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계가 한때 대단한 세련미의 상징이던 때가 있었습니다.모두 아날로그 시계를 차던 시절, 갑자기 등장한 디지털 시계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습니다.하지만 이미 80년대 중반이 되면서 흔하디 흔한 시계가 되어버렸으며 아무도 디지털 시계를 세련미의 상징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신식이다 구식이다 하는 말 대신 꼬부랑 단어를 써서 디지탈이니 아날로그니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특히 아날로그적인 감성이니 운운 하면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이야기를 할 때 쓰기도 합니다.재미있는 것은 이런 구분법이 사전적 의미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위의 예에서 보다시피 디지털 시계도 이제 유행이 지났으니 디지털적인 것이 아니게 됩니다.
미쓰에이 수지가 나오는 영화 '건축학개론'에 관객이 많이 몰리고 있습니다.9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에서는 삐삐가 등장해서 당시 청춘시절을 보낸 이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고 합니다.수지 씨는 아직 여고생이라 삐삐에 대해서 잘 모르지요.영화를 찍으면서 삐삐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하니까요.이 영화를 소개하는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를 보면 역시나 아날로그 감성이니 추억의 옛사랑이니 운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삐삐가 처음 등장했을 땐 상당히 신기했습니다.90년대 중반이 가장 널리 보급되었던 시절이고 이 직후는 휴대전화에 자리를 내주게 되지요.삐삐가 직장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을 때는 직장에서 자기 직원들 단속하는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당시 'TV 손자병법'이란 드라머가 있었는데 한 남자사원이 "이거 완전히 개목걸이로구만.신식 기계라 좋은줄만 알았더니...그러고 보니 그냥 전화 있을 때가 나았어." 하고 푸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외출해서 농땡이도 피우고 그러고 싶은데 삐삐로 상사가 호출하니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드라머가 나왔던 시절에는 삐삐가 최신유행이요, 시커먼 수동식 전화는 이미 추억의 옛시절 기구였습니다.하지만 지금은 두 통신기기 모두 구식이요, 이른바 아날로그 시대의 추억입니다.디젤기관차가 많이 생기고 증기기관차가 없어지니까 증기기관차가 추억의 상징이지만 이젠 디젤기관차도 구식이 되어버린 것과 비슷합니다.
예전 김완선 씨가 처음 무대에 등장했을 땐 굉장히 파격적이었습니다.하지만 핑클이나 SES가 등장하자 역시 구식이 되었습니다.요즘은 핑클이나 SES가 노래 부르는 90년대 후반 자료화면을 보면 역시 좀 촌스럽습니다.하기야 소녀시대가 데뷰시절 불렀던 '다시 만난 세계'도 지금 보면 좀 오래된 티가 납니다.미니스커트 입고 발차기를 하는 안무...소녀시대도 좀 민망해하지 않을까요.그러고 보면 소녀시대 거의 대부분은 만 23세입니다.군복무 중인 사병들 대다수는 그녀들을 누나라고 불러야 할 판이네요.
삐삐가 이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아날로그적 감성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지금 우리가 최신기종이라며 열광하는 스마트폰도 세월이 지난 먼 훗날엔 추억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그때는 또 얼마나 신기한 물건이 등장할런지요...그리고 수지 씨도 언젠가는 토크쇼에 나와서 푸근한 모습으로, "그땐 지금과는 많이 달랐죠.요즘 신인 분들의 자유분방함이 부러워요..." 하면서 추억담을 얘기할 때가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