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작가의 말에 쓰인 이 문장 하나로 인해 나는 『채식주의자』를 다 읽고도 한동안 리뷰를 적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읽(다가 포기했)고, 군대에서 다시 한번 읽었어도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 했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 ‘이제는 알겠다’고 하지도 못한다. 다만… 조금은, 아주 약간은 ‘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하는 생각이 들어 그 느낌을 조심스럽게 이 글에 옮겨 보고자 한다.
일단 『채식주의자』가 어째서 이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것인지를 먼저 해명하고 싶다. 『채식주의자』의 어려움은 ‘읽히지 않는’ 어려움이 아니라 ‘담고 있는 주제’의 난해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런 내용,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채식주의자』의 해석에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은 단연코 주인공인 ‘영혜’일텐데, 『채식주의자』에서 독자는 영혜의 목소리를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총 세 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차례로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왜곡을 발생시킨다. 독자들이 해석해야 할 영혜의 내면이 ‘서술자의 시선’을 한 차례 통과한 뒤 전해지기 때문이다.
위에 적은 작가의 말에서 ‘따로 있을 때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 이유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세 이야기의 서술자가 다르고, 저마다의 입장과 관점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각 중편의 주제도 저마다 다른 것처럼 보인다는 것. 그러나 세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영혜’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소설을 읽으면, 정말로 하나의 메세지가 이야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기존의 남정 중심 가부장적 가족 제도 속의 내재된 폭력을 날카롭게 그려냈다”는 평가보다는, 조금 더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해석을 해볼까 한다.
아마 『채식주의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질문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영혜는 ‘왜’ 채식을 선택했을까?”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이유는 바로 ‘꿈’이다. ‘수백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18p) 모양의 꿈. 이 꿈은 육식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상징한다. 이것이 영혜에게 일종의 두려움과 혐오감을 야기했을 것이고, 이를 거부하려는 방법의 일환으로 영혜는 채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혜의 마음을 그녀의 남편은 물론이고 부모, 형제 등 가족 모두 이해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몽고반점」 속 영혜의 형부만은 다른 가족들과 달랐다. 물론 그가 영혜를 이해하고 공감해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형부는 영혜의 그런 저항적 모습을 보며 자신의 예술가적 욕망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몽고반점」이라는 작품만 따로 놓고 본다면 형부의 이야기가 주요하게 해석되어야 할테지만, 『채식주의자』 전체를 두고 이 작품을 보면 역시나 「몽고반점」 속 영혜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형부가 자신의 몸에 그린 꽃을 영혜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장면이 무척 인상깊다. 이후 그 그림을 그린 후로 영혜가 악몽을 꾸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그 그림이 영혜에게 아주 의미있던 것 같다. 이를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자면, 아마도 ‘꽃(식물)이 되고 싶은 욕망’을 암시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런 점은 역시 「나무 불꽃」의 서사 바깥으로 드러난다. 영혜가 직접적으로 ‘나무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어려웠던 부분이 바로 이 장면이기도 하다. ‘채식’을 선언한 것으로 이미 한 차례 폭력을 거부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채식에서 더 나아가 나무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대체 무얼 뜻하는 것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채식’ 또한 폭력에서 온전히 벗어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분명히 채식 역시 다른 생명(식물)을 파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완전하게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자 수단으로 영혜는 식물이 되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나무 불꽃」 속 영혜가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것도 아마 이런 함의를 지닌 것이 아니었을까.
영혜는 식물이 되기를 선언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포기한다. 적극적으로 폭력의 세계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폭력의 세계(육식 등)를 우리는 어떻게 마주하고 살아가야 할까? 『채식주의자』가 던지는 질문이자 주제의식은 아마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를 두고 “‘우리가 이토록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를 견딜 수 있는가? 껴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소설”이라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채식주의자』에는 그러한 폭력을 대하는 태도가 상반된 두 인물이 등장한다.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저항하는 영혜, 그저 인내하고 버티기만 하는 인혜(영혜의 언니). 우리는 이러한 두 갈래의 방법 중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혹은 또다른 폭력의 대처가 있는지, 이는 아마도 『채식주의자』를 읽은 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