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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기다리기
박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햇빛 기다리기> - 박선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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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기다리기>는 퀴어 문학이었다.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책을 펼쳐들었기에 몇 장을 읽다보니 조금 흠칫하긴 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좋았다. 내가 퀴어문학을 읽을 때에는 그들이 ‘사랑하는 방법’보다는 ‘감정과 심리묘사’를 보는 것에 기대를 갖고 읽는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성애자로서 겪어야하는 차별과 감내해야하는 고통, 맞닥뜨려야만 하는 현실의 두터운 벽에서 비롯되는 감정들, 분노일 수도 있고 무기력함일 수도 있는 그 다양한 심리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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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측면에서 박선우 작가님의 글은 정말, 너무 좋았다. ‘성소수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이렇게나 세밀하면서도 만연하지 않고, 보드랍게 어루만지는 듯하면서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도록 쓸 수 있나 싶어서, 그래서 그 인물의 마음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듯 몰입하게 할 수 있나 싶어서 너무도 놀라울 따름이다.
🗣 사귀는 사람과 함께 직은 사진을 SNS 계정에 올리고 지인들에게 ‘좋아요’를 받는 일. 그런 일에 무슨 명목씩이나 필요하단 말인가. (중략) 동성애자로 살면서 끊임없이 겪어야 했던 억압과 멸시, 언행의 조심스러움 따위는 어쩌면 이 소박한 즐거움들의 총합에 비하면 ‘사소한 아픔’일지 몰랐다. 대다수가 아무렇게나 누릴 수 있는 기쁨들을 평생에 걸쳐 수탈당해왔다는 사실에 별안간 나는 참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었다. (22p)
🗣 그러면 어떤 말 부터 꺼내야 하나. 아니, 어째서 이 짓을 또 하고 있나. 끝난 일 아니었나. 연말정산도 아니고 무슨 커밍아웃을 해마다 새로 하나. 일 년에 한 번이면 그나마 다행인가. (1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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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햇빛 기다리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널리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작품에 나와있는 인물들의 사랑은 ‘성소수자’라고 해서 특별할 게 없다. 그저 ‘사랑’을 하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이 다정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져있을 뿐이다. 때문에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 책을 읽더라도 충분한, 아니 훨씬 차고 넘치는 공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 달콤한 애정에 눈이 멀어 서로의 새치나 뾰루지 마저 어여쁘게 여기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만날 때마다 뇌리를 스치는 의구심이랄까 의아함을 - 얘는 왜 이러는 거지? -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179p)
🗣 나는 그저 네가 원하는 일을 했으면 했다. 원하지 않는 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내게 말해주었으면 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솔직했으면 했다.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연인일 테니까. (1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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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한 구절이 굳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나의 마음을 쏟아붓는 듯이 공감이 가는 문장들을 많이 만났다. 평소 일상에서 곧잘 경험하곤 하는 것들을 평상시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을 법한 표현들로 써낸 구절들이 오히려 내 마음을 빼앗는 듯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냥 박선우 작가님의 글이 나의 취향과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이렇게 나의 ‘인생 작가님’ 리스트를 또 한번 갱신하게 되어 너무도 기쁘다.
🗣 나는 다시 혼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다만 예전처럼 의젓한 단독자로서의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내가 감당해야 할 고독의 양감이 사뭇 달라져있었기 때문이다. (29p)
🗣 이 사랑은 어떻게 끝날까. 그것은 연인과의 관계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이면 내가 빼놓지 않고 떠올리는 생각이었다. 앞서 파국을 예측해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놓는 예방주사 같은 것이었다. (109p)
🗣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하나의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는 그의 몇 배 혹은 몇십 배가 되는 거짓을 꾸며내야 한다는 걸 떠올렸다. 일단 거짓말을 시작하면 언제 멈춰야 할지를 가늠하기보다 그럴듯하게 지어내는 일에 훨씬 열중하게 된다는 것도. (22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