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사람에게
심보선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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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학을 하는 그의 좌뇌와 시를 쓰는 그의 우뇌를 질투하지 않는다. 명석하게 진단하고 논증하는 그의 좌뇌를 질투하지 않고, 섬세하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그의 우뇌를 질투하지 않는다. 그 두 뇌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 이 책의 우아한 ‘좌우합작’을, 그래서 ‘삶의 의미’나 ‘영혼의 문제’ 같은 주제로 글을 쓸 때조차 관철되는 두 능력의 아름다운 협주를 질투하지 않는다. 그를 질투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냥 그를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이 추천사는 내가 이 책을 구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애당초 사회학자랑 시인 두 직업을 한 사람이 동시에 할 수가 있기는 한 것인가? 그런데 신형철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심지어 ‘잘’ 하는 것 같다. 현 세태를 ‘명석하게 진단하고 논증’하는 것은 물론, 그에 처한 사람들에게 ‘섬세하게 공감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감수성까지 갖추고 있다니. 읽어보지 않을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더랬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그 안에 담긴 날카로운 통찰력과 부드러운 감성이 동시에 느껴질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아… 신형철 평론가의 말마따나 나는 앞으로 심보선을 그냥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우리는 인격을 침해한 이들로부터 종종 “고의가 아니었다”라는 말을 듣는다. 실제로 법원에서는 ‘고의성 여부’가 죄질을 판단하는 데 주요 준거가 된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고 행해지는 인격 침해야말로 더욱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 의도하지 않음은 마음속에 타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감이 애초부터 결여되었다는 사실, 타인의 인격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대상물로 당연시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실은 “당신의 인격이 그토록 중요한지 몰랐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더 큰 모욕감을 불러일으킨다. (53p)

무한 경쟁의 시대에 매 순간 마주칠 수밖에 없는 선악의 기로에서 둘 중 하나를 무심코 선택하면서 달리고 또 달린다. 결국 악이란 ‘망각을 선택함’이고 지옥이란 거듭된 망각 끝에 다다르는 종착지의 이름이다. 장담컨대 그 종착지인 지옥은 끔찍하기는커녕 너무나 평범한 세계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65p)

‘성공과 스타덤을 향한 자기계발’이라는 이 시대의 거만한 규약은, 독서로 자신의 삶을 일구어나가는 독자와, 창작으로 세계의 비참을 해명하려는 저자 사이의 ‘고매한 협약’(장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을 간단히 압도해버렸다. (157p)

사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상실을 겪으며 살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빠른 세태 변화 속에서, 사건들의 범람 속에서 숱한 사물과 사람을 상실하며 사는 이들이 바로 우리다. 그런데도 상실감은 우리의 공통 감각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상실을 상실했다. (…)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사라졌는데 고개 한번 돌리면 모든 것이 눈앞에 버젓이 있다. 미디어를 접하면서 슬픔과 아픔을 느끼다가도 바로 다음을 클릭하면 그런 감정은 사라진다. (179p)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은 사회적 배제와 무관심이 야기한 사회적 타살임이 명백하다. (…) 사회적 냉대와 고립 때문에 죽음에 이른 망자들의 장례가 너무 잦을 때, 그 같은 죽음의 연쇄를 삶의 연쇄로 바꾸기 위해서는, 슬픔이란 형식을 기어이 행복이란 내용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은 부족하다. (224~225p)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진실, 혹은 이미 알려진 과거 속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불편하게 캐묻는 이야기꾼들이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과거에 집착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답할 것이다.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판결이나 사면과 무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답할 것이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안도하는 순간, 망각은 거슬르 수 없는 물리법칙처럼 작동하여 우리가 그토록 싸웠던 무책임과 무자비함을 어느새 승자의 위치에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262~2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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