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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 - 불완전한 진화 아래 숨겨진 놀라운 자연의 질서
앤디 돕슨 지음, 정미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5월
평점 :
아무래도 이 책은 제목을 잘못 지은 것 같다. ‘고래는 물에서 숨을 쉬지 않는다’는 문장 자체는 너무도 자명하고 당연한 사실이기에 독자로서 아무런 궁금증을 자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장에 숨긴 뜻을 알고 나면 갑자기 호기심이 동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고래는 물에서 지낸 지 수천년이 지났음에도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진화되지 못한 것인가”
이 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진화’의 개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우리는 보통 ‘~~을 위해 진화했다’라고, 목적론적 개념으로 진화를 인식해왔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진화가 꼭 좋은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한다. 그렇기에 각 장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사례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글에서 모든 내용을 요약할 순 없으므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들을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죽거나 배고프거나]
흔히들 포식자와 피식자의 대결 구도를 떠올려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포식자의 승리를 예감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포식자가 사냥에 성공하는 경우보다 피식자가 도망치는 데 성공하는 경우가 약 세 배 가량 더 많다. 이를 진화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 대결에서 포식자가 패배할 경우 감당해야하는 비용(손실)은 ‘몇 끼니의 배고픔’이다. 그러나 피식자가 패배할 때는 ‘목숨’… 그러니 진화에 대한 ‘압력’이 피식자에게 더욱 강력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치타와 가젤의 관계에서 ‘속도’만을 따졌을 때는 치타가 더 빠르지만, 가젤은 치타의 추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치타를 감지하는 감각이 잘 발달되었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이 경쟁에서는 피식자가 조금 더 우위에 있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뻐꾸기 둥지에서 날아간 것]
탁란. 아주 흥미로운 소재다. 대체 왜 숙주 새들은 뻐꾸기 새끼를 그저 오냐오냐(?) 키워주기만 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자신의 종이 아닌 생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숙주가 뻐꾸기를 인식하는 매개체에 3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체 뻐꾸기, 알, 그리고 새끼. 이를 인식하는 과정은 별개이므로 비용과 이득이 달라져, 이 행동들은 전체적이 아닌 단편적으로 전달된다.
‘성체 뻐꾸기’를 인식하고 이를 공격하는 것은, 꼭 숙주에게 이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뻐꾸기를 공격하며 내는 시끄러운 소리가 오히려 그 숙주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둥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 뻐꾸기는 이들을 조용히 지켜볼 수 있다. 이 경우 새들의 공격적인 행동은 이득이 아닌 해가 되버리고 만다.
뻐꾸기의 ‘알’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뻐꾸기가 받는 진화적 압력이 더 크다. 그래서일까, 뻐꾸기의 알과 숙주 새의 알은 놀랍도록 비슷하게 생겼다. 뻐꾸기의 진화가 승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뻐꾸기의 ‘새끼’를 자신의 새끼로 착각하는 것은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생물학자는 ‘각인’의 개념을 제시한다. 자식이 부모를 각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으로 부모가 자식을 각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각인’의 방식은 뻐꾸기 새끼를 키우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또다른 선택지는 ‘선천적 인식’, 즉 선천적으로 자기 새끼가 아닌 새끼들을 인식하도록 진화하는 것인데, 어째서 새들은 선천적으로 뻐꾸기 새끼를 인식하도록 진화하지 않은 것인가. 그 이유는 뻐꾸기가 (마치 알처럼) 숙주 새끼를 모방하도록 진화하게 되면 이에 숙주 새는 전혀 대응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탁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연 선택이 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는 진리다.
[무임승차자]
생활 방식으로서 ‘기생’이 지닌 매력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오로지 ‘전염’ 뿐이다. 이를 위해 기생자들은 재채기(감기), 무는 행위(광견병) 등 많은 방법을 진화, 정교화시켜왔다. 그렇다면 숙주는 왜 이런 기생자들의 방법을 용납하는 것일까? 이는 앞서 보았던 포식자-피식자의 대결 구도와도 비슷하다. 기생자-숙주의 대결에서 숙주보다 기생자가 더 많은 선택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숙주도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법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숙주는 기생자에게 대응하는데, 이는 바로 ‘성’이다. 성이 진화한 이유에 대한 병원체 저항성 이론에 따르면, 병원체는 무성이고 복제를 통해 번식하기 때문에 약간의 무작위적 돌연변이는 있을지 몰라도 모든 숙주가 유전적으로 동일하지만, 성적으로 번식된 숙주들은 부모 어느 쪽과도 정확히 갖지 않으므로 적어도 일부 병원체에 대한 저항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를 고려하더라도 승부의 저울은 여전히 병원체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병원체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답으로는 ‘독성’을 꼽을 수 있다. 병원체는 번식에 도움이 되는 최적의 자원을 숙주로부터 취하지만, 만약 번식(숙주 자원을 소비함으로써 독성 증가)이 너무 잘되어서 병원체가 이동할 기회(전염)를 얻기 전에 숙주가 죽어버린다면, 독성은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병원체의 딜레마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새로운 병원체는 대체로 더 낮은 독성을 갖는 쪽으로 진화한다고 한다.
[아름답고도 저주받은자]
수컷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을 상상해보라. 이는 포식자의 눈에 더 잘 띌 수 있는 위험이 있고, 그 외에도 암컷을 유인하는 일을 제외하면 수컷에게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효율에도 더욱 화려한 깃털을 갖도록 진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설명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첫번째 이론은 ‘섹시한 아들’ 이론이다. 이 이론은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수컷이 가장 많은 자손을 남긴다고 주장한다. 화려한 수컷이 칙칙한 수컷에 비해 살아남는 비율은 낮지만, 그렇게 생존한 수컷은 훨씬 더 높은 짝짓기 성공률을 보인다는 점에서 발전한 이론이다.
두번째 이론은 ‘정직한 신호’ 이론이다. 이 이론은 화려한 장식이, 그러한 장식을 한 자의 특정 품질에 대한 실제적인 정보를 전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암컷은 신체조건이 가장 좋은 수컷, 즉 면역에 가장 좋은 유전자를 지닌 수컷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일곱 번째 이빨의 행방]
코끼리는 사는 동안 여섯 번의 이빨이 나지만, 일곱 번째 이빨은 나지 않아 결국 굶어 죽는다고 한다. 이 내용은 분명 ‘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코끼리를 비롯한 모든 동물은 분명히 늙는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할 필요는 있다.
노화를 설명하는 여러 과학 이론들이 있지만, 나는 앞서 언급된 코끼리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더 와닿았으므로 이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코끼리 무리에도 번식기가 지난 나이든 개체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개체가 갖고 있는 지식, 이를테면 먹이를 찾는 방법이나 포식자를 피하는 방법 등에 대한 삶의 지혜는 분명히 종족 유지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명한 늙은 암컷 우두머리가 너무 오래 살아서 쓸모 없어질 수도 있다. 이를테면 70세의 암컷이 60세의 암컷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진 않을 것이고, 70세 암컷의 지식이 이미 무리 내에 존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코끼리의 일곱 번째 이빨이 나도록 하는 진화가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강력하면서도 수긍이 간다. 바로 노화를 자연 선택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 중 하나로 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해결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