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내 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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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처음 읽어보는 영화 시나리오였다. 풍경이나 심리 묘사에 분량을 많이 할애할 수 있는 소설과 달리 인물들의 대사로만 내용이 전개되는 시나리오의 특성상, 책의 난이도와는 별개로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당연하다. 한 페이지에 적혀있는 글자 수가 워낙 적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만큼 그 안에 담긴 뜻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작품에는 프랑스 여성과 일본 남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품 내용은 이 둘이 나누는 대화가 전부이다. 그 대화 속에서 여성 주인공이 겪었던 참혹한 사연을 회상하고, 지금 이순간이 지나면 끝나버릴 사랑에 더더욱 절박하게 매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다만 이들의 언행에서 내가 무엇을 느껴야 하고 깨달아야 하는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이 또한 당연하다. ‘뒤라스’의 글이니 말이다. 그러나 해설을 읽으며 안개로 가득 찬 나의 뇌리에 한 줄기 빛이 들어서는 듯했다.


눈앞에 보이는 현재의 평범한 모습을 마주하고 과거의 참상을 끊임없이 똑같은 강도로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역사뿐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기억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프랑스 여자는 자기 인생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통과하며 절대 잊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이 희미해지는 체험을 한다. 그녀는 잊지 않기 위해서 사투를 벌인다. 그러나 망각의 막강한 힘은 그 너머에 있다. 잊지 않으려는 대상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왜 그것을 기억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마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192~193p)


작품을 읽는 동안 여성 주인공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아주 간절하고 절박하게 발버둥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서 혹시 내가 오독을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설을 읽으니 드디어 감상에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았다. 바로 ‘기억’. 주인공은 기억하고 싶어서,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것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현재 시점의 장면은 일본 남성과 사랑을 교류하는 것이지만, 그녀가 회상하는 과거 시점의 장면은 전쟁 중에 만난 독일군과의 첫사랑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독일의 패전 후 그 병사는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그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발각된 그녀는 삭발을 당한 후 지하실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그때의 경험을, 망각하고 싶지 않아도 계속 망각하게 되기 때문에 그녀는 기억하려 발버둥치며 애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 기억을 잊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그녀에게 아픈 기억, 안좋은 기억임이 분명할 텐데 말이다. 독일 병사인 그 첫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지하실에 갇힌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내서? 이 부분은 이 책을 다시 읽으며 그 답을 찾아가고 싶다. 완벽한 이해는 어려웠으나 확실히 묵직한 울림이 있었던 뒤라스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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