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부부가 함께 찾아왔습니다. 한쪽 배우자(이하 ㄱ)는 상대방(이하 ㄴ)이 외도했다고 주장하고 ㄴ은 그 배우자한테 편집장애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경우 ㄱ에게 질병 진단을 내리면 그것은 곧 ㄴ이 결백하다는 선언으로 효과를 냅니다. 동시에 편집장애에 걸린 ㄱ은 일종의 인격적 결함을 지닌 사람으로 내몰립니다.


의학적 차원의 장애를 윤리적 차원의 결함과 일치시키는 것은 명백한 잘못임에도 사회 통념의 위력 때문에 아무런 여과 없이 그런 범주일탈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 ㄱ쪽에서는 병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ㄴ쪽에서는 (외도가 사실일 경우 더욱 강력하게) 병이라고 긍정하게 됩니다.


ㄴ이 외도하지 않은 게 확실하고 ㄱ이 편집장애 환자인 게 확실할 경우, 문제가 간단해 보여도 해결은 만만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병 문제를 윤리 문제로 비틀어버려서 ㄱ이 치료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가장 난처한 사람은 바로 의사입니다. 적어도 ㄱ쪽에서 보면 의사가 ㄴ과 한 패이기 때문입니다.


화쟁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정신적 장애를 윤리적 관점에서 보지 않도록 ㄴ을 깨우칩니다. ‘장애는 결함이 아니라 결핍이다, 결함은 교정의 대상이지만 결핍은 사랑의 대상이다, 곡진한 사랑으로 그 결핍을 치유하라, 그리고 필수불가결한 한 가지. 외도 안 한 걸 강조하지 말고 신뢰 못 준 걸 미안해하라.’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 장애에 대한 왜곡된 시선의 피해자로서 스스로 소외시키려는 ㄱ을 다독여 치유에 임하도록 합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꾸 그런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스스로 아프게 하는 길이므로 여기서 멈추라, 뇌 안의 특정 신경전달물질 부족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므로 담담히 치료를 받으라.’


‘무엇보다 자신이 신뢰감에 상처를 입어 이리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일이 중요하다, 어디쯤에서 어떻게 입은 상처인지 더듬어 거기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어린 영혼을 안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필수불가결한 한 가지. 외도했느냐 여부에 매달리지 말고 신뢰하느냐 스스로 물으라.’


처음에는 두 사람 다 수긍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ㄱ은 상담을 거부했습니다. 한약도 거부했습니다. ㄴ은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며 상담 때마다 와서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는 사실만을 되풀이해서 강조했습니다. 의사가 마법사일 리 없음에도 무슨 수를 내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습니다. 자연스럽게(!) 길은 끊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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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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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랑군(양곤)에 다다랐다.

그곳 외곽의 붉은 땅에 단층 임시 건물이 있었다. ‘랑군 군인 위안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복도 양쪽으로 열 개씩 전부 스무 개의 방이 있고, 그녀는 ‘3호실’로 들어가 ‘미쓰코’로 불렸다.

쇼와 천황의 ‘수족 같은 신하들’이 바지춤을 내리고 줄을 섰다. 미쓰코는 하루에 20~30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그 세계에는 ‘끼니와 끼니 사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침 8시에 식사를 마치면 일반 병사들이, 오후에 점심을 먹고 나면 하사관들이, 저녁 식사를 끝내면 장교들이 찾아왔다. 병참부 군인들이 가져오는 퍼석퍼석한 밥과 된장국, 단무지를 미쓰코 같은 여자들이 허겁지겁 먹고 나면 끝도 없이 그것이 시작되었다.

아니, 저녁식사가 끝나면 또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사용한 주머니(콘돔)를 장교가 오기 전에 씻어야 해.”

김 할머니는 양손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고무 집는 동작을 해보였다.

“강가에서 씻었어. 모두 웅크리고 앉아서. 괴로웠지, 한심했어, 그게 가장.”

냉면이 고무줄처럼 딱딱해서 목구멍을 막았다.(330쪽)


‘끼니와 끼니 사이’라는 표현은 절묘하다. 진리에 비추어 말한다면 인간의 삶은 끼니와 끼니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에피소드다. 이는 잠과 잠사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이는 성교와 성교 사이라 해도 만찬가지다. 그런데, 여기 성교와 성교 사이가 폭력으로 왜곡되면서 끼니와 끼니 사이가 왜곡되는 반-진리의 세계가 참혹하게 펼쳐진다. 윤간과 윤간 사이에 끼니가 존재함에도 윤간 체제는 그것을 끼니와 끼니 사이라 이름 한다. 반-진리를 진리로 포장한 협잡이다.


협잡의 한복판에서 끼니와 끼니 사이 지옥을 견뎌야 하는 성노예 여성을 생각함으로 다시 영혼을 가다듬어보자. 지옥과 지옥 사이에서 먹는 “퍼석퍼석한 밥과 된장국, 단무지”는 대관절 그에게 무엇인가? 모진 목숨 이어가게 하는 최소한의 ‘영양 물질’인가? 거꾸로, 자동차로 치면 휘발유에 지나지 않는 그것을 먹고라도 이어가야 하는 목숨이란 무엇인가?


원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거절해서 죽는 것도 아닌 이 도저한 수동성의 확장에 몸서리칠 일 하나가 기어코 더 남아 있다.


괴로웠지, 한심했어, 그게 가장.


윤간에 쓰인 콘돔을 “웅크리고 앉아서” 씻는 일은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는 일과 기이한 일치를 이룬다. 비참함의 정점을 찍는 일이 하필 콘돔 씻기였다. 씻어서 뭔가를 떨쳐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끝없이 밀려오는 지옥을 맞이하는(!) 것이니 그 얼마나 아뜩한 절망이었으랴. 가장자리에서 보는邊見(헨미) 평범한 사람庸(요)조차 “냉면이 고무줄처럼 딱딱해서 목구멍을 막았다.”고 했으니 오죽했으랴.


유·소년기 내 아버지는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반드시 때려서 해결했다. 느닷없이 맞는 것은 그래도 견딜만했다. 가장 살 떨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때린다고 미리 경고한 다음 매를 준비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기다릴 때였다. 문제는 대부분 그 시간에 밥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팥쥐 엄마’는 밥을 주면서 늘 그 특유의 냉담한 어조로 ‘밥 먹고 나면 종아리 걷고 아버지 방으로 가’라고 고지해주었다. 어린 나로서는 차마 묘사할 수 없었지만 그야말로 밥알이 돌처럼 “딱딱해서 목구멍을 막았다”고 할 상황이 아니었을까.


밥 먹는 시간은 제의의 시간이자 축제의 시간이다. 설움을 서로 엮는 시간이자 행복을 서로 나누는 시간이다. 그 밖의 것을 들이는 일은 삼가야 한다. 오늘 우리 끼니는 어떤가. 이전 끼니와 사이 벌어졌던 일로 말미암아 회한에 젖고, 다음 끼니와 사이 벌어질 일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으로 채워지는가. 그래서 많이 불편한가. 그러면 ‘미쓰코’의 끼니를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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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지하철. 7호선 도봉산행 열차는 강남구청역을 지나면서 텅텅 비기 시작한다. 나는 그때 두 번째 칸으로 이동해 앉곤 한다. 오늘은 왠지 다리를 잡고 놓지 않는 듯 가까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가보다 하고 무심히 앉았다가 용마산역에서 역시 가까이 있는 출입문으로 통해 내렸다. 두세 발자국을 떼는데 바닥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에 눈길이 멎었다. 어린 참매미 한 마리였다. ‘대체 어떻게 여기가지 들어왔을까?’ 하는 의문도 잠시, 생사를 확인했다. 탈진해 보이긴 하지만 살아 있다. 나는 녀석을 살며시 잡아 올렸다. 가냘픈 울음소리를 계속 냈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힐끔거렸지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역을 빠져 나왔다. 마침 인근에 관목 덤불이 보였다. 작은 나무둥치에 붙여주었다. 그 작고 어린 생명이 보낸 극진한 전언을 들은 오늘 아침 내게는 또 하나의 장엄이 소미심심 스며들고 있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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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평범함에 깃든 참 행복을 말합니다. 이 말을 스스로에게 할 경우는 나름 비범함을 경험하고 나서일 것입니다. 비교적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습니다. 평범함 이하의 삶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처럼 야속한 것도 없습니다. 제발 평범함만에라도 가서 닿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나 줄곧 주목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가족은 입버릇처럼 그에게 ‘고집 세고, 느리고, 답답하다’고 말했습니다. 영유아기 때는 분리불안이 극심했습니다. 방치되어 자라던 학령기 이전 때는 애정결핍 형 사고를 수시로 쳤습니다. 초등학교 이후는 늘 외톨이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목표도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를 그저 견뎌낼 뿐이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회적 스킬을 터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어떤 곳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 했습니다. 힘든 일은 무조건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나이가 차서(?) 중매로 결혼은 했는데 배우자도 인척도 아이들도 모두 힘들기만 한 존재였습니다. 특히 아이들 양육 문제는 무거운 죄책감을 안겨줄 뿐 도무지 어떤 방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라는 병이 아이들을 덮쳤습니다. 아이들 치료하려고 정신과 드나들다가 자신도 극심한 우울장애라는 사실에 놀라 약물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아무런 효과도 없이 ‘아니면 말고’ 식으로 약물만 바꾸어대는 나날이 흘러갔습니다. 가족도 배우자도 그의 우울장애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러느니 죽는 게 낫다 싶은 충동이 왈칵 솟아오르자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는 허겁지겁 꾸물꾸물 인터넷을 뒤져 제게 왔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살고 싶어도 살아갈 수가 없어요.”


평범함이 얼마나 아득히 먼 거리에 있는가, 그의 눈동자가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두 달 동안 저와 삶을 숙의했습니다. 살면서 무슨 일을 이렇게 꾸준히 열심 내어 해본 적이 없다면서 그는 스스로 기특해했습니다. 하지만 가족과 배우자가 그의 우울장애 치료에 돈 들이는 일을 더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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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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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잿빛 하늘 아래 노부인 세 명이 몸을 떨고 있다.

서늘한 빛을 띤 흰색의 상복 같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시퍼렇게 빛을 내는 자그마한 식칼을 감추고 있다.·······

그 칼끝을 자신 쪽으로 한 채 움켜쥐고 있다. 가슴을 향해 칼끝을 번쩍 추켜올리려던 찰나, 억센 형사들에게 세 사람은 맥없이 제압되고 말았다.·······1994년 1월 25일 오전 11시쯤이었을 것이다.·······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326쪽)


김복선(68), 이용수(66), 문옥주(70).자라난 환경·성격·생김새가 모두 제각각이지만, 세 사람을 연결하는 단 한 가지 공통점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이다.(327쪽)


김 할머니와 나는 각각 비빔밥과 냉면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주고받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당했을 때 1주일 동안 피가 흐르는 바람에 누워만 있었어. 아기가 생겼지.”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944년 9월 무렵,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해에 군복을 입은 일본인에게 끌려갔다.(329쪽)




_()_


늦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복선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2012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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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하면서 주고받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문장에서 읽기가 중단되었다. 눈물이 쏟아져서 더는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고 다시 이 문장에 눈길이 닿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글을 쓰는 도중에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 오타가 거듭 난다.


그래. 옳다. 이 참담하고 육중한 이야기를 밥 먹으면서 주고받을 수는 없다.


글쓰기를 멈추고 망연히 앉았다가 돌이켜 생각해본다.


아니다. 옳지 않다. 이 이야기야말로 밥 먹으면서 주고받아야만 한다.


밥이 하느님 아니신가. 더욱 극진히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면 밥상에 앞서 주안상을 내면 될 일이다. 나는 실제로 마음 아픈 사람과 상담실 숙의가 끝나면 선주후면先酒後麵의 예를 지켜 밥상대화를 이어간다. 밥을 같이 먹는 것만으로도 신뢰·일치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고 한다. 밥상공동체는 가히 진리에 값한다고 할 것이다.


자신이 생명 세상에 들어온 해에 죽음 세상으로 끌려 나간 소녀 이야기를 들으며 저자가 느꼈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잠시 공감을 청해본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온다. 먹먹한 가슴에 눈물이 더해져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환자 대기실에 켜 놓은 대형 TV 화면에 질탕한 ‘먹방’이 흐른다. 쩡 소리를 내며 심사가 두 쪽으로 갈라진다. 바람 소리 내며 돌아와 분노를 장착한 슬픔으로 다시 글을 쓴다.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일당이 일본에 헌정한 12·28합의를 전면 재검토한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저자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아마 김복선 할머니와 나눈 식사와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나도 지금 이 순간 내 젖은 영혼으로 김복선 할머니와 헨미 요의 밥상공동체에 참여한다. 다시 한 번 김복선 할머니의 영혼에 큰절 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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