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단순히 ‘산문’이라는 갈래 아래에 놓아도 될까? 『밤이 선생이다』 속의 글들은 서점에 흔하게 널려 있는 여느 산문들과는 분명히 다르게 느껴진다. 그저 저자의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해놓은 일반 에세이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에 대한 저자의 심도있는 고찰이 담겼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곧 인생에 대한 교훈과 성찰로 이어진다는 것. 게다가 그런 깨달음을 어렵지 않고도 매끄러운 문맥과 담백한 문체로 독자들에게 어렵지 않게 전달하니, ‘잘 쓰인 글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밤이 선생이다』로써 깨닫는다. 미천한 나의 글은 이만 줄이련다. 다같이 고 황현산 선생의 글을 감상하자.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12p)

이런저런 사건들이 늘 ‘어느 날 갑자기’의 형식으로 찾아오는 곳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변덕스럽지 않기는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앞에서 놀라지 않게 하는 일은 인문학이 늘 내세우는 일이고, 사실 내세워야 할 일이다. 그렇다고 인문학이 미래학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닌 일, 언제 어디에 소용될지 모르는 일에도 전념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는 말이다. (57p)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늘 성장통이란 말을 끄집어내게 된다. 그런데 합당한 말인가. 그 말이 비록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내용을 가득 안고 있다 하더라도, 젊은 날의 고뇌와 고투를 그 미숙함의 탓으로 돌려버리게 하기에도 십상이다. 젊은 날의 삶은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삶이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삶이 거기 있기도 하다. (88p)

언어의 깊이가 주는 정서를 학문의 습득과 함께 누리지 못하는 탐구는 모든 지식을 도구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어 강의가 사상 통제를 위해 실행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상 통제의 필수조건인 언어 통제가 그 가운데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염려한다. (127p)

개는 내내 주인을 따라가지만 언제나 주인과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꿈은 사람 속에서 피어나 사람과 동행하지만 반드시 사람과 같은 방향에 두는 것은 아니다. 이 겨울의 개는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신이다. (152p)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184p)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192p)

상대방은 사람이 아니니 거기에 어떤 일을 저질러도 죄의식을 가질 것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권력자들만이 아니다. 공격적 마케팅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람은 사람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사람을 분석하여 그 속에서 조종 가능한 물건 하나를 찾아낸다. (243~244p)

나로서는 뿌리가 없고 본디의 결에 거슬리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관용으로 굳어졌으면 그것을 새로운 뿌리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어떤 표현법이 일어나 영어에서 연유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언중에게 그 표현이 큰 무리 없이 이해된다면 이미 우리말 속에 그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들어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47p)

진실보다 먼저 만들어진 말들은 진실보다 시나리오를 더 사랑한다. (260p)

국제 외교나 통상에서 그때그때마다 현행의 잣대에만 매달리다보면 우리 같은 처지의 국가들은 늘 한 걸음 뒤지게 마련이다. 그 잣대의 향방을 예견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파악하고 그 고향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 (29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류진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런 기분에 휩싸인다. 소설 속의 사건들이 바로 내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혹은 소설 속 인물들과 아주 흡사한 성격의 사람들을 내 주변에서 본 것 같은 기분. 이는 곧 장류진 작가가 리얼리티, 즉 현실감을 작품 속에서 정말 잘 조성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번에 읽은 『연수』도 마찬가지였다. 일상의 한 장면을 이렇게나 예리하게 포착하여 현실감을 살려 하나의 이야기로 서사화할 수 있다니. 이는 분명 장류진 작가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능력일 테다.

표제작 「연수」는 20년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먼저 읽었던 작품이라 익숙한 내용이었지만, 그 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는 ‘이게 장류진이지!’를 속으로 연발했더랬다. 「펀펀 페스티벌」에서는 자기 잘생긴 줄 아는, 지 잘난 맛에 사는 꼴값(?) 인물 ‘이찬휘’가 꽤나 밉상이었고, 「공모」의 ‘김건일’은 어딘가 부족한 듯 무녀리 같아보여도 주인공을 팀장 자리에 앉히고 천사장을 끝까지 챙기려는 모습을 보여 마음이 많이 가는 인물이었다. 소설에서 인물 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싶은데, 장류진은 현실적인 서사와 더불어 인물들을 아주 입체적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보여주었던 그 느낌에서 그리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전히 쉽고, 현실감 넘치고, 잘 읽혔지만, 그게 다였다. 조금 가볍다는 느낌을 『연수』에서 지우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장류진의 매력이라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사회적인 메세지를 담는다거나 마음 한 편이 묵직하게 울리는 찡한 감동이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이 팬으로서 든다.

(덧 하나. 요즘 내가 김애란 전작을 읽는 중이어서 그런가, 모든 단편집을 김애란 작가와 비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양해 바란다.)

(덧 둘.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중 「라이딩 크루」는 유일하게 ‘용두사미’였다. 나체 엔딩….이라니???? 이런 개연성 없는 결말은 현실감까지 놓쳐버린 것처럼 느껴져 퍽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일의 엔딩 소설Q
김유나 지음 / 창비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소 인스타그램에서 종종 댓글을 남기고 소통을 하는 분께서 선물로 주신 책이다. 취향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꽤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던 인친님의 선물이기에, 신인 작가의 작품임을 알고 있음에도 적지 않은 기대를 품고 책장을 펼쳤다. 분량이 짧은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깊게 전해지는 울림에 꽤나 크게 놀랐더랬다.

『내일의 엔딩』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간병하게 된 딸 ‘자경’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물론 간병인의 처지만으로 나오는 건 아니다. 일적으로도 상당히 바쁜 하루를 보내던 자경은 결국 아버지를 떠나보내게 된다. 아마 작가가 전하고 싶은 주제의식이 바로 이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상실과 애도, 결국은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우리내 삶, 이것을 ‘자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낸 것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나의 친할머니가 뇌경색으로 돌아가셨던 터라, 『내일의 엔딩』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들이 조금은 남달리 무겁게 느껴졌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어른들이 하신 말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을 배려하셔서 그렇게 빨리 가신 게다.”

고등학생이었던 당시의 나로서는 이 말이 그리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애당초 ‘배려’라는 말과 ‘죽음’을 같은 문장에 놓을 수 있는 건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내 솔직한 마음으로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계시다가,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보게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것이 가족을 배려하는 길 아니었던가, 하는 게 어리석은 그때의 내 생각이었다.

『내일의 엔딩』을 읽으며 그런 내 생각이 얼마나 가볍고 얄팍한 것이었는지를 몸서리치듯 깨달았다. 간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 신체적으로 힘든 일인지. 사랑하는 내 가족이 아파하는 모습을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그런 와중에도 일상을 포기할 수는 없는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 그래서 왜 우리 할머니는 ‘가족들을 배려하셨다’는 말을 들으며 떠나셨는지…. 갑자기 할머니가 무척 보고 싶어진다.

우리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내가 떠나든 혹은 내가 떠나보내든, 결국 이별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결코 피할 수 없고 배제할 수 없는 죽음, 상실, 이별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내일의 엔딩』은 이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다. 상상하기 싫어서,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 비겁하게 도망치고 있다. 다만, 얼마 전에 읽은 최진영 작가님의 산문집 『어떤 비밀』을 읽으며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그 문장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삶을 졸업할 때가 올 것이다. 정말 떠나야 할 때. 그 순간을 느닷없이 맞닥뜨리지만은 않기를. 잠시라도 준비할 수 있기를.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돌아서서 인사해야지. 안녕, 너구나. 내 소설에는 네가 꽤 많이 등장해. 그만큼 너를 자주 상상했어. 그래서 네가 마냥 두렵지만은 않아. 너를 만나면 오랜 친구처럼 안아주고 싶다고도 생각했지. 이제 진짜 만났네. 내 손을 잡아줄 수 있어?

『어떤 비밀』, 36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비밀
최진영 지음 / 난다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중의 큰 사랑을 받지만, 유달리 나랑은 맞지 않은 작가들이 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최진영 소설가다. 최진영의 유명한 작품들을 여러 차례 도전해보았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 단 한 권도 완독하지 못하였다. 이 말을 본 최진영의 팬들은 내게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대체 왜요? 그 좋은 걸 어째서 읽지 못한 거죠?” 그렇다면 나는 이 질문으로 되묻고 싶다. “그 마음을 어떻게 버티셨어요?”

싫다는 게 아니다. 글을 못 쓴다고 생각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최진영의 작품 속 인물들이 처해지는 상황이 너무나 어둡고 힘든데, 최진영의 문체가 섬세하면서도 수위가 높은 묘사다보니 나에게 전달되는 감정의 파고(波高)가 견디기 힘들 만큼 거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어떤 비밀』이라는 산문집을 읽으면서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는지 조금은 엿볼 수 있었고, 이제야 비로소 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다시금 펼쳐볼 용기가 난다.

소중한 사람과 오래 연결되려면 나도 같이 애써야 한다는 걸. 누군가를 향한 이유 없는 걸음과 무리 없는 만남이 절대 흔치 않음을 이젠 안다. (51p)

나는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있는지에 주목합니다. 당신의 ‘위치’가 아니라 ‘상태’를 듣고 싶습니다. (83p)

당신은 언제 어떻게 나의 사랑을 체험할까. 나는 영영 그것을 모르고 싶다. 그것만은 상상하거나 짐작하고 싶지 않아. 그러나 당신의 사랑이 다하는 순간은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싶다. 주위 사람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도록 두지 않길. 그래도 사랑일 거라는 헛된 착각 속에서 살게 하진 말아줘. (111p)

최진영은 사랑에 진심인 듯하다.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작가는 사랑 때문에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을 느끼기도 했고, 이렇게까지 비참할 수 있나 싶은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깊게 숙고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마음이 결국은 소설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최진영에게 소설은 곧 사랑이다. 소설에 대한 고찰은 사랑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한 편의 소설을 쓰고 나면 나는 쓰기 이전과 미세하게 다른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건과 인물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공감하고, 그 세계에 깊이 들어가본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어요. (…) 나는 쓰면서 배웁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은 것을 씁니다.” (130p)

나를 위한 사랑. 내가 필요해서 열심인 사랑.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자 터널이 끝났다. 세상이 열렸다. 이전까지는 상대를 위해 희생한다고, 억지로 맞춰준다고, 상대가 나를 견디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깨진 독에 물 붓기. 사랑을 믿지도 않으면서 갈구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244p)

소설이든 시든 문학에는 필히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가치에 대한 천착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일상의 언어로 쓰인 산문은 또다른 매력을 가지는 것 같다. 스스로를 사랑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번 독서에서 최진영 작가의 애절한 사랑을 배웠고, 그래서 그녀가 부럽기도 했다. 산문집 『어떤 비밀』을 읽으며 소설, 곧 ‘사랑’에 대한 최진영의 생각을, 마음을, 사랑을,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소설을 쓰면 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 나는 그 세계로 도망칠 수 있다 현실의 삶에서 처첨하고 비루해질 때, 지루하고 권태로울 때, 힘들고 외로울 때 나는 주문을 외운다. 괜찮아, 나에겐 소설이 있어. 그 주문을 외우면 버틸 수 있다. 하지 못한 말, 할 수 없는 말을 소설에 쓸 수 있다. 그때 내가 좀 아팠어. 서운했어. 사실은 내가 널 사랑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독자들은 내가 소설에 숨겨둔 진심을 ‘숨은그림찾기 고수’처럼 찾아낸다. 그리고 내게 속삭인다. 있잖아,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 있어.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 (286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에 대한 통찰과 교훈이 담겨있는 산문을 좋아하는 나지만, 가끔은 저자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긴 글도 궁금해진다. 그렇게 최지은 시인의 『우리의 여름에게』를 읽었다. 시집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 시집에서 대체적으로 가족의 죽음을 다룬 시들이 많다는 후기를 접하였으므로, 궁금하였다. 응축된 시적 언어가 아닌, 보다 편안한 산문의 언어로 적힌 작가의 유년 시절과 그의 생각을 에세이로 읽고 싶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이혼하시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버지께서 집안을 비우셨어야 해서 작가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므로 작가는 할머니와의 감정적 유대가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결국 돌아가셨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작가가 성인이 된 후에 작가의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신다. 작가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가정 형편은 둘째치고, 온 힘 온 마음을 다 내주었던 할머니와 아버지가 작가를 떠난 것은 너무도 큰 불행일 것이다. 아니, 고작 ‘불행’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이런 비극을 감히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나의 마음 또한 산뜻한 표지와는 다르게 한없이 무거워져만 갔다. 그리고 보통 이런 분위기의 책을 나는 쉬이 완독하지 못한다. 자기연민으로 점철된 글을 정말 싫어하고, 혹 그렇지 않더라도 섬세하게 자신의 마음을 묘사하는 문체가 내게 너무도 비참하게 다가와 그 감정을 감당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완독했다. 작가의 불우하디 불우한 어린 시절과 그로 인해 현재까지도 겪고 있는 공황장애까지, 어둡고 우울한 소재 투성이인 글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기 자신을 절대 동정하지 않는다. 유년 시절을 지내며 그 나름의 추억과 행복을 떠올리고 있었고, 혹 불행했던 시기를 적을 때에도 그저 담담하게 써내려갈 뿐이었다. 그때 그런 시절을 보내왔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이라고,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좋았다. 나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므로 작가가 부러웠다. 제목 ‘우리의 여름에게’도 아마 이런 맥락에서 지어진 것이 아닐까. 무더위와 장마, 폭우가 동반되는 계절 ‘여름’을 자신의 유년 시절에 빗대어서 현재를 살아가는 최지은이 그때의 최지은을 바라보는 이야기, 내가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오직 이것 뿐이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그동안.

힘든 내색을 보이면 한겨울에도 함께 차에서 내려 찬바람을 맞고 서 있거나, 진정될 때까지 다른 이야기를 꺼내어 속삭이거나, 가만히 손을 잡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불안이 꼭 치료되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다정히 눈 맞추며. (37p)

슬픔을 슬픔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지나가면,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무언가가 오는지도 모르겠다. 그 무언가 때문에라도 슬픔은 슬픔으로 두고 싶다. 언제든 슬플 요량으로 이불 끝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날이 밝으면 이 빛을 기억하며 씩씩하게 나가 걷자고 생각하면서. (63p)

지워버리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기억 옆에, 환한 기억을 덧대어보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완성’에 이를 수는 없겠지만 하나씩 덧붙여지는 나만의 순서와 과정을 더듬어본다. (76p)

한번 해보는 거죠. 시작은 매번 어렵지만. 마음껏 기쁘고 기쁘게 돌아오기로. 문득 그렇게 시를 쓰고 싶고요. (118p)

속마음을 털어놓고도 부끄럽거나 후회되지 않을 때가 있다.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정히 눈을 맞춰준 사람. 커다란 귀가 되어준 사람. (…) 내가 아픈 곳을 말할 때 꼭 고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의 고통을 치유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던 사람. 그런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생각한다. 이거였구나. 내가 되고 싶던 근사한 어른. (166p)

할머니의 노란 달걀찜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없지만 ‘있었던’ 순간만으로도 젖은 것이 마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179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