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었던 당시의 나로서는 이 말이 그리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애당초 ‘배려’라는 말과 ‘죽음’을 같은 문장에 놓을 수 있는 건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내 솔직한 마음으로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계시다가,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보게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것이 가족을 배려하는 길 아니었던가, 하는 게 어리석은 그때의 내 생각이었다.
『내일의 엔딩』을 읽으며 그런 내 생각이 얼마나 가볍고 얄팍한 것이었는지를 몸서리치듯 깨달았다. 간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 신체적으로 힘든 일인지. 사랑하는 내 가족이 아파하는 모습을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그런 와중에도 일상을 포기할 수는 없는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 그래서 왜 우리 할머니는 ‘가족들을 배려하셨다’는 말을 들으며 떠나셨는지…. 갑자기 할머니가 무척 보고 싶어진다.
우리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내가 떠나든 혹은 내가 떠나보내든, 결국 이별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결코 피할 수 없고 배제할 수 없는 죽음, 상실, 이별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내일의 엔딩』은 이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다. 상상하기 싫어서, 대면하고 싶지 않아서, 비겁하게 도망치고 있다. 다만, 얼마 전에 읽은 최진영 작가님의 산문집 『어떤 비밀』을 읽으며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그 문장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