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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와 마녀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2월
평점 :
네 남녀가 복잡하게 얽힌 사각 관계, 게다가 출생의 비밀까지. <성녀와 마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이라 부를 법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것도 초반부터 그 설정을 드러내어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토지’라는 대서사를 쓰신 박경리 선생님이 이런 개막장 통속극을 쓰셨다고? 하며 말이다.
이야기의 주축을 구성하는 인물은 총 네 명이다. 일단 먼저 수영(男)과 형숙(女). 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으나 수영의 아버지 안 박사의 반대로 헤어지게 된다. (안 박사가 형숙의 출생의 비밀을 수영에게 알리는데, 그 모습을 형숙이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영은 안 박사가 점찍어둔 하란(女)과 결혼하게 되지만, 수영의 마음은 여전히 형숙만을 향하고 있으며 하란은 뭐라 말도 못하고 그저 수영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수영의 여동생과 약혼했던 세준(男) 또한 골때리는 인물이다. 우연히 마주친 하란을 마주하고 한눈에 반해버려 수미와의 약혼을 파하고 계속 하란만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이는… 미친놈이다.
일반적인 막장 드라마가 그러하듯, 이 소설 또한 기가 막히게 빠른 속도로 읽혔다. 재미를 부인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재미가 유쾌한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이 또한 막장 드라마를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다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욕하면서도 챙겨보지 않는가? 이 소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단 하나도 따라갈 수 없었다. 도무지 공감되지 않는 류의 애정선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의 흐름 속으로 빨려들어가긴 하였다.
대체 이 막장극을 통해 박경리 선생님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온라인 서점에 다른 분들이 쓴 후기를 보고 싶었으나 단 한 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내게 답을 준 것은 다름아닌 나무위키였다.
하란을 통해 현모양처 하란에게 남는 건 고통과 기다림 뿐이란 걸 보여주며 지고지순한 여성상을 비판하고 형숙을 통해서는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지배욕구를 비판한다. "무서운 탕녀이자 지독한 요부였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연민의 감정을 드러내며 자신을 지배하려는 남자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을 친 여자"라고 형숙을 평하는 부분이 이 소설에서 작가의 의도를 가장 정확히 드러내는 부분.
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위의 시사점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 이 소설은 그저 막장 연애를 미친듯이 재밌게 그려내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간 통속극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박경리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는 정말 커졌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작품인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혹시 박경리 소설에 입문하고 싶은데 스무 권짜리 <토지>가 부담스럽다면, 한 권짜리 <성녀와 마녀>는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