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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ㅣ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식물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세계사를 읽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짜릿하다.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은 밥상과 찻잔에서 흔히 만나는 식물들이 어떻게 역사의 물줄기를 틀었는지, 그리고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책 속 주인공은 후추, 감자, 차, 사탕수수, 목화, 토마토 등 13가지 식물이다. 이름만 들으면 익숙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는 강렬하다.
후추가 한때 황금과 맞먹는 가격이었다는 사실, 고기 보존이 어려웠던 유럽에서 후추가 부패를 감추는 마법 가루로 불리며 대항해시대를 촉발한 역사가 펼쳐진다.
감자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다. 처음 유럽에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줄기와 잎에 있는 솔라닌 독성을 몰라 중독되기도 했다.
감자를 기피하던 국민에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묘수를 썼다. 왕실 땅에 감자를 심고 경비병을 세워 귀한 것처럼 보이게 하자, 사람들은 몰래 캐어 심기 시작했다. 그 후 감자는 전 유럽으로 퍼졌다.
저장성이 뛰어나 겨울에도 먹을 수 있었고 가축 먹이로도 쓰였다. 식량 안정은 인구 증가로 이어졌고, 비타민 C 덕분에 괴혈병 예방에도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아일랜드에서는 감자 역병으로 대기근이 발생했고, 400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 후손 중에는 미국 대통령도 있다.
차와 사탕수수는 또 다른 역사를 품는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꿈꾸며 마셨다는 차, 농업의 신 신농이 약효를 시험하다 목숨을 건진 차는 오늘날 홍차·말차·녹차로 자리 잡았다.
유럽에 전해진 뒤 커피, 코코아와 함께 세계 3대 음료가 되었고, 사탕수수가 더해져 달콤한 중독성을 완성했다. 하지만 설탕의 확산에는 하와이 플랜테이션과 아프리카 노예무역이 있었다.
사탕수수 재배는 다민족이 공생하는 사회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식민지와 노동 착취의 역사를 남겼다.
목화는 인류의 의복사를 바꿨다. 인도와 페루에서 수천 년 전부터 재배됐지만, 유럽인에게 목화는 양이 열매 맺는 식물로 상상될 만큼 신기한 존재였다.
그러나 미국 남부에서 목화는 부와 번영의 상징이자 노예제의 기초였다. 넓은 땅과 시장은 있었지만 노동력이 부족했던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왔고, 목화밭은 흑인 노예의 피와 땀으로 흥했다.
콩과 옥수수 이야기는 신대륙의 심장부에서 시작된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이 두 식물은 생존의 양날개였다. 옥수수는 탄수화물을, 콩은 단백질을 공급하며 서로의 영양을 보완했다. 특히 옥수수 재배는 대규모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콩은 토양에 질소를 공급해 다음 해 작물 수확량까지 높였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이 작물들은 이미 정교한 재배 시스템 속에서 순환하며 원주민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후 옥수수는 전 세계로 퍼져 가난한 나라의 주식이 되었고, 콩은 각국 식문화 속에 스며들어 전쟁과 기근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냈다.
이 책의 매력은 13가지 식물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세계사와 지리를 함께 배우게 된다는 점이다. 대항해시대, 산업혁명, 제국주의, 세계대전까지 식물이 역사의 중심에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사건을 일으킨 과정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이 책이 식물을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 세운다는 점이다. 감자 한 알이 인구 구조를 바꾸고, 목화 한 송이가 대륙 간 노예무역을 촉발하며, 후추 한 알갱이가 수천 킬로미터 항로를 개척하게 만든다.
우리는 늘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무대 위에는 늘 식물이 있었다.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은 그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세계를 움직인 주역들을 조명한다.
읽다 보면 부엌의 후추통, 빵 속 감자, 티백 하나가 다르게 보인다.
인류의 무한경쟁과 욕망 속에서 식물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때로는 구원자가, 때로는 파국의 불씨가 되었다.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은 식물과 역사를 동시에 사랑하게 만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