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은빛 눈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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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서포터즈2기

지금까지 비채 서포터즈로 활동하면서 읽은 책들 중 가장 좋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물론 취향적인 부분이 아주 많이 반영되긴 하였으나, 그럼에도 이 작품을 두고 싫은 소리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된다. 



과학을 연구하는 저자가 쓴 소설이라는 소개글을 보고 당연하고 막연하게 SF 장르일 거라고 예단했다. 하지만 그저 다루고 있는 소재가 과학적인 느낌이 있을 뿐,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들은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피곤하고 지치는 현실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위로를 건네는 느낌이 작위적이지 않아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지는 이 감각, 너무 좋다.



책에는 총 다섯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있고,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주제 한 줄기가 있다.

📖 ‘과학자가 보고 있는 풍경을, 세계의 모습을,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우연히 들여다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294p)


옮긴이의 말에 있는 문장인데, 이보다 책을 설명할 있는 문장이 없을 같아 이곳에 옮겨 적는다. 앞서 말했듯 요즘 서점가에 유행하는 뻔하고 흔한 힐링 소설들과는 전혀 다르다. 실제 저자가 지구과학을 연구하는 분이다보니 과학자만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위로가 참으로 진정성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편의 특성상 줄거리를 옮겨 적다가 결말까지 발설할 같아 참고 그저한번만 읽어봐라 말할 뿐이다. 너무 좋았고, 같이 출간된 저자의 다른 작품 또한 언젠가 구매하여 읽고자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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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와 마녀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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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녀가 복잡하게 얽힌 사각 관계, 게다가 출생의 비밀까지. <성녀와 마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이라 부를 법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것도 초반부터 그 설정을 드러내어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토지’라는 대서사를 쓰신 박경리 선생님이 이런 개막장 통속극을 쓰셨다고? 하며 말이다.

이야기의 주축을 구성하는 인물은 총 네 명이다. 일단 먼저 수영(男)과 형숙(女). 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으나 수영의 아버지 안 박사의 반대로 헤어지게 된다. (안 박사가 형숙의 출생의 비밀을 수영에게 알리는데, 그 모습을 형숙이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영은 안 박사가 점찍어둔 하란(女)과 결혼하게 되지만, 수영의 마음은 여전히 형숙만을 향하고 있으며 하란은 뭐라 말도 못하고 그저 수영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수영의 여동생과 약혼했던 세준(男) 또한 골때리는 인물이다. 우연히 마주친 하란을 마주하고 한눈에 반해버려 수미와의 약혼을 파하고 계속 하란만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이는… 미친놈이다.

일반적인 막장 드라마가 그러하듯, 이 소설 또한 기가 막히게 빠른 속도로 읽혔다. 재미를 부인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재미가 유쾌한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이 또한 막장 드라마를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다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욕하면서도 챙겨보지 않는가? 이 소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단 하나도 따라갈 수 없었다. 도무지 공감되지 않는 류의 애정선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의 흐름 속으로 빨려들어가긴 하였다.

대체 이 막장극을 통해 박경리 선생님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온라인 서점에 다른 분들이 쓴 후기를 보고 싶었으나 단 한 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내게 답을 준 것은 다름아닌 나무위키였다.


하란을 통해 현모양처 하란에게 남는 건 고통과 기다림 뿐이란 걸 보여주며 지고지순한 여성상을 비판하고 형숙을 통해서는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지배욕구를 비판한다. "무서운 탕녀이자 지독한 요부였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연민의 감정을 드러내며 자신을 지배하려는 남자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을 친 여자"라고 형숙을 평하는 부분이 이 소설에서 작가의 의도를 가장 정확히 드러내는 부분.


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위의 시사점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 이 소설은 그저 막장 연애를 미친듯이 재밌게 그려내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간 통속극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박경리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는 정말 커졌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작품인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혹시 박경리 소설에 입문하고 싶은데 스무 권짜리 <토지>가 부담스럽다면, 한 권짜리 <성녀와 마녀>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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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내 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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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처음 읽어보는 영화 시나리오였다. 풍경이나 심리 묘사에 분량을 많이 할애할 수 있는 소설과 달리 인물들의 대사로만 내용이 전개되는 시나리오의 특성상, 책의 난이도와는 별개로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당연하다. 한 페이지에 적혀있는 글자 수가 워낙 적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만큼 그 안에 담긴 뜻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작품에는 프랑스 여성과 일본 남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품 내용은 이 둘이 나누는 대화가 전부이다. 그 대화 속에서 여성 주인공이 겪었던 참혹한 사연을 회상하고, 지금 이순간이 지나면 끝나버릴 사랑에 더더욱 절박하게 매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다만 이들의 언행에서 내가 무엇을 느껴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이 또한 당연하다. ‘뒤라스’의 글이니 말이다. 그러나 해설을 읽으며 안개로 가득 찬 나의 뇌리에 한 줄기 빛이 들어서는 듯했다.


눈앞에 보이는 현재의 평범한 모습을 마주하고 과거의 참상을 끊임없이 똑같은 강도로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역사뿐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기억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프랑스 여자는 자기 인생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통과하며 절대 잊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이 희미해지는 체험을 한다. 그녀는 잊지 않기 위해서 사투를 벌인다. 그러나 망각의 막강한 힘은 그 너머에 있다. 잊지 않으려는 대상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왜 그것을 기억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마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192~193p)


작품을 읽는 동안 여성 주인공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아주 간절하고 절박하게 발버둥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서 혹시 내가 오독을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설을 읽으니 드디어 감상에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았다. 바로 ‘기억’. 주인공은 기억하고 싶어서,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것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현재 시점의 장면은 일본 남성과 사랑을 교류하는 것이지만, 그녀가 회상하는 과거 시점의 장면은 전쟁 중에 만난 독일군과의 첫사랑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독일의 패전 후 그 병사는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그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발각된 그녀는 삭발을 당한 후 지하실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그때의 경험을, 망각하고 싶지 않아도 계속 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녀는 기억하려 발버둥치며 애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 기억을 잊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그녀에게 아픈 기억, 안좋은 기억임이 분명할 텐데 말이다. 독일 병사인 그 첫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지하실에 갇힌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내서? 이 부분은 이 책을 다시 읽으며 그 답을 찾아가고 싶다. 완벽한 이해는 어려웠으나 확실히 묵직한 울림이 있었던 뒤라스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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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젤리 샷 - 2023년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대상
청예 지음 / 허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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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법정에서 시작된다. 해당 재판은 ‘무기징역’ 내지는 ‘사형’이 거론될 만큼 중대한 사안이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된, 높은 화제성을 지닌 사건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현존하는 연구자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난 ‘갈라테아’가 만든 인봇 3구에 대해 한번에 판결을 내리게 된 것이다. 원고 측에서는 그녀가 만든 인봇들이 윤리 강령을 어겼다며 소를 제기하였고, 피고는 그렇지 않았다며 반대 주장을 펼쳐 치열한 공방을 펼친다. 그런 가운데 인봇 3구가 각각 일으켰던 사건들의 영상이 재판장에서 방영되며 소설은 그들의 이야기로 챕터가 전환된다.



갈라테아는 세 개의 인봇을 만들었다. 각각 ‘엑스’, ‘데우스’, ‘마키나’라고 명명하여 각자 다른 능력들을 부여하였다. 그 후 이들을 상용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각각 사회화 실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겪는 이야기가 미친듯이 재밌다. 단순히 흥미진진한 차원의 장르적 재미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과학에서 주창하는 ‘가치중립’을 꼬집으며 윤리적 딜레마를 독자에게 선사한다. 하여 독자로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한 뒤 계속해서 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사유들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과연 인간은 비인간 존재와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라스트 젤리 > 품고 있는 담론은 전혀 허구적이지 않다. GPT 출시되어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는 지금 시대이기 때문에 더더욱 논의되어야 것만 같은 시의성을 지녔다. 이성으로만 행동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행동을 일삼는 불가해한 존재인인간 과연 AI 논리로 이해할 있을 것인가? 아니 이해하지 않더라도 그저공존하는 것이 가능하긴 것인가? , 진짜 재밌다. 읽어보길 바란다. 앞으로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은 모조리 챙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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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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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개인적으로 처음 읽어보는 배수아 작가의 작품이었다. 항상 그녀의 작품을 한번쯤은 읽어보겠다 싶었으나, 어렵다 난해하다 등의 감상들이 책을 집으려는 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이번에 너무도 좋은 기회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게 되어 드디어 이번 기회에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라는 작품을 읽어보게 되었다.

각오했던 대로 그녀의 작품은 마냥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른 평을 찾아보니 이 작품이 배수아의 작품 중 그나마 가장 친절한 편이라는 리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럼에도 독특한 느낌이 짙은 작품이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소설은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의 장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있거나 끈끈하게 이어져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장에서는 폐관을 하루 앞둔 오디오 극장에서 일하는 ‘아야미’라는 여성 주인공의 하루, 두번째 장에서는 한강에 빠진 남자를 구한 ‘부하’라는 남성 주인공의 이야기, 세번째 장에서는 독일 소설가 ‘볼피’의 한국 방문을 돕는 ‘아야미’의 모습이, 다시 마지막 장에서는 아야미와 오디오 극장장의 대화가 나와있다. 줄거리가 한 줄로 명쾌하게 떨어지지는 않는 서사가 분명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뭐랄까, 마냥 어렵기만 한 것은 또 아니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되게… 아름다웠다. ‘꿈’이라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인 만큼 표현 하나에 섬세한 손길을 불어넣은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겨졌다.


말이죠, 오늘 새벽 공항에서…….” 아야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공항에서 갑자기 세계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어요. 비일상적으로 환하게 불을 밝힌 공항 입국장 전체가, 입국장의 출입문이, 안에서 모습을 나타낼 당신과 함께, 하는 소리도 없이 눈앞에서 스윽 꺼져버렸어요. 마치 사물들이 아니라 눈동자가 사라져버린 듯했죠.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어둠의 허공을 더듬었어요. 하지만 눈을 깜빡이면, 어둠 속에 형체들이 있어요. 실체가 아닌 형체들이…… 그들은 때를 놓치고 느리게 달아나는 유령들 같았어요. 사물의 죽음 이후에도 지상에 남아 있게 영혼 말이에요.” (171~172p)


몸을 뒤덮을 커다란 외투 차림의 왜소한 늙은 남자가 지팡이를 짚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 그들의 앞을 지나쳐 갔다. 그는 플랫폼의 군중들 가장 늙고 가장 추해 보였지만,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형상이었다.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칼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번득이는 안경알 뒤편의 피곤한 눈동자를 가진 그는 도축용 도끼 앞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는 늙은 염소 같았다. 부옇게 불투명한 눈동자는 그의 육신의 요소 중에서 가장 많이 늙은 존재였다. 눈은 아직도 자신이 세상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주저하면서 없이 불규칙적으로 깜박거렸다. 눈꺼풀이 번씩 깜박일 때마다 눈동자는 빠른 속도로 더욱더 늙어갔다. (225~226p)


그래서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이 정말 좋았다. (물론, 나의 취향과 그리 맞는 편은 아닌 것 같아 배수아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어보진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만약 나처럼 배수아의 작품을 한번도 접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이 작품으로 입문해보심이 어떨지 조심스럽지만 강력하게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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