 2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만큼 줄거리 소개를 하기에는 작품 스포일러를 할 위험이 따를 것 같아 이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다만 ‘참사’를 둘러싼 희생자, 생존자, 유족, 그외 제삼자 등의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애도와 추모의 의미를 탐색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연대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는 말은 하고 싶다. <훌훌>, <고요한 우연> 등 어느 정도 믿고 읽는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이라 생각했는데, 이번 작품 역시 만족스런 감상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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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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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담겨있는 서사는 분명히, 상당히, 지극히 ‘막장’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존속살인’을 소재로 하여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를 찾아나가는 구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하면 그래도 다른 추리 장르의 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이야기지 않나 싶지만, 소설 속 아들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파헤치면 혀를 내두를 정도의 막장에 탄성을 내뱉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건의 피해자는 ‘표도르 카라마조프’, 호색한인데다 술과 향락을 즐기는 파렴치한 망나니라 할 수 있다. (죽어도 싸다.) 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다. 첫째 부인의 소생인 장남 ‘드미트리’는 아버지와 같은 여자를 좋아하여(?!) 연적 관계에 있다. 평소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말을 떠벌리고 다닐 만큼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깊어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 할 수 있다.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은 두 명이 있다. 바로 둘째 ‘이반’과 셋째 ‘알료샤’. 두 사람은 아버지가 둘째 부인이 죽었을 때 제대로 장례를 치르거나 잘 보내주지 않았다는 데에 작지 않은 앙심을 품고 있다. 그중 ‘이반’은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는 유일한 아들인 점이, ‘알료샤’는 본인이 따르던 조시마 장로가 죽은 뒤 난생 처음으로 술을 먹고 방황하던 날 밤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심스럽다.

마지막 아들은 표도르의 원나잇(?)으로 낳은 사생아 ‘스메르쟈코프’이다. 표도르의 저택에서 하인(요리사)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존재 자체가 꺼림칙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간질 발작으로 범행시각 동안 내내 방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과연 네 아들 중에서 누가 아버지를 죽였을까?

물론 이런 내용 설명을 들었다고 해서 이 작품을 추리소설 혹은 범죄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이는 큰 오산이다. 읽으면 알겠지만, 속도감을 중요시하는 장르소설의 문법과는 전혀 다른, 도스토옙스키만의 밀도 높은 문체가 부담스러우리만치 섬세하고 집요하게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고전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다만 이런 의문 하나가 들 수 있다. ‘대체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너무도 다행히 나는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석영중 교수님의 ‘도스토옙스키 강연’을 들었어서 이를 깨달은 채로 독서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자 했던 건, 바로 ‘조시마 장로’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실천적인 사랑은 몽상적인 사랑에 비해 엄혹하고 무서운 것이니까요. 몽상적인 사랑은 금세 만족할 만한 신속한 위업을 갈망하며 모든 사람이 자신을 쳐다봐주기를 갈망합니다. (…) 하지만 실천적인 사랑 - 그것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마 하나의 완전한 학문과도 같을 것입니다. (1권 119p)

‘실천적 사랑’이란 관념적인 사랑이 아닌, 정말로 ‘실천하는 사랑’을 말한다.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실천적 사랑은 희생, 겸손, 인간의 도리와 존엄성을 인정하는 형태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조시마 장로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가 강조하고 싶었던 건 바로 이 부분이라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을 받는 알료샤의 모습에서도 이 실천적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알료샤가 외쳤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1권 465p)

“사랑하는 덴 뭔가 이유가 있는 거야, 너회 둘이 나한테 뭘 해줬는데?”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해봐, 알료샤처럼."

(2권 151p)

물론 실천적 사랑이 정확하게 어떤 형태의, 어떤 모습의 사랑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렇기에 삶을 더 살고, 더 많은 경험을 겪은 뒤 얼마 간의 깨달음이 쌓였을 때, 그때 다시 한번 이 작품을 읽으며 더욱 ‘실천적 사랑’에 대한 구체화를 키워나가고 싶다. 아직 나는 많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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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과 생각
정용준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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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단13기

혹시 ‘에세이’라고 불리는 산문 형식의 글을 좋아하는가. 인스타 피드를 보면 에세이 리뷰들을 적지 않게 보고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에세이를 그렇게 즐겨 읽지는 않는다. 이는 에세이라는 장르의 특성에서 기인한 일종의 깐깐함인데… 뭐랄까, 나는 에세이를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인 동시에 ‘아무나’ 잘쓰기 힘든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소설은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렇기에 평소 일상을 살고 있는 독자에게 소설의 비일상적인 세계관과 소재 등은 얼마간의 감탄과 쾌감을 선사하기 수월하다. 하지만 에세이는 그렇지 않다. 작가가 직접 겪은 ‘현실’ 차원의 경험담이 적혀있거나 작가의 생각 및 주장이 보다 직접적인 언어로 드러나있다. 그래서 소설보다 ‘참신’하다거나 ‘새롭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주기가 정말 어렵다고, 그래서 잘 쓰기 정말 힘든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내가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 이유를 구차하게 구구절절 설명해보았다. 그래도 에세이를 아예 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궁금할 때는 그 사람의 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산문을 찾아 읽는 편이고(하루키, 신형철 등), 또 어떤 주제에 대한 글을 필요로 할 때는 그 ‘소재’를 깊이 다룬 산문을 탐독하기도 한다(나쁜 책, 아무튼 시리즈 등). 그렇게 이번에 만난 정용준의 산문 <밑줄과 생각>은… 너무나도 황홀할 정도로 좋았다.

정용준 작가의 소설은 <내가 말하고 있잖아>와 <유령>, <선릉 산책> 이렇게 세 권을 읽어보았고, 그에 대해 내가 느낀 바로는 ‘다양한 ‘아픔’을 섬세하게 조명하는 작가다’였다. 쉽게 말해, 무척이나 좋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정용준’이라는 사람이 더 궁금하게 되어 그의 문학론 <소설 만세>까지 읽어보게 되었는데, 이 역시도 너무나 좋았었다. 단순히 문학에 대한 생각만을 넘어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나와 비슷하면서도 배울 점이 많아서 감명 깊이 읽었다.

그래도 이전 산문집 <소설 만세>가 ‘문학’을 중심 주제로 두고 넓게 뻗어나가는 저자의 생각을 읽어볼 수 있었다면, 이번에 읽은 <밑줄과 생각>은 보다 더 다양하고 직접적으로 인생에 대한 정용준의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전작보다 조금은 더 냉정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쓰여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어조가 더 단단하고 묵직하게 느껴졌다. 기존의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문체였다면 뭔가 어정쩡하다고도 생각되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니 보다 더 결연하게 느껴진달까?

이십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에게 인생 선배로서 해주는 조언들도 너무나 직관적으로 와닿았고, 그럼에도 등을 토닥여주는 위로 또한 느껴져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살면서 읽은 책들 중에 가장 많은 플래그잇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나에게 와닿는 좋은 문장들이 정말 많았다. 나의 감상은 이정도로 마무리하고, 어서 빨리 밑줄 그은 정용준의 문장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든다. 좋은 산문집을 찾는다면, 거두절미하고 이 책을 꼭 읽기를 바란다.

많은 학과들이 ‘공무원 시험 준비 학과’로 명칭을 바꿔 통폐합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도전’ ‘꿈’ ‘비전’ ‘희망’ 같은 긍정적인 단어들은 결국 ‘안정’이라는 종착역으로 향하는 간이역으로 전락했다. (…) 누구와 경쟁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미 뒤처져 있다는 자각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는 텅 빈 스탠드를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25p)

나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지나치게 정적이고 안 좋은 의미로 너무 어른스럽다. 흥분하고 도전하고 좋아하고 호기심이 넘치는 것은 어린이들이고 그것들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어른이라면,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53p)

어차피 망칠 거라면 시작도 하지 말자, 이런 생각이 나를 설득한다. 포기하려는 나를 두둔한다. 당장 쓰기의 자리에서 빠져나와 이 저조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이상하지. 그 기분에서 벗어나는 건 쓰기를 시작할 때다. 시작할 수 있도록 계속 시도할 때다. (70p)

소설을 쓰는 작가와 소설을 읽은 독자가 공감의 영역에서 만난다면, 밑줄을 긋고 인덱스를 붙이는 멈춤의 순간에 서로의 눈동자가 마주쳤다면, 그건 실제 사건과 경험이 같거나 유사해서가 아니다. 나도 그 인물처럼 될 수 있고, 할 수 있고, 있을 수 있고, 그럴 수 있다, 는 실존적인 이해다. (206p)

어차피 죽을 거 미리 죽는 자가 어딨나. 먹어도 곧 배고플 테니 안 먹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은 내일 때문에 오늘을 포기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수도 없이 포기해도 몸과 마음으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244p)

뫼르소에게 나는 배웠다. 타인의 인정이나 보증을 필요치 않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삶에 절실하지 않는 자만이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을. (2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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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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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2024년 올해의 책으로 예소연 작가의 <사랑과 결함>을 꼽았었다. 어딘가 살짝 뒤틀린 관계의 인물들에게서 내 모습이 언뜻 비쳐 보여 뜻하지 않은 공감과 위로를 물씬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읽은 <영원에 빚을 져서> 역시 그러한 관계성이 설정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중편’으로 길어진 분량만큼이나 작품에 담긴 메세지와 여운은 한층 더 깊고 짙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positive). 왜냐하면 소설 속 인물들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를 ‘세월호’, ‘이태원 참사’ 등의 무겁고도 날카로운 담론으로 확장시키기 때문이었다.


<영원에 빚을 져서>에는 세 명의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동’,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석’, ‘혜란’. 소설은 동이 혜란에게서 석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되면서 시작된다. 사실 석은 두 사람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껄끄럽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세 사람은 이전에 대학생 시절 캄보디아로 교육 봉사를 나가게 되며 가까워졌으나, 어떤 일을 계기로 사이가 점차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두 사람이 석을 찾기 위해 캄보디아로 다시 가는 현재 시점과, 이전에 캄보디아에서 봉사를 하는 동안 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되짚는 과거 시점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이들이 캄보디아에서 봉사하고 있었을 때 한국에서는 세월호 사건이 터졌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날 이후로 그녀들의 일상과 관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날 선 상태로 서로를 대했고 사소한 다툼을 벌이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된 데에 정확한 맥락과 이유를 들어 설명할 순 없지만, 나 같은 경우는 내가 속했던 세계가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33p)


석은 두 사람과 달리 그 문제에 조금 더 직접적으로 분노와 슬픔을 표출하는 사람이었다. 한국에 다시 돌아온 후 몇 년이 지나 또다시 벌어진 ‘이태원 참사’를 두고도 석이는 ‘마치 제 일인 것마냥 고통스러워’(63p)했지만 다른 두 사람은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지 않은 일에는 쉽게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94p)이었다. 이런 점으로 말미암아 석과 두 사람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갔다.


결국 나와 혜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석이의 마음과 고통을 함부로 가늠하려고 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해하는 것과 가늠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65p)


이들의 사이가 틀어진 결정적 계기는 다름 아닌 ‘말’이었다. 너무도 가볍게 내뱉고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말’. 석이 캄보디아의 한 남학생 ‘삐썻’과 약간의 썸(?)을 타는 듯한 기류가 느껴지자, 다른 두 사람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때마침 석과 삐썻이 밤중에 외출을 감행하자 남은 두 사람은 이들을 두고 함부로 섣부른 판단을 하게 되는데… (스포일러 방지)


비뚤어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운동장을 돌며 나눴던 대화들…… 게네 아마 잔 것 같아. 그건 좀 아니지 않니? 모든 것에 정답이 있다고 믿고 함부로 판단하던 나날들이었다. (106p)


소설 속 주인공에게서 나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실제로 나 또한 철없던 시절 다른 사람에 대한 좋지 못한 언행을 일삼았던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고 인연이 끊겨버린 경험이 있었다. 그때에도 속으로 반성을 많이 했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지금까지도 아주 조심히 지켜오고 있는 중이다. 그 경험이, 그 아프고 쓰라리고 시린 그때의 기억이 <영원에 빚을 져서>를 읽으며 다시금 되살아났다. 그래서 다시 한번 반성하는 시간을, 그리고 마음가짐을 다잡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기억은 집요하게 파고들수록 쪼개져 나를 아프게 했’지만(70p), 그럼에도 파고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잊을 수 없으니까. 잊어서는 안되니까. 


내가 가지고 있던 내밀한 경험들이 예소연의 문장으로 다시금 되살아나 읽힐 때 독자로서 받는 위로와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렇기에 앞으로 출간되는 예소연의 모든 작품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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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 - 불완전한 진화 아래 숨겨진 놀라운 자연의 질서
앤디 돕슨 지음, 정미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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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 책은 제목을 잘못 지은 것 같다. ‘고래는 물에서 숨을 쉬지 않는다’는 문장 자체는 너무도 자명하고 당연한 사실이기에 독자로서 아무런 궁금증을 자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장에 숨긴 뜻을 알고 나면 갑자기 호기심이 동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고래는 물에서 지낸 지 수천년이 지났음에도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진화되지 못한 것인가”

이 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진화’의 개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우리는 보통 ‘~~을 위해 진화했다’라고, 목적론적 개념으로 진화를 인식해왔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진화가 꼭 좋은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한다. 그렇기에 각 장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사례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글에서 모든 내용을 요약할 순 없으므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들을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죽거나 배고프거나]

흔히들 포식자와 피식자의 대결 구도를 떠올려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포식자의 승리를 예감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포식자가 사냥에 성공하는 경우보다 피식자가 도망치는 데 성공하는 경우가 약 세 배 가량 더 많다. 이를 진화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 대결에서 포식자가 패배할 경우 감당해야하는 비용(손실)은 ‘몇 끼니의 배고픔’이다. 그러나 피식자가 패배할 때는 ‘목숨’… 그러니 진화에 대한 ‘압력’이 피식자에게 더욱 강력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치타와 가젤의 관계에서 ‘속도’만을 따졌을 때는 치타가 더 빠르지만, 가젤은 치타의 추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치타를 감지하는 감각이 잘 발달되었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이 경쟁에서는 피식자가 조금 더 우위에 있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뻐꾸기 둥지에서 날아간 것]

탁란. 아주 흥미로운 소재다. 대체 왜 숙주 새들은 뻐꾸기 새끼를 그저 오냐오냐(?) 키워주기만 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자신의 종이 아닌 생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숙주가 뻐꾸기를 인식하는 매개체에 3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체 뻐꾸기, 알, 그리고 새끼. 이를 인식하는 과정은 별개이므로 비용과 이득이 달라져, 이 행동들은 전체적이 아닌 단편적으로 전달된다.

‘성체 뻐꾸기’를 인식하고 이를 공격하는 것은, 꼭 숙주에게 이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뻐꾸기를 공격하며 내는 시끄러운 소리가 오히려 그 숙주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둥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 뻐꾸기는 이들을 조용히 지켜볼 수 있다. 이 경우 새들의 공격적인 행동은 이득이 아닌 해가 되버리고 만다.

뻐꾸기의 ‘알’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뻐꾸기가 받는 진화적 압력이 더 크다. 그래서일까, 뻐꾸기의 알과 숙주 새의 알은 놀랍도록 비슷하게 생겼다. 뻐꾸기의 진화가 승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뻐꾸기의 ‘새끼’를 자신의 새끼로 착각하는 것은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생물학자는 ‘각인’의 개념을 제시한다. 자식이 부모를 각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으로 부모가 자식을 각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각인’의 방식은 뻐꾸기 새끼를 키우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또다른 선택지는 ‘선천적 인식’, 즉 선천적으로 자기 새끼가 아닌 새끼들을 인식하도록 진화하는 것인데, 어째서 새들은 선천적으로 뻐꾸기 새끼를 인식하도록 진화하지 않은 것인가. 그 이유는 뻐꾸기가 (마치 알처럼) 숙주 새끼를 모방하도록 진화하게 되면 이에 숙주 새는 전혀 대응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탁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연 선택이 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는 진리다.

[무임승차자]

생활 방식으로서 ‘기생’이 지닌 매력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오로지 ‘전염’ 뿐이다. 이를 위해 기생자들은 재채기(감기), 무는 행위(광견병) 등 많은 방법을 진화, 정교화시켜왔다. 그렇다면 숙주는 왜 이런 기생자들의 방법을 용납하는 것일까? 이는 앞서 보았던 포식자-피식자의 대결 구도와도 비슷하다. 기생자-숙주의 대결에서 숙주보다 기생자가 더 많은 선택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숙주도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법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숙주는 기생자에게 대응하는데, 이는 바로 ‘성’이다. 성이 진화한 이유에 대한 병원체 저항성 이론에 따르면, 병원체는 무성이고 복제를 통해 번식하기 때문에 약간의 무작위적 돌연변이는 있을지 몰라도 모든 숙주가 유전적으로 동일하지만, 성적으로 번식된 숙주들은 부모 어느 쪽과도 정확히 갖지 않으므로 적어도 일부 병원체에 대한 저항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를 고려하더라도 승부의 저울은 여전히 병원체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병원체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답으로는 ‘독성’을 꼽을 수 있다. 병원체는 번식에 도움이 되는 최적의 자원을 숙주로부터 취하지만, 만약 번식(숙주 자원을 소비함으로써 독성 증가)이 너무 잘되어서 병원체가 이동할 기회(전염)를 얻기 전에 숙주가 죽어버린다면, 독성은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병원체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새로운 병원체는 대체로 더 낮은 독성을 갖는 쪽으로 진화한다고 한다.

[아름답고도 저주받은자]

수컷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을 상상해보라. 이는 포식자의 눈에 더 잘 띌 수 있는 위험이 있고, 그 외에도 암컷을 유인하는 일을 제외하면 수컷에게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효율에도 더욱 화려한 깃털을 갖도록 진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설명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첫번째 이론은 ‘섹시한 아들’ 이론이다. 이 이론은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수컷이 가장 많은 자손을 남긴다고 주장한다. 화려한 수컷이 칙칙한 수컷에 비해 살아남는 비율은 낮지만, 그렇게 생존한 수컷은 훨씬 더 높은 짝짓기 성공률을 보인다는 점에서 발전한 이론이다.

두번째 이론은 ‘정직한 신호’ 이론이다. 이 이론은 화려한 장식이, 그러한 장식을 한 자의 특정 품질에 대한 실제적인 정보를 전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암컷은 신체조건이 가장 좋은 수컷, 즉 면역에 가장 좋은 유전자를 지닌 수컷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일곱 번째 이빨의 행방]

코끼리는 사는 동안 여섯 번의 이빨이 나지만, 일곱 번째 이빨은 나지 않아 결국 굶어 죽는다고 한다. 이 내용은 분명 ‘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코끼리를 비롯한 모든 동물은 분명히 늙는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할 필요는 있다.

노화를 설명하는 여러 과학 이론들이 있지만, 나는 앞서 언급된 코끼리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더 와닿았으므로 이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코끼리 무리에도 번식기가 지난 나이든 개체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개체가 갖고 있는 지식, 이를테면 먹이를 찾는 방법이나 포식자를 피하는 방법 등에 대한 삶의 지혜는 분명히 종족 유지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명한 늙은 암컷 우두머리가 너무 오래 살아서 쓸모 없어질 수도 있다. 이를테면 70세의 암컷이 60세의 암컷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진 않을 것이고, 70세 암컷의 지식이 이미 무리 내에 존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코끼리의 일곱 번째 이빨이 나도록 하는 진화가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강력하면서도 수긍이 간다. 바로 노화를 자연 선택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 중 하나로 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해결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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