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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5월
평점 :
#도서협찬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개인적으로 처음 읽어보는 배수아 작가의 작품이었다. 항상 그녀의 작품을 한번쯤은 읽어보겠다 싶었으나, 어렵다 난해하다 등의 감상들이 책을 집으려는 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이번에 너무도 좋은 기회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게 되어 드디어 이번 기회에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라는 작품을 읽어보게 되었다.
각오했던 대로 그녀의 작품은 마냥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른 평을 찾아보니 이 작품이 배수아의 작품 중 그나마 가장 친절한 편이라는 리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럼에도 독특한 느낌이 짙은 작품이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소설은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의 장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있거나 끈끈하게 이어져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장에서는 폐관을 하루 앞둔 오디오 극장에서 일하는 ‘아야미’라는 여성 주인공의 하루, 두번째 장에서는 한강에 빠진 남자를 구한 ‘부하’라는 남성 주인공의 이야기, 세번째 장에서는 독일 소설가 ‘볼피’의 한국 방문을 돕는 ‘아야미’의 모습이, 다시 마지막 장에서는 아야미와 오디오 극장장의 대화가 나와있다. 줄거리가 한 줄로 명쾌하게 떨어지지는 않는 서사가 분명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뭐랄까, 마냥 어렵기만 한 것은 또 아니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되게… 아름다웠다. ‘꿈’이라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인 만큼 표현 하나에 섬세한 손길을 불어넣은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겨졌다.
“난 말이죠, 오늘 새벽 공항에서…….” 아야미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공항에서 갑자기 세계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어요. 비일상적으로 환하게 불을 밝힌 공항 입국장 전체가, 입국장의 출입문이, 그 안에서 곧 모습을 나타낼 당신과 함께, 탁 하는 소리도 없이 눈앞에서 스윽 꺼져버렸어요. 마치 사물들이 아니라 내 눈동자가 사라져버린 듯했죠.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어둠의 허공을 더듬었어요. 하지만 눈을 깜빡이면, 어둠 속에 형체들이 있어요. 실체가 아닌 형체들이…… 그들은 때를 놓치고 느리게 달아나는 유령들 같았어요. 사물의 죽음 이후에도 지상에 남아 있게 된 영혼 말이에요.” (171~172p)
몸을 뒤덮을 듯 커다란 외투 차림의 왜소한 늙은 남자가 지팡이를 짚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 그들의 앞을 지나쳐 갔다. 그는 플랫폼의 군중들 중 가장 늙고 가장 추해 보였지만,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형상이었다.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칼은 고약한 쉰 냄새를 풍기면서 이마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번득이는 안경알 뒤편의 피곤한 눈동자를 가진 그는 도축용 도끼 앞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는 늙은 염소 같았다. 부옇게 불투명한 눈동자는 그의 육신의 요소 중에서 가장 많이 늙은 존재였다. 그 눈은 아직도 자신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주저하면서 쉴 새 없이 불규칙적으로 깜박거렸다. 눈꺼풀이 한 번씩 깜박일 때마다 눈동자는 빠른 속도로 더욱더 늙어갔다. (225~226p)
그래서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이 정말 좋았다. (물론, 나의 취향과 그리 맞는 편은 아닌 것 같아 배수아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어보진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만약 나처럼 배수아의 작품을 한번도 접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이 작품으로 입문해보심이 어떨지 조심스럽지만 강력하게 제안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