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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8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평점 :
산 지는 오래 되었지만 ‘여름’이 되면 읽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제서야 꺼내든 이디스 워튼의 작품이다. 사실 난 이 책에 대해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로맨스 작품들, 이를 테면 제인 오스틴이나 프랑수아즈 사강, 에밀리 브론테 등의 작품들이 단 한 번도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름>은 달랐다. 문장 하나하나가 감탄의 연속이었다.
나뭇잎이면 나뭇잎, 꽃봉오리면 꽃봉오리, 잎사귀면 잎사귀가 숨을 불어넣어 향기가 퍼져 나가게 도왔다. 그중에도 코를 찌르는 듯한 소나무 수액이 백리향의 짜릿한 향과 고사리의 희미한 향을 압도했으며, 이 모든 것이 햇볕을 받아 거대한 짐승의 숨결 같은 촉촉한 흙냄새와 하나로 어우러졌다.
53p
위의 문장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부터가 ‘여름’인 만큼, <여름>은 여름의 계절감을 물씬 느끼게 해주는 묘사들이 정말 뛰어나다. 보통은 이런 문장들을 읽을 때면 서사의 진행이 방해를 받는 것 같아 답답함을 느끼곤 하는데, <여름>은 이런 문장들을 읽는 매력이 뛰어났다. 이 소설을 읽는 지금이 여름이라 그런가, 아니면 장황하지 않게 간결하면서도 뛰어난 묘사가 담긴 문체여서 그런가. 무튼 ‘여름’의 느낌이 아름다웠던 작품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따금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할 때 두 사람의 거리는 가장 많이 벌어졌다. 교육과 기회에서 비롯된 격차는 채리티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그의 칭찬이 서로를 아주 가깝게 느끼게 할 때조차 어떤 우연으로 말 한마디, 어떤 무의식적인 암시가 채리티를 다시 심연 속으로 밀어 넣는 것 같았다.
72~73p
그리고 <여름>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심리 묘사’일 것이다. 자신의 출생 신분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는 여성 주인공 ‘채리티’가, 외모와 교양 모든 것이 완벽한 남성 주인공 ‘하니’를 만나 사랑의 떨리는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와 마냥 가까워지기는 힘들어하는 열등감을 이 소설은 너무도 잘 표현해내었다.
채리티는 하니가 두 팔로 안아 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우유부단하게 몸을 돌렸다. 마지막 빛이 ‘산’ 너머에서 사라졌다. 방안의 모든 물건이 회색으로 변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가을의 냉기가 과수원 아래 골짜기에서 올라와 두 사람의 상기된 얼굴을 차갑게 어루만졌다.
192p
그러나 단 한 가지, 결말이 이 모든 것을 망쳤다… (스포일러 주의)
소설은 초반부터 하니가 채리티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에 둘 사이가 이어지지 않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결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다른 부분이다. 어째서 채리티가 후견인과 결혼하는 결말로 소설의 끝을 맺게 된 것인가…?! 다시 생각해도 속에서 열불이 솟구쳐오른다. 채리티의 ‘성장’ 과정을 그린 문학이라는 뒷표지의 문구가 무색해지는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정말 성장 서사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면 채리티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 그곳에서도 혼자서 묵묵히 잘 살아가는 결말이 합당하지 않은가? 대체 이게 무슨… 물론 이 소설의 매력은 차고 넘치도록 충분히 느꼈기에 이디스 워튼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볼 요량이 있으나, 어쨌든 이 소설은 별 다섯개에서 결말로 인해 하나가 빠진, 용두사미 느낌의 작품이었다. 아, 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