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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도서협찬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 내 이름과 같은 ‘승준’이어서, 그의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움찔하며 놀랐다는 여담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지금껏 수많은 한국문학을 읽어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승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이 작품이 처음이라 여간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왠지 모를 애정이 더 가는 것도 같다.
<빛과 멜로디>는 기자인 주인공 승준이 칠년 전 유명한 사진가인 ‘권은’과의 인터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인터뷰 당시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에는 사실 그녀가 자신과 동창이었다는 걸 깨달으며 둘의 서사가 차츰 선명해진다. 물론 유부남인 승준과 권은이 다시 만나면서 고조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랬다면 아마 이 소설은 훨씬 동적이고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 소설은 그보다 훨씬 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현재 시점에서 승준의 아내인 민영과의 일화가 회상된다던지, 영국에 잠시 머물게 된 권은이 그녀의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보여준다던지 하는 등… <빛과 멜로디>는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는 소설이라기보단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과거 사연을 병렬적으로 알게 되는 소설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인생책으로 꼽는 작가의 전작 <단순한 진심>에서 보였던 ‘주인공 이름의 뜻을 찾는 여정’과도 같은 유동적인 서사를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저자가 아무래도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싶었던 부분은 바로 ‘전쟁’과 관련한 지점인 듯하다. 권은의 주변 인물들 중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와 반전 운동을 펼치는 아들 간의 불화를 겪는 인물들을 보여주는가 하면, 승준의 인터뷰 대상 중 우크라이나 여성을 등장시켜 대놓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폐해를 겪는 인물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이런 인물들보다 승준-권은의 서사가 훨씬 중요하겠거니 싶어 이 부분에 더 집중했다가 다른 이들의 사연을 놓친 것도 같아 다시 되돌아가 읽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들의 사연을 간과하지 말고 꼭 주의깊게 읽기를 바란다.)
따라서 이러한 류의 소설들은 아무래도 흥미진진한 전개와는 거리가 멀다 보니 조금은 답답하다거나 지루한 감상을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해진 작가는 그녀만의 문체로 독자들을 여전히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아름답고 섬세한, 유려하기 그지없는(?) 작가의 문장들이 다시금 나를 황홀경에 빠뜨리니 말이다.
🗣(101p)
아버지, 라는 단어가 민영에게는 마음 속에서 온갖 감정을 끌어올리는 투명한 그물과 같다는 걸 잘 아는 승준은 오늘밤 그녀가 유독 지쳐 보이는 이유를 그제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120p)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말 다음엔 때로는 승준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또 때로는 무겁게 각성시키기도 했던 바로 그 문장이 이어졌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네가 이미 나를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p148)
승준은 모르겠지만, 민영은 승준과 만나면서 예전보다 더 외로워질 때가 있었다. 절박해서였을 것이다. 절박했으므로, 승준의 진심을 믿으면서도 그가 변할까봐 두려웠다.
🗣(p152)
뭣도 아닌 주제에. 민영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런 아버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어른의 말투로 중얼거렸고, 그 순간 심장이 증오심으로 미친듯이 검게 번져가는 걸 느꼈다. 안에서부터 식은, 가차없이 찬 감정이었다.
🗣(p208)
긴 통로라는 것만 알 뿐, 바닥은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 우물 같은 외로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