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심보선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사회학을 하는 그의 좌뇌와 시를 쓰는 그의 우뇌를 질투하지 않는다. 명석하게 진단하고 논증하는 그의 좌뇌를 질투하지 않고, 섬세하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그의 우뇌를 질투하지 않는다. 그 두 뇌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 이 책의 우아한 ‘좌우합작’을, 그래서 ‘삶의 의미’나 ‘영혼의 문제’ 같은 주제로 글을 쓸 때조차 관철되는 두 능력의 아름다운 협주를 질투하지 않는다. 그를 질투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냥 그를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이 추천사는 내가 이 책을 구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애당초 사회학자랑 시인 두 직업을 한 사람이 동시에 할 수가 있기는 한 것인가? 그런데 신형철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심지어 ‘잘’ 하는 것 같다. 현 세태를 ‘명석하게 진단하고 논증’하는 것은 물론, 그에 처한 사람들에게 ‘섬세하게 공감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감수성까지 갖추고 있다니. 읽어보지 않을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더랬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그 안에 담긴 날카로운 통찰력과 부드러운 감성이 동시에 느껴질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아… 신형철 평론가의 말마따나 나는 앞으로 심보선을 그냥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우리는 인격을 침해한 이들로부터 종종 “고의가 아니었다”라는 말을 듣는다. 실제로 법원에서는 ‘고의성 여부’가 죄질을 판단하는 데 주요 준거가 된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고 행해지는 인격 침해야말로 더욱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 의도하지 않음은 마음속에 타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감이 애초부터 결여되었다는 사실, 타인의 인격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대상물로 당연시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실은 “당신의 인격이 그토록 중요한지 몰랐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더 큰 모욕감을 불러일으킨다. (53p)

무한 경쟁의 시대에 매 순간 마주칠 수밖에 없는 선악의 기로에서 둘 중 하나를 무심코 선택하면서 달리고 또 달린다. 결국 악이란 ‘망각을 선택함’이고 지옥이란 거듭된 망각 끝에 다다르는 종착지의 이름이다. 장담컨대 그 종착지인 지옥은 끔찍하기는커녕 너무나 평범한 세계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65p)

‘성공과 스타덤을 향한 자기계발’이라는 이 시대의 거만한 규약은, 독서로 자신의 삶을 일구어나가는 독자와, 창작으로 세계의 비참을 해명하려는 저자 사이의 ‘고매한 협약’(장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을 간단히 압도해버렸다. (157p)

사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상실을 겪으며 살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빠른 세태 변화 속에서, 사건들의 범람 속에서 숱한 사물과 사람을 상실하며 사는 이들이 바로 우리다. 그런데도 상실감은 우리의 공통 감각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상실을 상실했다. (…)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사라졌는데 고개 한번 돌리면 모든 것이 눈앞에 버젓이 있다. 미디어를 접하면서 슬픔과 아픔을 느끼다가도 바로 다음을 클릭하면 그런 감정은 사라진다. (179p)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은 사회적 배제와 무관심이 야기한 사회적 타살임이 명백하다. (…) 사회적 냉대와 고립 때문에 죽음에 이른 망자들의 장례가 너무 잦을 때, 그 같은 죽음의 연쇄를 삶의 연쇄로 바꾸기 위해서는, 슬픔이란 형식을 기어이 행복이란 내용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은 부족하다. (224~225p)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진실, 혹은 이미 알려진 과거 속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불편하게 캐묻는 이야기꾼들이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과거에 집착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답할 것이다.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판결이나 사면과 무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답할 것이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안도하는 순간, 망각은 거슬르 수 없는 물리법칙처럼 작동하여 우리가 그토록 싸웠던 무책임과 무자비함을 어느새 승자의 위치에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262~26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니포터11기

지금까지의 모든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읽어본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은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수상작들 간에 얼마간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 것 같다. 보통 ‘문학’에서 으레 느껴지곤 하는 감수성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문장 하나 하나가 섬세하고도 예리한 감각으로 쓰여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울림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리고 서사 자체가 가진 힘을 토대로 다음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어 책장을 넘기게 하는 것.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은 대체로 후자, 즉 서사가 가진 매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작품들이 많았다.

불행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고 장은 생각한 일이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불행하고, 가장 불행한 사람조차 끊임없이 불행하지만은 않으므로 호들갑 떨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마침내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이 찾아왔을 때 장은 불행이란 단어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데 한참이나 모자람을 깨달았다. (11p)

이번에 읽은 『말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의 첫문장으로 단숨에 나를 사로잡더니, 휘몰아치는 전개로 앉은 자리에서 다 읽게 만들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1부에서 주인공 ‘장’에게 닥친 불행을 보여주고, 2부에서는 말뚝들이 들어닥친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그려내며, 3부에서는 그 모든 일의 마무리를 짓는다. 서늘한 현실과 기발한 상상력을 적절히 조합하여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이 작품이 ‘한겨레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문학적 가치가 대단한 것인지는 단 한 번의 독서로는 그리 잘 체감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 수록된 서영인 평론가의 글을 읽으며,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더랬다.

『말뚝들』이 전달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가 바로 이 ‘눈물’이라고 나는 읽었다. 제련소에서 유독 물질에 중독되어 죽은 외국인 노동자, 나흘째 잠을 못 잔 상태로 인도를 덮친 택배 노동자, 그 택배차에 받혀 숨진 아이, 그들이 모두 말뚝들이 되어 나타난 순간 이 죽음이 사회적 죽음이라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그리고 말뚝들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우는 사람들의 눈물 역시 아마도 사회적 슬픔일 것이다. 『말뚝들』은 이 사회적 죽음과 사회적 슬픔을 추적하고 반추하며 기록한다.

나는 요즘 사회가 너무 팍팍해졌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공감이 줄어들고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있는 게 편하면서도 씁쓸하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정보들의 범람과 너무 빠른 세상의 변화가 적잖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특히 쇼츠나 릴스, 거기서 나오는 여러 사건들의 요약을 보며 슬픔을 느끼다가도, 우리의 손짓 한 번에 바로 다음 영상이 재생되며 그런 아픔이 곧바로 사라지지 않던가. 어쩌면 『말뚝들』은 이러한 현 세태에 맞설 수 있도록 공감과 연대를 주창하는 소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사회적 죽음’을 단순한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도록 나아가게 하는 것은 ‘사회적 슬픔’일테니 말이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 투입되었던 한 소방관님이 우울증을 앓다 결국 작고(作故)하셨다는 뉴스가 떠오른다.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길, 정말 간곡히 바라며, 더이상 또다른 죽음이 나오지 않기를, 이 또한 너무도 간절히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2년 겨울부터 2005년 여름까지 이 세 편의 중편소설을 썼다.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합해지면 그중 어느 것도 아닌 다른 이야기 -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 가 담기는 장편소설이다. 이제 제자리에 차례를 맞추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245p)

초판본 작가의 말에 쓰인 이 문장 하나로 인해 나는 『채식주의자』를 다 읽고도 한동안 리뷰를 적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읽(다가 포기했)고, 군대에서 다시 한번 읽었어도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 했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 ‘이제는 알겠다’고 하지도 못한다. 다만… 조금은, 아주 약간은 ‘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하는 생각이 들어 그 느낌을 조심스럽게 이 글에 옮겨 보고자 한다.

일단 『채식주의자』가 어째서 이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것인지를 먼저 해명하고 싶다. 『채식주의자』의 어려움은 ‘읽히지 않는’ 어려움이 아니라 ‘담고 있는 주제’의 난해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런 내용,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채식주의자』의 해석에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은 단연코 주인공인 ‘영혜’일텐데, 『채식주의자』에서 독자는 영혜의 목소리를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총 세 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차례로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왜곡을 발생시킨다. 독자들이 해석해야 할 영혜의 내면이 ‘서술자의 시선’을 한 차례 통과한 뒤 전해지기 때문이다.

위에 적은 작가의 말에서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 이유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세 이야기의 서술자가 다르고, 저마다의 입장과 관점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각 중편의 주제도 저마다 다른 것처럼 보인다는 것. 그러나 세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영혜’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소설을 읽으면, 정말로 하나의 메세지가 이야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기존의 남정 중심 가부장적 가족 제도 속의 내재된 폭력을 날카롭게 그려냈다”는 평가보다는, 조금 더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해석을 해볼까 한다.

아마 『채식주의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질문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영혜는 ‘왜’ 채식을 선택했을까?”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이유는 바로 ‘꿈’이다. ‘수백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18p) 모양의 꿈. 이 꿈은 육식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상징한다. 이것이 영혜에게 일종의 두려움과 혐오감을 야기했을 것이고, 이를 거부하려는 방법의 일환으로 영혜는 채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혜의 마음을 그녀의 남편은 물론이고 부모, 형제 등 가족 모두 이해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몽고반점」 속 영혜의 형부만은 다른 가족들과 달랐다. 물론 그가 영혜를 이해하고 공감해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형부는 영혜의 그런 저항적 모습을 보며 자신의 예술가적 욕망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몽고반점」이라는 작품만 따로 놓고 본다면 형부의 이야기가 주요하게 해석되어야 할테지만, 『채식주의자』 전체를 두고 이 작품을 보면 역시나 「몽고반점」 속 영혜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형부가 자신의 몸에 그린 꽃을 영혜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장면이 무척 인상깊다. 이후 그 그림을 그린 후로 영혜가 악몽을 꾸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그 그림이 영혜에게 아주 의미있던 것 같다. 이를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자면, 아마도 ‘꽃(식물)이 되고 싶은 욕망’을 암시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런 점은 역시 「나무 불꽃」의 서사 바깥으로 드러난다. 영혜가 직접적으로 ‘나무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이 장면이기도 하다. ‘채식’을 선언한 것으로 이미 한 차례 폭력을 거부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채식에서 더 나아가 나무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대체 무얼 뜻하는 것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채식’ 또한 폭력에서 온전히 벗어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분명히 채식 역시 다른 생명(식물)을 파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완전하게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자 수단으로 영혜는 식물이 되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나무 불꽃」 속 영혜가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것도 아마 이런 함의를 지닌 것이 아니었을까.

영혜는 식물이 되기를 선언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포기한다. 적극적으로 폭력의 세계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폭력의 세계(육식 등)를 우리는 어떻게 마주하고 살아가야 할까? 『채식주의자』가 던지는 질문이자 주제의식은 아마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를 두고 “‘우리가 이토록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껴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소설”이라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채식주의자』에는 그러한 폭력을 대하는 태도가 상반된 두 인물이 등장한다.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저항하는 영혜, 그저 인내하고 버티기만 하는 인혜(영혜의 언니). 우리는 이러한 두 갈래의 방법 중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혹은 또다른 폭력의 대처가 있는지, 이는 아마도 『채식주의자』를 읽은 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적과 소음 날짜 없는 일기 2
이수명 지음 / 난다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날짜 없는 일기’ 시리즈는 이수명 시인의 1년 동안 쓴 일기를 한 권에 묶은 산문집이다. 다만 보통의 일기 에세이와는 다른 독특한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날짜를 쓰지 않고 월별로만 장을 나눈 것이다. 뭐랄까, 구체적인 날짜를 알지 못한 채 책을 읽다보니, 그 달에 할 법한 생각들과 느낌들이 어렴풋한 일관성 혹은 통일성 등을 가지고 모여있는 느낌이 들어 꽤나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책은 ‘일기’라는 장르의 말마따나 가볍고 조용한 호흡으로 쓰인 글의 묶음이었지만, 그런 일상적인 순간조차 시인의 시선으로 포착되어 상당히 색다르고 신선한 내용을 품고 있었다. ‘와 이걸 이렇게 바라본다고?’ 혹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등 시인만의 눈길과 사유가 무척이나 독특했고, 신기했고, 그래서 흥미로웠다.

감정은 들여다보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인가보다. 비켜서는 것이다. 공간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장소를 바꾸면 방금 전의 장소에서 가졌던 감정도 바뀐다. 감정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머문 공간 안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동안 감정이 내면에 있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감정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했을까. (「1월」, 27p)

생활이 고요를 깨뜨리는 순간을 따르면서 한없는 침묵 속에 빠져들지 않고 지낸 것일 테다. 생활은 생활을 보게 한다. 생활로 향하며 우리가 바로 소음이라는 것을 보게 한다. 그러니 고요는 생활이 갑자기 멈추는 상황일 것이다. 비가 오려고 흐려서라기보다는 생활이 문득 멈춰서 고요가 고인다. 나는 일어서서 수돗물을 튼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듣는다. 생각난 듯이 세면대의 비누 얼룩을 지운다. 고요를 지운다. 생활이다. (「4월」, 72~73p)

작년에도 이렇게 더웠던가, 새삼스럽게 기억을 더듬는다. 해마다 더 더워지는 것 같다. 태양이 인간을 옭아맨다. 더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몰아붙인다. 오늘도 집안에서 숨어지낸다. 왜 태양이 단번에 뭉쳐졌을까 생각하면서. (「8월」, 145p)

물론 『정적과 소음』에는 단순히 일상에 대한 사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으로서 ‘문학’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 이수명 시인만의 생각과 통찰 등이 담겨 있다. 내가 문인의 산문을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나는, 그런 문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진심으로 문학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작가들의 태도를 감히 엿볼 수 있는 이런 책들이 있어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 『고요한 읽기』(이승우), 『소설 만세』(정용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에 이어 이 책을 내 마음 속 목록 한 곳에 올리련다.

문학작품에서 아우라를 지니고 감동을 주는 인물은 싸우는 주체다. (…) 이 주체는 자신과 싸우고 운명과 싸우고 세계와 싸운다. (…) 싸움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패배도 귀하게 처리된다. 오히려 패했을 때 싸움이 빛난다. 패배하면 싸움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2월」, 39p)

고전이란 아마도 현대성을 선취한 작품을 일컬을 것이다. 현대가 들어 있지 않으면 고전이 될 수 없다. 작품이 낡으면 사라지는 까닭이다. 결국 낡지 않아야 고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작품에는 그야말로 고전이 녹아 있다. 제대로 잘 녹아 있을수록 좋은 작품이다. 고전에서 더 나아가야 비로소 현대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 역시 사라지게 마련이다. (「3월」, 51p)

이미지가 시의 시동이다. 한 줄, 늦어도 두어 줄을 쓰면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미지가 나타나야 진행이 되고 진전도 이루어진다. 그리고 문장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와 좀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미지로 나뉘어진다. 시는 이미지가 선명해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선명해야 움직일 수 있다. (「9월」, 180p)

젊은 시는 대개 무엇인가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 맞닥뜨린 것을 크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직면의 힘이다. 시 세계가 정면일 수밖에 없다. 만약 맞닥뜨리지 못했을 때는 눈앞에 무엇을 세우기도 한다. 잘 세워지지 않더라도 시도를 한다. 그러한 동력들이 흥미를 끈다. (「10월」, 19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협찬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 이토록 부담스럽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책에서 그리고 있는 이시봉의 모험 속으로 완전히 빨려들어가 순식간에 완독했던 소설이었다. 이기호 작가를 ‘타고난 이야기꾼’이라 부르고 싶게 만드는 이유는 이것 하나만이 아니다. 소설을 읽어가다보면 뭔가 결말을 암시하는 듯한 복선이 툭툭 등장하는데, 그 조각들이 후반부에 들어서 하나의 완전한 결말로 맞아떨어질 때 드는 쾌감이란… 여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는 만 스무 살 남성 ‘이시습’이다. 그에게는 키우고 있는 개 한 마리가 있다. 이름은 시습-시현 남매의 이름을 이은 ‘이시봉’. ‘시봉아’라 부르면 오지 않고 반드시 성을 붙여 ‘이시봉’이라 불러야하는 똑똑한 만 네 살 수컷 비숑이다. 평범한 일상을 지내던 어느 날, 이시봉은 ‘앙시앙 하우스’라는 곳에서 뜻하지 않은 연락을 받는다. 주인공이 데리고 있는 이시봉이 바로, 지금은 사라진 ‘후에스카르’ 계열의 비숑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이시습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시봉을 원하는 앙시앙 하우스와의 서사. 그리고 또 하나는, 이시봉의 조상견 ‘베로’의 서사. 위의 이야기가 현재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면, 베로의 서사는 180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소설은 전혀 다른 두 시공간이 독립적으로 펼쳐지고, 또 중간중간에 새로운 인물들과 그의 서사가 등장하여 이야기가 한없이 확장되는 듯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기호 작가는 이를 무책임하게 벌려놓기만 하지 않는다. 사실은 이게 이렇게 이어지고 또 저게 저렇게 이어지는…(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내용은 여기까지만!)


이렇듯 나는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없는 삶』을 읽으면서 천명관 작가의 『고래』 생각이 많이 났다. 『고래』처럼 이 작품 또한 서사가 정말 촘촘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쩐지 『고래』보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없는 삶』이 더 좋았다. ‘훨씬’ 더 좋았다. 인물들이 너무 불행하거나 험하게만 다뤄지는 『고래』는 그 몰입감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인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내면의 아픔과 불행을 분명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서사의 방향은 상승 곡선, 즉 구원과 회복의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에 얼마간의 뭉클한 여운까지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좋았던 점 또 하나. 이 책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하고 웃게 되는 유머 코드가 있으면서도 반려인들의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감동 코드까지 다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나는 애완동물을 키우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무해한 존재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를,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선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얼마나 감동스럽게 느껴질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하… 이기호 작가, 다시 생각해도 글 정말 잘 쓴다. 두껍긴 하지만, 이번 휴가 기간에 시간을 내어 이 책 한번 정주행하는 것은 어떨지, 조심스럽고도 간곡하게 제안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