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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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랑군(양곤)에 다다랐다.

그곳 외곽의 붉은 땅에 단층 임시 건물이 있었다. ‘랑군 군인 위안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복도 양쪽으로 열 개씩 전부 스무 개의 방이 있고, 그녀는 ‘3호실’로 들어가 ‘미쓰코’로 불렸다.

쇼와 천황의 ‘수족 같은 신하들’이 바지춤을 내리고 줄을 섰다. 미쓰코는 하루에 20~30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그 세계에는 ‘끼니와 끼니 사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침 8시에 식사를 마치면 일반 병사들이, 오후에 점심을 먹고 나면 하사관들이, 저녁 식사를 끝내면 장교들이 찾아왔다. 병참부 군인들이 가져오는 퍼석퍼석한 밥과 된장국, 단무지를 미쓰코 같은 여자들이 허겁지겁 먹고 나면 끝도 없이 그것이 시작되었다.

아니, 저녁식사가 끝나면 또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사용한 주머니(콘돔)를 장교가 오기 전에 씻어야 해.”

김 할머니는 양손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고무 집는 동작을 해보였다.

“강가에서 씻었어. 모두 웅크리고 앉아서. 괴로웠지, 한심했어, 그게 가장.”

냉면이 고무줄처럼 딱딱해서 목구멍을 막았다.(330쪽)


‘끼니와 끼니 사이’라는 표현은 절묘하다. 진리에 비추어 말한다면 인간의 삶은 끼니와 끼니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에피소드다. 이는 잠과 잠사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이는 성교와 성교 사이라 해도 만찬가지다. 그런데, 여기 성교와 성교 사이가 폭력으로 왜곡되면서 끼니와 끼니 사이가 왜곡되는 반-진리의 세계가 참혹하게 펼쳐진다. 윤간과 윤간 사이에 끼니가 존재함에도 윤간 체제는 그것을 끼니와 끼니 사이라 이름 한다. 반-진리를 진리로 포장한 협잡이다.


협잡의 한복판에서 끼니와 끼니 사이 지옥을 견뎌야 하는 성노예 여성을 생각함으로 다시 영혼을 가다듬어보자. 지옥과 지옥 사이에서 먹는 “퍼석퍼석한 밥과 된장국, 단무지”는 대관절 그에게 무엇인가? 모진 목숨 이어가게 하는 최소한의 ‘영양 물질’인가? 거꾸로, 자동차로 치면 휘발유에 지나지 않는 그것을 먹고라도 이어가야 하는 목숨이란 무엇인가?


원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거절해서 죽는 것도 아닌 이 도저한 수동성의 확장에 몸서리칠 일 하나가 기어코 더 남아 있다.


괴로웠지, 한심했어, 그게 가장.


윤간에 쓰인 콘돔을 “웅크리고 앉아서” 씻는 일은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는 일과 기이한 일치를 이룬다. 비참함의 정점을 찍는 일이 하필 콘돔 씻기였다. 씻어서 뭔가를 떨쳐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끝없이 밀려오는 지옥을 맞이하는(!) 것이니 그 얼마나 아뜩한 절망이었으랴. 가장자리에서 보는邊見(헨미) 평범한 사람庸(요)조차 “냉면이 고무줄처럼 딱딱해서 목구멍을 막았다.”고 했으니 오죽했으랴.


유·소년기 내 아버지는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반드시 때려서 해결했다. 느닷없이 맞는 것은 그래도 견딜만했다. 가장 살 떨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때린다고 미리 경고한 다음 매를 준비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기다릴 때였다. 문제는 대부분 그 시간에 밥을 먹는다는 것이었다. ‘팥쥐 엄마’는 밥을 주면서 늘 그 특유의 냉담한 어조로 ‘밥 먹고 나면 종아리 걷고 아버지 방으로 가’라고 고지해주었다. 어린 나로서는 차마 묘사할 수 없었지만 그야말로 밥알이 돌처럼 “딱딱해서 목구멍을 막았다”고 할 상황이 아니었을까.


밥 먹는 시간은 제의의 시간이자 축제의 시간이다. 설움을 서로 엮는 시간이자 행복을 서로 나누는 시간이다. 그 밖의 것을 들이는 일은 삼가야 한다. 오늘 우리 끼니는 어떤가. 이전 끼니와 사이 벌어졌던 일로 말미암아 회한에 젖고, 다음 끼니와 사이 벌어질 일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으로 채워지는가. 그래서 많이 불편한가. 그러면 ‘미쓰코’의 끼니를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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