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보다 아파트 폐지더미에서 책을 구하는 횟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책값이 안 드니까요.그렇다고 늘 책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괜찮은 책을 건지는 횟수는 1년에 5회 정도? 나머지는 신문이나 시사주간지 버려놓은 것을 거두어 오는 정도입니다.이런 것은 읽은 후에는 다음 폐지수거일에 버립니다.그중 중요한 기사는 오려서 보관하기도 하고 내가 공책에 직접 베끼면서 공부하기도 합니다.또 아직 다 안 쓰고 버린 공책을 가져오기도 합니다.필기를 많이 하다 보니 이런 것도 필요하니까요.아직 안 쓴 것을 왜 이렇게 버린담! 돈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하고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나같은 사람이 주워가서 좋은 용도로 쓰니까 쓸 데 없는 낭비를 하는 것은 아니로다, 하고 위로해보려고 합니다.
이곳은 한 달에 두 번 폐지를 내놓는 날이 있습니다.주로 종이상자나 쇼핑백이 많이 나오고, 신문뭉치도 꽤 나옵니다.그외 광고지도 많이 나오고요.가뭄에 콩 나듯 책들이 나오는데 이 책들을 가져가는 데에도 이것저것 신경쓸 것이 있습니다.우선 페지더미 주위를 큰 푸대자루와 큰 쇼핑백을 들고 어슬렁거려야 합니다.멋지다거나 세련된 모양새는 아닙니다.경비실 근무자들이야 나의 이런 모습이 익숙해졌는지 "괜찮은 책 건졌소? "하고 말도 붙여줍니다.하지만 그들 말에 의하면 이 아파트 4개동 입주민 중 책이나 신문을 가져가려고 폐지수거일마다 어슬렁 거리는 사람은 남녀노소 통털어서 내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하기야 다른 사람들이 폐지더미를 버려놓은 곳 주변을 돌아다니며 책이나 신문을 찾는 모습이란 좀 궁상맞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게다가 퇴근하고 나서 밤 10시가 넘거나, 다음날 출근 전에 폐지더미 앞에 쭈그려 앉아 이것저것 골라내는 광경은 잘못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폐지수집하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고요.경비실 아저씨는 한 번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아니 이 어둔 곳에서 무슨 책인지 알아먹것소?" .심야에 가로등도 없이 경비실의 희미한 불에만 의지해서 폐지더미를 뒤지는 내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괜찮아요.아직은 이 정도 구분해낼 시력은 됩니다."
가장 당혹스러울 때는 폐지더미 옆에 쪼그려 앉아 이것저것 뒤지고 있는데 난 데 없이 바로 옆에 큰 종이상자나 신문뭉치가 툭하고 떨어지는 경우입니다."조금 비켜주쇼" 하고 말하는 것도 귀찮아서 사람이 있건말건 폐지를 던져버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그런 것도 여러번 당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갑니다.말다툼하거나 멱살잡이할 수도 없고...남한테 말거는 것 자체를 귀찮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하고 이해하면서...
8월 9월에 연속해서 전집과 단행본을 구했습니다.폐지수거일에 이런 책이 한달 동안 연속해서 나오지는 않는데 웬일일까 하고 생각해 봤는데...그 책들은 70년대의 전집은 세로줄에 국한문 혼용이고, 또 어떤 쇼핑백에 담겨 버려진 단행본들은 80년대에 나온 자잘한 가로글씨로 된 책들입니다.아무래도 이런 책들은 요즘에는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니까 처분하는 것 같습니다.국한문혼용에 세로줄로 된 책들은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부터는 못읽는 사람들이 꽤 있으니 그보다 어린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으며, 30대들부터는 80년대 단행본 특유의 자잘한 글씨가 익숙치 않습니다.내 또래들도 세로줄은 못읽겠다는 사람들이 거의 태반입니다.
비오는 날 비를 맞아가면서 폐지더미를 뒤적이는 모습은 거의 예전의 넝마주의를 연상케 합니다. 쭈그려 앉아 있는데 종이상자를 던져 재수없으면 얼굴에 맞기도 하고...이런 댓가를 치르고서야 괜찮은 책을, 그것도 1년에 겨우 몇차례 얻으니 공짜가 공짜가 아닙니다.아마 많은 사람들이 굳이 이렇게 하면서까지 책을 가져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그 덕에 나는 폐지수거일에 푸대자루와 쇼핑백을 들고 책을 걷으러 돌아다닐 수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