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하나하나가, 그리고 거기에 이어지는 생각이 마음을 건드리며 스며든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글 잘 쓰는 의사 맞나 보다.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최악의 상태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나 보호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눈물 쏙 빠지게 서러운 일이다. 그런데 의사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아는 어느 환자의 딸도 "선생님이 좋아질 수 있다고 했는데 왜 이러시냐?"라며 의사에게 화내면서 따졌다는 일화를 들은 적도 있다.
"야, 왜 네가 희망의 전도사냐! 워닝(warning, 환자의 상태가 악화할 것을 미리 설명하는 과정)을 해야지 왜 기대에 부풀게 하는 거야!"
치프 선생님이 나에게 말했다. 환자의 가족들에게 환자의 상태가 악화할 것이고 사망할 수도 있음을 설명해야 했는데, 막상 내가 가족 면담을 한 후 가족들이 체념이 아닌 회복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당시의 대화를 떠올리면 대강 이랬다.
"지금 환자 상태가 악화하고 있어서 며칠 내에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선생님. 정말입니까?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네, 지금 이대로 악화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니, 저희는 몹시 당황스럽습니다. 지금 돌아가시면 안 돼요. 그래도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 않습니까?"
가족들 몇 명은 울음을 터뜨리고,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다. 가족 중 한 명이 희망을 붙들고 싶은 마음에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 않느냐고 묻기를 반복하자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음… 그럴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좋아질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조금 지켜보시지요."
가족들은 대화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 잊어버리고 마지막에 내 입에서 나왔던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단어를 붙들게 된다. 그러고 나서 상태가 악화해 임종 직전이 되었을 때 치프 선생님이 가족들에게 환자의 경과를 설명하자 이렇게 되물었다.
"아니, 지난번에는 좋아질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선생님, 왜 말이 바뀐 거지요?"
중환자의 가족들을 대하는 방법을 몰랐을 때 나는 가족들의 감정에 휘말리곤 했다. 그들이 바라는 작은 가능성에 마지못해 동의하기도 했다.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마지막 대답은 그들의 희망에 방점을 찍는 일이 되어버리곤 했다.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고 감정에 동조하더라도 표현해야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것인데, 나는 서툴렀다. 내 기질과 성격 때문이리라. 그들에게 상처가 될까봐 혹은 내가 상처를 입을까봐 그랬을 것이다. 환자의 가족들이 슬픔과 기대의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도피성 대답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런 식의 대화는 가족들에게도 의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환자의 치료 과정에도 도움이 될 리 없다. 적절한 선에서 냉정해질 줄 알아야 한다. (36~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