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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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을 기준으로 하루키의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네번째, 그중에서도 에세이 한 권을 제외하면 소설만으로는 세번째이다. 그렇기에 나는 하루키 찐팬이라 할 수 없고, 하루키에 대해서 많은 걸 안다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조금은 알 수 있는 하루키 소설만의 특징이 있긴 하였다.

지금껏 읽은 하루키 소설들에는 모두, 어딘가 불행하고 방황하고 절망과 허무의 늪에 빠져있는 청년 주인공들이 등장하였다. 고등학생 때 읽은 <노르웨이의 숲>, 올해 8월 대만 여행 비행기 안에서 읽은 <스푸트니크의 연인>, 너무 두꺼워 읽다 지쳐 잠시 덮어둔 <태엽 감는 새 연대기> 까지. 소설 속 주인공들이 느끼는 허무와 방황이 공감되지 않으면 그저 ‘중2병’처럼 보여 도무지 이들의 행동과 심리에 몰입이 되지 않았으나(노르웨이의 숲), 그것이 조금이라도 이해나 납득이 된다면 방황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잘 그려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스푸트니크의 연인).

이번에 읽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도 그런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전 하루키 독서와는 사뭇 달랐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쓰쿠루의 처지에 ‘조금이라도 공감’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동감’할 수 있어서, 주인공의 심리 묘사와 행동들을 보며 나 또한 너무도 사무치는 슬픔을 온전히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정말로 죽어 버린 것인지도 몰라. 쓰쿠루는 그때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전해 여름, 친구 네 명에게서 존재를 부정당했을 때 다자키 쓰쿠루라는 소년은 사실상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존재의 겉모습만은 겨우 유지되었지만 그마저 약 반년 사이에 크게 바뀌어 버렸다. (57p)

서른 여섯 살인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두 살 연상의 여자친구 ‘사라’와 데이트하던 중 불현듯 과거의 아픈 상처를 털어놓는다. 고등학생 때 같이 친하게 지내던 다섯 명의 그룹이 있었는데, 대학에 진학한 후 그들에게서 느닷없이 절연을 통보받은 것이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단짝 친구들이었고 아무런 조짐이나 징후를 느끼지 못하였던 터라 그 충격은 배가 되어 쓰쿠루에게 돌아왔고, 한때 진지하게 죽음을 고려하였을 정도로 이 경험은 쓰쿠루에게 너무도 큰 상처를 입혔다. 이 말을 들은 여자친구 사라는 쓰쿠루에게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며, 지금이라도 그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한다. 이렇게 쓰쿠루는 옛날 자신을 부정하고 끊어냈던, 한때 너무도 친했던 그 옛날 친구들을 만나기 위한 ‘순례’를 떠나게 된다.

온전히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절친한 친구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느닷없이 절연을 통보받으면 어떤 느낌일지, 도무지 알고 싶지도 않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그 감각을 하루키는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로 적어내려갔다. 하루키의 특징인 ‘허무’를 느끼는 주인공의 심리가 그의 서사와 너무도 잘 맞아떨어져 일종의 거대한 시너지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소설에서 그리는 사건과 주인공의 모습은 정말 잘 어울려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준다. 감히 말하건대, 지금까지 읽은 소설을 통틀어 베스트10 안에 이 책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이 책이 너무도 감명 깊었고 좋았다. 이렇게 하루키는 또 자신의 팬을 만들었다. 아직 안 읽은 하루키 소설이 많아 너무도 행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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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트리플 28
김남숙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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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철은 딱 일 년 치만 복수를 하겠다고 했다. 보상금이라고 생각하고, 일 년, 그러니까 열두 달 동안 달마다, 많이도 아니고 딱 백만 원씩만 보내라고. 그러면 딱 열두 달 뒤에 사라져주겠다고. 안 그러면 계속 나타나서 괴롭힐 것이라고. 현철은 자신의 조건을 말하면서도 ‘많이도 아니고 딱 백만 원’이라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그깟 돈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22~23p)


작가를 꿈꾸고 있는 나로서 한 가지 쓰고 싶은 소재가 하나 있다. 바로 ‘복수극’이다. 복수하는 과정에서 ‘통쾌’한 맛을 선사하고 싶은 느낌도 분명 있지만, 그보다 내가 정말로 복수극을 쓰고 싶은 이유는 ‘복수의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 탐구하고 싶어서이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더 글로리>처럼 완벽한,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설계된 복수극은 원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쓰고 싶은 복수란, 바로 이 작품집의 표제작 <파주>에 나오는 것이다.

군 폭력에 시달리던 ‘현철’은 가해자 ‘정호’ 앞에 나타나 위와 같은 매우 시시한 복수가 시작될 것임을 선언한다. 만약 현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정호가 근무하는 곳에 그가 자신에게 했던 짓을 모조리 다 소문낼 거라고 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끝까지 그가 한 짓을 모두 폭로할 것이라고 한다. 이에 정호는 ‘다음에 만나서 술 사주고 미안하다고 풀어주면’ 된다며 같잖게 이를 여기지만, 곧 그러지 못하게 된다. 현철이 그림자처럼 매우 시시하지만서도 또 너무도 끈질기게 정호 곁을 맴돌면서, 결국 정호는 현철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현철의 태도, 너무도 시시하고 하찮아서 별볼일 없어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더 처연하고 절박한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겨서, 독자로서도 너무 그 마음이 절감되는 듯하였다. 현실에서 <더 글로리>의 문동은 같은 복수는 없다. 이는 너무 비현실적으로 통쾌하다. 그러나 <파주>는 정말 극한의 현실적인 복수를 선보인다. 만약 현실에서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면, 가진 것 하나 없는 내가 누군가에게 복수를 해야만 한다면, 정말 <파주> 속의 현철의 모습을 보일 것 같다. 시시하지만 끈질기게, 하찮지만 집요하게 말이다.

표제작 <파주>를 너무나 감명 깊게 읽어 이에 대한 리뷰가 길어졌지만, 같이 수록된 <그런 사람>과 <보통의 경우>도 아주 씁쓸하고 처절한 현실적 인간의 고뇌를 그리고 있어서 좋았다. 직장 내 불륜과 폭력, 강박적인 가려움으로 표상된 현실적인 스트레스가 너무도 직관적으로 느껴져 읽다보면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되는, 그 감각이 좋았던 김남숙 작가의 <파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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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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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책의 뒷표지에 쓰인 이 문구만큼이나 <희랍어 시간>을 잘 설명하는 표현이 있을까 싶다. 소설에는 오직 ‘그’와 ‘그녀’라는 대명사로 지칭되는 두 주인공이 나온다. <희랍어 시간>은 두 인물이 만나면서 벌어지는 소설,이 아니라 각 인물이 겪었던 사연을 교차하며 이야기를 풀어가고, 후반부에 두 사람을 교차시키며 마무리된다. 큼지막한 사건이 있는 게 아니라 인물의 사연을 듣는 데 초점을 맞춰야하는 소설이므로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는, 그렇지만 그 각각의 서사가 품고 있는 여운이 너무도 묵직하고 처절한 작품이다.



‘그녀’는 ‘말(語)’을 잃었다. 한때 ‘그것’이 그녀에게 찾아와 말을 잃었던 적도 있지만 그때는 ‘한 개의 평범한 불어 단어’ 덕분에 다시 말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런 ‘그것’이 이번에 또 찾아왔다. 이번에는 왜, 어째서 그녀는 말을 잃은 것일까. 심리치료사는 이혼 소송에서 패소하고 양육권을 빼앗긴 것,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등의 거대한 외부적 충격이 동시다발적으로 찾아와 그런 것이라 함부로 추정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며 이를 부정한다.



그녀는 왜 말을 잃었을까. 심리치료사가 말한 이유도 납득할 수 있지만, 왜 그녀는 이를 부정한 것일까. 내가 감히 짐작해보건대, 그런 외부적 충격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말을 잃게 만든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자아’를 잃어버린 것이고, 그 자아를 잃게 만든 데에 외부적 충격들이 영향을 끼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즉, 그녀는 이혼 소송을 겪으며 ‘~의 아내’를 못하게 되었고, 양육권을 빼앗겨서 ‘~의 엄마’ 또한 이제는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육친의 죽음으로 ‘~의 딸’이라는 호칭도 잃게 되었으니,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모조리 없어져 내면의 자아가 부서지고, 이것이 결국 말을 잃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 것 아닐까?

여하튼 말을 잃은 그녀는 고대 희랍어를 배우게 되고, 그곳에서 강사인 ‘그’를 만나게 된다. 그는 유전적인 질환으로 ‘눈(眼)’을 잃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질병과 관련된 말실수를 저질러 첫사랑을 잃었다. 또한 아버지에게는 평생 떳떳하지 못한 아들로서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음을, 그것이 오해였음을 깨닫는다. 그가 앓고 있는 유전병이 아버지 본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여 느끼는 죄책감, 자기혐오 등으로 인해 아들인 그를 온전히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한 것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이 만나며 이야기는 고조된다. 얼굴로 달려드는 새를 피하려던 ‘그’는 건물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그런 그를 ‘그녀’가 발견하면서 두 사람은 비로소 소통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하고, 그녀는 그의 손에 글을 적는 방식으로 말이다. 과연 두 사람은 어떤 끝맺음을 향하게 될까, 두 사람이 서로를 구원하게 될까? 아니면 두 사람이 함께 전락해갈까? 마지막 챕터의 제목이 ‘0’인 것, 그리고 그 챕터가 ‘그녀’의 시점으로 서술되어있는 것은 위 질문에 대해 작가가 알려준 답이지 않을까 싶다. ‘그녀’가 결국 1인칭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소멸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침내 구원해주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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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에센셜 한강 (무선 보급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디 에센셜 The essential 1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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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강 작가님의 <흰>을 읽고 난 뒤 리뷰를 올렸을 때, 친구의 여자친구로부터 <희랍어 시간>의 추천을 (친구를 통해) 전해듣게 되었다. 때마침 한강 작가님의 다음 작품으로 무얼 읽을지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한참 전에 구매해두고 펼쳐보지 않았던 <디 에센셜 한강>의 초판 양장본이 눈에 들어왔던 참이었다. <디 에센셜 한강>에는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을 비롯한 두 편의 단편과 다섯 편의 시, 그리고 산문 일부가 수록되어 있으므로, 별다른 고민 없이 곧바로 이 책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하였다.



[장편소설 - 희랍어 시간]

<디 에센셜 한강> 판본으로 다 읽은 직후에, 이게 무슨 신의 계시인 양, 곧이어 완독챌린지 독파에서 운영하는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특집 챌린지

중 <희랍어 시간>의 독파메이트가 되었다…🤩 이에 따라 <희랍어 시간>에 대한 길고 자세한 리뷰는 게시물을 따로 올릴 생각이기 때문에 이곳에는 간단한 감상만을 작성하려 한다. 처음 읽은 <희랍어 시간>은 역시나 함축적인 문장들로 인해 여러번 곱씹어 읽어야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조금은 어렵기도 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모든 문장을 필사했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문장 하나하나를 읽으며 감탄하기도 한 작품이기도 했다. 평소에 차분하고 꼼꼼히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단편소설 - 회복하는 인간, 파란 돌]

한강 작가님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않고 <작별>을 말하곤 한다.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와는 다른 단편소설 <작별>이 따로 있다. 읽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특정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심정이 밀도 높게 다뤄진다는 점이 특히 그러했다. (<작별>은 갑자기 눈사람이 되어 점차 녹기 시작한 어떤 엄마의 이야기이다.) 이번에 읽은 두 편의 단편 역시 너무도 좋았다. 단편의 특성상 ‘서사’보다는 특정 장면 및 심리에 대한 ‘밀도’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한강 작가의 단편은 정말 탁월한 것 같다


가족 모임에 당신이 나타나면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당신뿐이었다. 활짝 미소를 지은 채로, 당신은 당신의 언니를 사랑하지 않으려 애썼다.

(…)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혈육을 향해서만 느낄 수 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친숙한 감정을 당신의 내부에서 깨우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당신의 마음을 최대한 차갑게, 더 단단하게 얼리기 위해 애썼다.

(231p)


처음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얼굴이 내 눈앞 어딘가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위로 아련히 어려 있고, 놀라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풀 위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그 느낌이 강한 슬픔과 닮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262p)


[시]

역시나… 시는… 어려웠다…😅 다만 ‘마크 로스코와 나 - 2월의 죽음’이라는 시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는 감상만은 남기고 싶다.


[산문]

한강 작가님은 어서 산문집을 내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문 또한 소설 못지 않게 너무도 좋았다. 특히 수록된 산문들 중 ‘종이 피아노’와 ‘출간 후에’가 인상 깊었다. 인스타 분량상 ‘종이 피아노’만 설명하자면, 이 글은 한강 작가가 어린 시절에 가난했던 집안 형편으로 인해 피아노 학원을 다닐 수 없어 종이 피아노를 사다가 뚱땅거려(?)보았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중학교 3학년 학생이 되었을 무렵,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다소 옅어졌던 때가 되어서야 한강의 부모님이 비로소 학원을 보내주겠다고 하셨는데, 한강 작가가 부모님께 괜찮다고 말하니 그때 부모님께서 한강 작가에게 말씀하셨던 게 너무도 사무치도록 가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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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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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보다 장편을 훨씬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단편집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좋은 단편 하나를 만나더라도 같이 수록된 다른 단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꽤 있어서, 결과적으로 단편집 전체에 대한 인상이 좋은 경우는 상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믿고 읽는 단편 작가’의 리스트가 있다. 한강, 최은영, 김병운, 앤드루 포터. 이 작가들의 단편집은 온전하게 신뢰할 수 있다. 적게는 여섯 편, 많게는 열 편 정도의 단편이 실려있는 소설집에 그 수록된 소설들이 십중팔구 이상으로 좋은 경우는 거의 드문데, 이 작가들은 그 어려운 것을 해낸 분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 목록에 ‘예소연’이라는 이름 석 자를 추가할 것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예소연이 쓴 작품들의 특징은 미묘하게 뒤틀린 인물들의 관계에서 비롯한 마음, 그 심리를 기가 막힐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심리 묘사를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인물들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 또한 서사의 시발점으로서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예소연은 그 부분을 아주 꼼꼼하고 충실하게 해내었다.

[아주 사소한 시절]-[우리는 계절마다]-[그 얼굴을 마주하고]의 3부작으로 내용이 이어지는 단편들은 주인공 ‘희조’와 그녀의 친구 ‘미정’ 간의 우정이 묘하게 뒤틀리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었을 때까지, 두 인물의 관계가 변화하는 양상을 독자로서 지켜보는 재미는 정말 탁월했다. 현실에서 전혀 그럴 수 없는, 두 명의 사춘기 소녀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이지 않을까.

[팜]과 [그 개의 혁명], 두 단편도 특히나 좋았다. 물론 이어지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부녀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딸을 사랑하지만 그 표현 방식이 조금은 서투른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관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또한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와 우리 아빠는 어떤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말이다.

‘부녀 관계’ 못지 않게 ‘부자 관계’ 또한 묘하게 어설프고 어색한 느낌이 있으므로 나는 두 소설을 읽으면서도 충분히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 또한, 아빠를 다른 시각으로, 다른 마음가짐으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 또한 든다. 무뚝뚝하고 살갑지 않은 아빠가 미웠던 적도 있지만, 아빠는 아빠 나름의 방식으로 나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애틋한 감상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어서 너무도 좋았던 <사랑과 결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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