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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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2024년 올해의 책으로 예소연 작가의 <사랑과 결함>을 꼽았었다. 어딘가 살짝 뒤틀린 관계의 인물들에게서 내 모습이 언뜻 비쳐 보여 뜻하지 않은 공감과 위로를 물씬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읽은 <영원에 빚을 져서> 역시 그러한 관계성이 설정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중편’으로 길어진 분량만큼이나 작품에 담긴 메세지와 여운은 한층 더 깊고 짙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positive). 왜냐하면 소설 속 인물들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를 ‘세월호’, ‘이태원 참사’ 등의 무겁고도 날카로운 담론으로 확장시키기 때문이었다.


<영원에 빚을 져서>에는 세 명의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동’, 그리고 그녀의 친구인 ‘석’, ‘혜란’. 소설은 동이 혜란에게서 석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되면서 시작된다. 사실 석은 두 사람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껄끄럽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세 사람은 이전에 대학생 시절 캄보디아로 교육 봉사를 나가게 되며 가까워졌으나, 어떤 일을 계기로 사이가 점차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두 사람이 석을 찾기 위해 캄보디아로 다시 가는 현재 시점과, 이전에 캄보디아에서 봉사를 하는 동안 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되짚는 과거 시점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이들이 캄보디아에서 봉사하고 있었을 때 한국에서는 세월호 사건이 터졌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날 이후로 그녀들의 일상과 관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날 선 상태로 서로를 대했고 사소한 다툼을 벌이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된 데에 정확한 맥락과 이유를 들어 설명할 순 없지만, 나 같은 경우는 내가 속했던 세계가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33p)


석은 두 사람과 달리 그 문제에 조금 더 직접적으로 분노와 슬픔을 표출하는 사람이었다. 한국에 다시 돌아온 후 몇 년이 지나 또다시 벌어진 ‘이태원 참사’를 두고도 석이는 ‘마치 제 일인 것마냥 고통스러워’(63p)했지만 다른 두 사람은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지 않은 일에는 쉽게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94p)이었다. 이런 점으로 말미암아 석과 두 사람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갔다.


결국 나와 혜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석이의 마음과 고통을 함부로 가늠하려고 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해하는 것과 가늠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65p)


이들의 사이가 틀어진 결정적 계기는 다름 아닌 ‘말’이었다. 너무도 가볍게 내뱉고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말’. 석이 캄보디아의 한 남학생 ‘삐썻’과 약간의 썸(?)을 타는 듯한 기류가 느껴지자, 다른 두 사람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때마침 석과 삐썻이 밤중에 외출을 감행하자 남은 두 사람은 이들을 두고 함부로 섣부른 판단을 하게 되는데… (스포일러 방지)


비뚤어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운동장을 돌며 나눴던 대화들…… 게네 아마 잔 것 같아. 그건 좀 아니지 않니? 모든 것에 정답이 있다고 믿고 함부로 판단하던 나날들이었다. (106p)


소설 속 주인공에게서 나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실제로 나 또한 철없던 시절 다른 사람에 대한 좋지 못한 언행을 일삼았던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고 인연이 끊겨버린 경험이 있었다. 그때에도 속으로 반성을 많이 했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지금까지도 아주 조심히 지켜오고 있는 중이다. 그 경험이, 그 아프고 쓰라리고 시린 그때의 기억이 <영원에 빚을 져서>를 읽으며 다시금 되살아났다. 그래서 다시 한번 반성하는 시간을, 그리고 마음가짐을 다잡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기억은 집요하게 파고들수록 쪼개져 나를 아프게 했’지만(70p), 그럼에도 파고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잊을 수 없으니까. 잊어서는 안되니까. 


내가 가지고 있던 내밀한 경험들이 예소연의 문장으로 다시금 되살아나 읽힐 때 독자로서 받는 위로와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렇기에 앞으로 출간되는 예소연의 모든 작품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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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 - 불완전한 진화 아래 숨겨진 놀라운 자연의 질서
앤디 돕슨 지음, 정미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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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 책은 제목을 잘못 지은 것 같다. ‘고래는 물에서 숨을 쉬지 않는다’는 문장 자체는 너무도 자명하고 당연한 사실이기에 독자로서 아무런 궁금증을 자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장에 숨긴 뜻을 알고 나면 갑자기 호기심이 동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고래는 물에서 지낸 지 수천년이 지났음에도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진화되지 못한 것인가”

이 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진화’의 개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우리는 보통 ‘~~을 위해 진화했다’라고, 목적론적 개념으로 진화를 인식해왔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진화가 꼭 좋은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한다. 그렇기에 각 장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사례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글에서 모든 내용을 요약할 순 없으므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들을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죽거나 배고프거나]

흔히들 포식자와 피식자의 대결 구도를 떠올려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포식자의 승리를 예감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포식자가 사냥에 성공하는 경우보다 피식자가 도망치는 데 성공하는 경우가 약 세 배 가량 더 많다. 이를 진화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 대결에서 포식자가 패배할 경우 감당해야하는 비용(손실)은 ‘몇 끼니의 배고픔’이다. 그러나 피식자가 패배할 때는 ‘목숨’… 그러니 진화에 대한 ‘압력’이 피식자에게 더욱 강력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치타와 가젤의 관계에서 ‘속도’만을 따졌을 때는 치타가 더 빠르지만, 가젤은 치타의 추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치타를 감지하는 감각이 잘 발달되었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이 경쟁에서는 피식자가 조금 더 우위에 있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뻐꾸기 둥지에서 날아간 것]

탁란. 아주 흥미로운 소재다. 대체 왜 숙주 새들은 뻐꾸기 새끼를 그저 오냐오냐(?) 키워주기만 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자신의 종이 아닌 생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숙주가 뻐꾸기를 인식하는 매개체에 3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체 뻐꾸기, 알, 그리고 새끼. 이를 인식하는 과정은 별개이므로 비용과 이득이 달라져, 이 행동들은 전체적이 아닌 단편적으로 전달된다.

‘성체 뻐꾸기’를 인식하고 이를 공격하는 것은, 꼭 숙주에게 이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뻐꾸기를 공격하며 내는 시끄러운 소리가 오히려 그 숙주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둥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 뻐꾸기는 이들을 조용히 지켜볼 수 있다. 이 경우 새들의 공격적인 행동은 이득이 아닌 해가 되버리고 만다.

뻐꾸기의 ‘알’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뻐꾸기가 받는 진화적 압력이 더 크다. 그래서일까, 뻐꾸기의 알과 숙주 새의 알은 놀랍도록 비슷하게 생겼다. 뻐꾸기의 진화가 승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뻐꾸기의 ‘새끼’를 자신의 새끼로 착각하는 것은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생물학자는 ‘각인’의 개념을 제시한다. 자식이 부모를 각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으로 부모가 자식을 각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각인’의 방식은 뻐꾸기 새끼를 키우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또다른 선택지는 ‘선천적 인식’, 즉 선천적으로 자기 새끼가 아닌 새끼들을 인식하도록 진화하는 것인데, 어째서 새들은 선천적으로 뻐꾸기 새끼를 인식하도록 진화하지 않은 것인가. 그 이유는 뻐꾸기가 (마치 알처럼) 숙주 새끼를 모방하도록 진화하게 되면 이에 숙주 새는 전혀 대응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탁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연 선택이 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는 진리다.

[무임승차자]

생활 방식으로서 ‘기생’이 지닌 매력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오로지 ‘전염’ 뿐이다. 이를 위해 기생자들은 재채기(감기), 무는 행위(광견병) 등 많은 방법을 진화, 정교화시켜왔다. 그렇다면 숙주는 왜 이런 기생자들의 방법을 용납하는 것일까? 이는 앞서 보았던 포식자-피식자의 대결 구도와도 비슷하다. 기생자-숙주의 대결에서 숙주보다 기생자가 더 많은 선택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숙주도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법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숙주는 기생자에게 대응하는데, 이는 바로 ‘성’이다. 성이 진화한 이유에 대한 병원체 저항성 이론에 따르면, 병원체는 무성이고 복제를 통해 번식하기 때문에 약간의 무작위적 돌연변이는 있을지 몰라도 모든 숙주가 유전적으로 동일하지만, 성적으로 번식된 숙주들은 부모 어느 쪽과도 정확히 갖지 않으므로 적어도 일부 병원체에 대한 저항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를 고려하더라도 승부의 저울은 여전히 병원체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병원체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답으로는 ‘독성’을 꼽을 수 있다. 병원체는 번식에 도움이 되는 최적의 자원을 숙주로부터 취하지만, 만약 번식(숙주 자원을 소비함으로써 독성 증가)이 너무 잘되어서 병원체가 이동할 기회(전염)를 얻기 전에 숙주가 죽어버린다면, 독성은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병원체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새로운 병원체는 대체로 더 낮은 독성을 갖는 쪽으로 진화한다고 한다.

[아름답고도 저주받은자]

수컷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을 상상해보라. 이는 포식자의 눈에 더 잘 띌 수 있는 위험이 있고, 그 외에도 암컷을 유인하는 일을 제외하면 수컷에게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효율에도 더욱 화려한 깃털을 갖도록 진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설명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첫번째 이론은 ‘섹시한 아들’ 이론이다. 이 이론은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수컷이 가장 많은 자손을 남긴다고 주장한다. 화려한 수컷이 칙칙한 수컷에 비해 살아남는 비율은 낮지만, 그렇게 생존한 수컷은 훨씬 더 높은 짝짓기 성공률을 보인다는 점에서 발전한 이론이다.

두번째 이론은 ‘정직한 신호’ 이론이다. 이 이론은 화려한 장식이, 그러한 장식을 한 자의 특정 품질에 대한 실제적인 정보를 전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암컷은 신체조건이 가장 좋은 수컷, 즉 면역에 가장 좋은 유전자를 지닌 수컷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일곱 번째 이빨의 행방]

코끼리는 사는 동안 여섯 번의 이빨이 나지만, 일곱 번째 이빨은 나지 않아 결국 굶어 죽는다고 한다. 이 내용은 분명 ‘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코끼리를 비롯한 모든 동물은 분명히 늙는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할 필요는 있다.

노화를 설명하는 여러 과학 이론들이 있지만, 나는 앞서 언급된 코끼리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더 와닿았으므로 이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코끼리 무리에도 번식기가 지난 나이든 개체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개체가 갖고 있는 지식, 이를테면 먹이를 찾는 방법이나 포식자를 피하는 방법 등에 대한 삶의 지혜는 분명히 종족 유지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명한 늙은 암컷 우두머리가 너무 오래 살아서 쓸모 없어질 수도 있다. 이를테면 70세의 암컷이 60세의 암컷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진 않을 것이고, 70세 암컷의 지식이 이미 무리 내에 존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코끼리의 일곱 번째 이빨이 나도록 하는 진화가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강력하면서도 수긍이 간다. 바로 노화를 자연 선택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 중 하나로 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해결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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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 공격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3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빛소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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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소굴세계문학전집서포터즈

지금까지 읽은 에밀 졸라의 작품으로는 <인간 짐승>과 <목로 주점>이 있다. 두 작품 모두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두꺼운 장편소설로, 읽다보면 많은 등장인물들 간에 얽히고설킨 관계들에서 비롯한 막장 스토리에 압도되는 매력이 강력하다. 다만 방대했던 분량만큼 사건이 복잡하고 촘촘하게 짜여있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던 적도 있었고, 막장이어도 너무 막장인 터라 계속 읽으면서 진이 빠지거나 지치는 경우 또한 더러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단편집은 전혀 달랐다. 에밀 졸라가 단편을 이렇게나 잘 쓰는 작가였나, 싶을 정도로 인물들이 겪는 이야기에 독자로서 완전히 빠져들어 작품을 읽었다. 그 이유를 나름 분석해보자면, 장편보다는 분량이 적어서 그런지 훨씬 더 간결하고 깔끔한 서사를 바탕으로 인물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어 집필된 듯했기 때문이었다.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었고, 다섯 편의 소설 모두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더더욱 좋았던 단편들이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선 너무 좋아서 ‘우와’하는 탄성을 내지를 정도였다. 다섯 편의 단편을 모두 소개하기엔 분량이 너무 길어질 듯하므로, 육성으로 소리를 내지르며 감탄해 마지않은 단편 <방앗간 공격>과 <올리비에 베카유의 죽음>에 대해서만 소개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다섯 편 모두 좋았다는 점은 꼭 말하고 싶다. 그러니 에밀 졸라나 프랑스 문학에 관심 있으면 꼭 전편을 모두 읽어보길 바란다.)

[방앗간 공격]

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에 대한 이런 한줄평이 기억에 남는다. ‘국가적 차원의 거대한 사건을 개인적 차원의 슬픔으로 승화시켜 몰입과 공감을 끌어올리는 수작이다.’ 이 말을 똑같이 <방앗간 공격>에도 하고 싶다. (물론 두 작품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방앗간 공격>은 실제 역사 중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인해 한 가정이 겪게 된 비극을 그리고 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한 여성이 겪는 처참한 심정을 졸라의 섬세한 필치가 극대화시켜 더욱 강렬한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는 듯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정말 압권인데…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설명은 생략한다. 제발, 꼭 한번 읽어보기를 바랄 뿐이다.

[올리비에 베카유의 죽음]

혹시 <방앗간 공격>이 조금 흔한 소재와 서사라고 생각했다면, <올리비에 베카유의 죽음>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나름 적지 않은 소설을 읽어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강경증(몸이 경직되어 의지와 상관없이 일정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증상)의 발작으로 죽었다고 오해받아 생매장을 당해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남자 주인공의 공포와 무력감이 너무도 생생해 몸서리쳐질 정도로 좋았던(?) 작품이었다. 작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강경증이 풀려서 결국 관을 뚫고 나오게 되는데, 그때 그 남성이 목격한 것으로 인해 그는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 이 남성이 목격한 건 무엇일까. 무엇을 깨달았길래 삶의 의미를 잃은 것일까. 궁금하다면 이 책, 꼭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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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커 래빗홀 YA
이희영 지음 / 래빗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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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에게는 형제보다도 가까운 절친한 친구가 있다.

- 주인공은 그 친구의 여자친구를 좋아한다.

- 불운한 사고로 인해 그 친구가 죽는다.

- 주인공은 그 친구의 여자친구와 연인이 된다.

- 프로포즈를 마음 먹은 차에,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 과연 주인공은 친구를 살릴까?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를 만나지 않게 할까?



<셰이커>를 구성하고 있는 토대가 되는 설정들을 위에 정리해보았다. 이를 보면 알겠지만 이 소설은 ‘타임슬립’이라는, 이제는 흔해져버린 소재를 다시금 활용한 작품이다. ‘흔하다’는 표현은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인즉슨,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타임슬립’이라는 소재를 이미 활용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많은 작품들에서 ‘타임슬립’ 소재를 차용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갈 때 그 이후의 미래를 다 알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한 통쾌함이랄지, 답답함이 해소되는 지점이 분명 독자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터다. 그러나 그에는 필연히 뒤따르는 위험 부담이 있는 법이다. 이제는 그런 소재를 가진 작품이 홍수처럼 범람하듯 많아졌으므로, 독자들 또한 그런 장르물을 보는 눈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준이 엄격해지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셰이커>를 읽는 동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기욤 뮈소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다. 이 작품도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으로, 그 시간여행으로 인해 겪게 되는 주인공의 딜레마가 정말 깊이 있고 절박하게 느껴진다. <셰이커>에서도 비슷한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나오는데, 나는 두 작품을 비교했을 때 기욤 뮈소의 작품이 재미나 깊이 모두 훨씬 더 강력한 것 같았다.

물론, <셰이커>가 절대 혹평을 남길 만한 작품은 아니다. 이희영 작가의 기본적인 필력이 뒷받침 되어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 분명한 소설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매력을 느끼진 못했다. 그저 흔하디 흔한 타임슬립물 한 편을 보는 것에서 그쳤다. <페인트>, <페이스>, <테스터> 등 정말 재밌으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던지는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났던 터라 기대가 높았고, 그렇기에 실망 또한 크게 느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작가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놓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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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3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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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두 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이 작품은, ‘제르베즈’라는 여주인공의 상승 곡선(1권)과 하강 곡선(2권)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보고 있노라면 제르베즈가 너무도 불쌍해 쳐다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남편이 바람나서 떠나고, 새로운 남자가 던지는 끊임없는 추파를 못 이겨 다시 결혼생활을 하는데 그 새 남편이 사고를 당해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그랬더니 전남편이 다시 돌아와 새 남편과 절친한 친구가 되고(?!), 얘네들은 돈도 안 벌어오고 밥만 축내서 불쌍한 우리 제르베즈만 되게 고생하다 결국 굶어죽는 내용이니… 이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에밀 졸라의 소설답게 참… 치밀하게 배경을 묘사하고 인물들의 삶을 아주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음에도 가독성이 워낙 뛰어나 술술 읽혔다. 그러나 내용이 워낙 내 취향과 맞지 않거니와 이 서사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도대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기도 했다. 그저 아침드라마에 불과한 작품 아닌가? 왜 이런 작품이 고전이라는 명성을 얻은 것인지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 실려 있는 작품 해설을 읽으며 이 작품의 가치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직 대중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던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을 통해 선풍적인 인기와 인지도를 얻었다고 한다. 더불어 이 작품으로 인해 졸라는 우파와 좌파, 부르주아와 민중 양쪽 모두의 분노를 동시에 샀다고 하는데, 이를테면 부르주아 계층에서는 이 작품의 노골적인 언어와 몇몇 장면의 음란함에 역겨움을 토로했고, 민중 계층의 독자들은 작품 속 노동자들의 빈곤과 타락상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불편함과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다양한 (혹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불편함을 초래했다는 점은, <목로주점>이 당시에 문학적 금기에 속하는 ‘민중’과 ‘육체’라는 소재로 노동자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최초’의 소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세탁부인 ‘여자’ 주인공이었으므로, 보수적인 문단계 인사들에게는 여간 충격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과 그로 인한 흉측한 몰락’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자체로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몰입할 수 있었을지, 또한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그때 그 시절의 고난과 역경을 낱낱이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목로주점>은 더할 나위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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